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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Aug 16. 2020

[연극] 아는 엔딩




연극 : 아는 엔딩

공연장소 : 대학로 선돌극장

공연기간 : 2020년 8월 7일 ~ 2020년 8월 23일

관람시간 : 2020년 8월 15일 오후 4시




     장마가 끝나기도 전에 코로나 확진자가 하루에 160명가량으로 늘어나면서 분위기는 다시 뒤숭숭해졌다. 나는 마스크를 단단히 쓰고 여분의 마스크까지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언제까지 마스크를 쓰고 생활해야 하는 걸까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설마 몇 년이고 계속되는 건 아니겠지. 개인적으로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것이 싫지만은 않았다. 가면을 쓰고 다니는 듯해서 오히려 마음이 편한 점도 있었다. 코로나 초창기만 해도 나는 마스크 쓰기가 즐겁다고 글에 쓰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가면이란 내가 벗고 싶을 때 벗고 쓰고 싶을 때 써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강제로 얼굴을 틀어막는다면 철가면과 같은 족쇄가 될 뿐이다. 

     공연장에 도착해서 무대를 봤을 때 소품 위에 찍힌 브랜드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코스트코, 코카콜라, Dole 등등, 그리고 주인공 역시 등에 커다랗게 [아디다스]라고 쓰인 잠바를 입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런 구체적인 현실성이, 그리고 동시에 구체적인 상징성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연극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졌다. 연극은 시작부터 대놓고 노골적으로 예언적이고 세기말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불특정한 세계에서 불특정한 장소에 모여있는 불특정한 사람들.  [고도를 기다리며]나 [엔드 게임]처럼 베게트 풍의 영향을 짙게 받은 듯했다. 이런 추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연극일수록  문학성이 중요한 법이다. 연극 초반에 마르타와 에밀리오가 나누는 선문답 같은 대화들은 일단 시작으로 나쁘지 않았다. 자, 그래, 이제 뭔가가 나오겠지. 나는 기다렸다.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아무 내용도 아무 감성도 느끼지 못한 채 연극이 끝나버렸을 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도대체 내가 뭘 본 건지도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우선 희곡부터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현대인의 고독과 무기력, 자본주의의 쓰레기처럼 방치된 사람들의 절망, 뿌리 없이 떠돌아야 하는 아웃사이더의 숙명 등등등 등등등...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는 알겠다. 아니 너무 자알 알겠어서 문제다. 이걸 이렇게 깊이도 없이, 이렇게 뻔하고 단순하게, 아무런 문학적 상상력도 표현력도 없이, 이토록 쉽고 간편하게 쓰고 말아버렸단 말인가. 이건 유치하다고도 할 수 없는데, 유치할 정도의 적극적인 시도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하얀 백지 위에 가득 쓰인 1+1 -1 +1 + 1 +1 -1 -1 + 1 -1 ...... =1 라는 산수 연산을 보고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그토록 긴 대사를 들으면서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도 희한한 경험이었다. 거기다가 이 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희곡을 건조하기 이를 데 없이 연출하는 바람에 나는 더 아연실색했다. 좋게 말하자면 너무 정직했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예술이란 관객을 어르고 속이고 뺨을 때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솔직히 말하겠다. 나는 지루했다. 거의 졸 뻔했고 사실 나중에는 거의 졸았던 것 같다. 연기자들은 매력적이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한 가지 좋았던 점이 있기는 했는데 극의 결말이었다.  마지막에 에밀리오는 몇 발자국만 옮기면 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성실하고, 정직하며, 정당한 시민에게 맞아 죽고 만다. 그것은 소극적인 저항으로 보이지만 실은 성실하고, 정직하며, 정당한 이 사회에 충격을 줄 만큼 적극적인 저항이다. 그는 이미 세상 끝까지 내몰렸고, 더 이상 갈 곳이 없으며, 아무런 기대도 희망도 없이, 더 이상 그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기에, 이 사회의 배려와 질서와 명령에 복종할 아무런 의무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언뜻 비논리적이고 소모적인 그의 죽음은 마치 논리적이고 건설적인 이 사회의 종착점을 보여주는 듯하다. 어쩌면 도태되는 사람들은 예언자들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의 운명으로 이 세계의 운명을 예언한다. 그리고 그것은 현대 사회에서 자살이 그토록 충격적으로 여겨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마음에 와 닿았지만 이마저도 그렇게 효과적으로 표현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말하건대 좋은 의도와 좋은 예술은 아무 상관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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