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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Aug 08. 2020

[연극] 자기혐오 페스티벌 - 물의 기억




연극 : 자기혐오 페스티벌 - 물의 기억

공연장소 : 대학로 피카소 소극장

공연기간 : 2020년 7월 21일 ~ 2020년 8월 20일

관람시간 : 2020년 8월 7일 오후 4시





     요즘은 정말 비가 지겹게도 내린다. 다행히 이 날은 비가 오지 않아서 연극을 보러 가는데 고생하지는 않았다. 좀 더 빨리 보러 가려고 했는데 집 주변에 수해가 나서 어수선하다 보니 좀 늦어졌다. 정말 이번 비는 대단하다. 장마와 겹쳐서 공연하고 있는 연극들은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사실 [물의 기억]이라는 제목처럼 이 연극은 비 오는 날과 잘 어울린다.

     사실 이 희곡은 쓸데없이 대사가 많다. 장황하기도 하다. 문학으로 읽기에는 괜찮을지 모르지만 연극화시키기에는 문제점이 많다.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대사 전달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대사 전달이 되지 않으면 정말 그저 쓸데없이 대사만 많고 장황하기만 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 희곡은 징검다리를 건너듯 대사 하나하나를 확실히 밟으며 나아가야 한다. 이 희곡의 이야기 구성은 단순하다. 어렸을 때부터 병적으로 물에 집착했던 한 남자가 끝내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물속에서 목숨을 끊는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데 그저 사회 부적응자의 죽음이라 거나, 자아와 무의식의 대립, 자연과 문명의 갈등, 혹은 신화적인 상징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 중에 어떤 것이 작가의 의도인가를 따지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다. 작가는 작품을 마치는 순간 완벽한 3자가 될 뿐이며 오히려 독자들보다도 더 작품에서 멀어지는 데, 그는 순수한 독자가 될 자격마저 없기 때문이다. 작품은 독립적으로 자신의 길을 갈 것이며 자유롭다. 굳이 작품을 작가의 틀 안에 맞출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그것을 경계해야 한다. 작품은 독자에 의해, 재창조하는 사람들에 의해 작가 이상이 되며 작가 이상이 되어야 한다.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에 대해 시시콜콜 부연 설명을 함으로써 오히려 자신의 작품을 망치는 걸 많이 보아왔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말해야 할 것은 글 안에서 모두 말하고 그 외의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할 것이다. 어쨌거나 이 희곡은 어떻게 해석되고 표현되든지 간에 감성이 중요하다. 이 희곡의 설득력은 결국 이성이 아니라 감성에서 오는 것이다. 지나치게 분량이 많은 대사가 그 감성을 방해하기도 하지만 결국 한 곳으로 흘러가도록 길을 터준다.

     나는 처음에 이 연극에 대해서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이 희곡을 기반으로 한 다른 연극을 보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 연극을 보면서 나는 상당히 놀랐다. 솔직히 말해서 상당히 짜릿했다. 희곡상에서는 주인공이 2개의 자아로 나누어지는데 연극에서는 더 나아가 4개의 자아로 찢어놓으면서 등장인물들 모두를 한 명의 자아 안으로 끌어들인다. 희곡에서의 표현보다 오히려 더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것이다. 그것이 지나치게 많은 대사를 여러 명의 배우가 나누기 위한 실용성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굉장히 강렬하고 독특하게 다가왔다. 3명의 남자1명의 여자는 서로 교차하면서 주인공의 내면으로 관객들을 이끌어 가는데, 마지막 장면을 여자에게 맡기는 대담한 선택을 함으로써 주인공의 인격을 성별 너머로 확장시킨다. 또 희곡에서는 한 남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욕조에 들어가 있으면서 연극 전체에 통일성을 부여하고 '물'을 일관성 있게 관객에게 접촉시켰다면, 이 연극에서는 네 명의 배우들의 끊임없는 움직임이 연극 전체에 어지럽고 불안한 활력을 제공한다. 이러한 기획은 분명 호불호를 - 특히 희곡을 읽어본 사람에게는 -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 완성도를 현저히 떨어뜨릴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도 다소 그러했다. 그러나 대범하고 야심차지 않은가. 심지어 공격적이기까지 하다. 그리고 그 공격성은 불안하다 못해 불온한 분위기마저 풍긴다. 만약 이 희곡을 '슬픔'보다는 '불안'으로 해석했다면 이러한 기획의 의도는 적절했다고 할 수 있다.

     처음 연극이 시작되었을 때는 조금 걱정이 되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이 희곡은 대사가 중요하다. 대사 하나하나의 전달력이 높아야 연극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다. 그런데 연극의 속도감이 생각보다 빨라서 대사의 전달력이 떨어지고 여유가 부족해 보였다. 또 한편으로는 이 희곡은 대사가 많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 대사들 사이의 여백이 상당히 중요하다. 연극이 대사 사이에서 침묵할 기회를 줘야 한다. 하지만 이 연극에서는 하나의 대사가 서둘러 다음 대사를 부르는 듯한 급급한 느낌이 있었다. 그것은 공간과도 연결된다고 할 수 있는데, 이 희곡은 조금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한다. 공간의 넓이 자체가 물의 이미지를 반영하기 때문이며, 배우들이 공허한 공간을 넓게 사용하는 것이 표현에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극장인 관계로) 공간이 작다 보니 이미지가 제한되고 협소한 느낌이 들었다. 또 한 가지는 희곡에서는 대사들의 나열되는 평형성과 건조함을 상쇄하기 위해 영상이 사용되고 있다. 이 희곡에서 영상은 그저 장식이 아니라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대사와 대립하며, 침묵을 끌어내는 중요한 역할을 가지고 있다. 이 장황하고 거창한 대사들이 이미지의 출현에 의해 침묵하는 순간들은 중요하다. 사실 이 긴 대사들은 침묵하는 순간을 위해 나열되고 있는 것이다. 이 연극에서는 영상이 사용되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어떤 이미지 작업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예를 들면 원래 희곡에서는 엄마가 따로 나오지는 않는데, 이 연극에서는 실제로 엄마가 등장한다. 그러데 너무 밋밋하고 평이하게 지나가서 애써 등장한 효과를 충분히 거두지 못한 듯하다. 차라리 엄마가 새파란 수영복을 입고 나타나 물의 인격적인 이미지가 되어주었다면 좀 더 중요하고 강렬한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사실 이 연극은 완성도가 높다고 할 수는 없다. 대사의 전달력이 떨어지고 진행이 조급하고 산만한 것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러나 나는 연극이 끝날 즘에는 그런 모든 단점들을 잊고 연극에 푹 빠져 있었다. 무엇보다 마지막 장면은 희곡과는 전혀 달랐는데 나는 마음에 들었다. 희곡에서 주인공은 홀로 물이 되어 가지만 이 연극의 결말에서는 모든 자아들이 함께 서로를 위로하며 끝을 맺는다. '물' 자체의 이미지는 약화되었지만 고독과 비극성은 강조되면서 주인공의 '좋은 죽음', '기쁜 자살'에 대해 직접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희곡에서는 주인공이 사실상 '물'이었다면 이 연극에서는 좀 더 사람 쪽으로 무게 중심이 옮겨간 느낌이다. '물'의 본질이 지나치게 축소됨으로써 전체적으로 감성적 설득력이 약화되고 통일성이 깨진 감이 있지만 그 나름의 의미가 있으며 인상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희곡을 이렇게 강렬하고 과감하게 해석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심지어 좀 더 과감해도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좀 더 완성도를 높인 무대에서 또 볼 수 있다면 좋겠다고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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