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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Aug 29. 2020

코로나 때문에 또 연극 관람을 쉬며

고대 그리스 배우 조각상 (BC 4-5세기경)        




     지난 몇 달 동안 1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연극을 보러 다녔다. 그동안 코로나 때문에 못 봤던 만큼 더 열심히 봐야겠다는 생각에 가능한 한 빼먹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처음에는 줄줄이 공연이 취소되거나 공연하는 연극 자체가 별로 없어서 예매하는데 애를 먹었지만 점점 좋은 작품들이 공연되기 시작해서 한참 전의를 불태우던 중이었다. 마스크를 쓰고 봐야 하는 불편도, 공연장에 입장하기 전에 치루어야 하는 방역 절차도 까짓 거 뭐가 대수랴. 어느 정도의 비장함은 연극 관람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혹은 흑사병을 피해 전원의 주택으로 숨어들었던 데카메론의 남녀들처럼 그런 끈끈한 은밀함도 나쁘지 않겠지. 우리는 결코 비굴하지 않으리라아-. 그런데 점점 나아지는 것만 같았던 코로나 사태가 어느 순간 다시 200명을 훌쩍 넘기 시작했고, 급기야 예매했던 연극 [복수자의 비극]이 취소되었다는 문자를 받았다. 사실 취소되지 않았더라도 공연장에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될 정도로 코로나 사태가 악화되어서 앞으로 최소 2주 정도는 공연장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을 생각이다. 이런 시국에 비굴이니 뭐니 객기를 부리는 건 어리석은 일이고 말고. 특히 이번에는 연극배우마저 코로나에 걸렸다고 해서 더 염려가 되는 게 사실이다. 세상의 이면인 무대 위의 배우들마저 코로나에 걸렸다는 건 세상에 더 이상 안전한 곳은 없다는 뜻인 것처럼 느껴진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다. 무대 위에 배우가 서있는 것만으로도 연극은 이미 연극으로서 충분하다. 우리는 단지 무대 위에 있는 한 명의 배우를 보기 위해 그 먼길을 달려간다. 연출이니, 연기니, 희곡이니, 이야기 구성이니, 대사니, 퍼포먼스니, 연극 미학이니, 무대성이니 등등의 것은 사실 모두 사족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내가 매주 써왔던 연극 감상은 그저 사족에 대한 사족일 뿐이다. 연극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가십이다. 연극의 현재성, 현장성은 결코 글로도, 심지어 영상으로도 기록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연극은 언제나 '현재적'인 것이다. 배우와 관객이 각자의 먼 여정을 돌고 돌다가 돌연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모여들었다는 것, 거기에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종의 신비가 있다. 거기서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배우는 왜 무대 위로 올라가는가? 무대란 무엇이고 배우란 또 무엇일까? 어차피 공연장에도 가지 못하는 마당에 무대와 배우에 대해서 한 번 따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극에서 무대가 더 중요한지 배우가 더 중요한지 처음에는 결정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연극이란 결국 '거리두기'라는 걸 - 사실 '거리두기'는 모든 예술의 본질이기도 하지만 - 상기할 때 배우보다 무대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 배우가 없는 텅 빈 무대만으로도 어떤 의미가 있다. 결국 배우란 '연기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무대 위에 있는 사람'이다. 무대가 없다면 그는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이며 연기와 삶을 구분할 수도 구분할 필요도 없어진다. 그건 단지 공간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실 모든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삶 속에서 연기를 하고 있는 연기자이기 때문이다. 다만 무대는 그것을 조망할 수 있도록 경계를 만들어주는 데, 그 경계가 마치 마법진처럼 독특한 기능으로 작동한다. 마법진이 현실의 외부에서 마법을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현실 이면에서 늘 작동하고 있는 우주의 법칙을 가시적이고 기획적으로 드러내는 것뿐인 것처럼 말이다. 혹은 진부한 표현처럼 무대는 우리를 비춰주는 거울이라고 할 수도 있다. 산산조각 나 있는 우리의 현실을 조각조각 이어 붙여 어떤 상을 만들어내고는 다시 그것을 스스로 산산조각 낸다. 어쨌거나 무대를 마법진에 비유하든 거울에 비유하든지 간에 그것은 일종의 [틈새]이다. 현실의 일상을 억지로 비집고 열어낸 그 틈새는 시간도 공간도 중력도 없이 텅 비어있으며 일상의 어마어마한 압력으로 인해 곧 다시 오그라들어 영원히 사라지고 마는 순간적이고 임의적인 장소이다. 그것은 마치 어마어마한 힘과 의지가 모여 거대한 죽음 사이에 작은 틈새를 만들어내지만 곧 그 압력에 의해 사그라들고 마는 찰나의 생명과도 닮았다. 그러므로 무대는 - 배우 없이도 - 자기 자신만으로도 비극적이고 일면 종교적인 비장함이 있다. 그리고 텅 비어있는 이 곳에서야 말로 순수한 유희가 가능하다.

     자, 마침내 무대 위로 배우가 등장한다. 우리는 누군가의 존재감을 이토록 강렬하게 느끼는 적이 없다. 그는 어느 때도 아니고 어느 곳도 아닌 그저 바로 우리 눈앞에서 우뚝 솟아있다. 그런데, 그는 누구인가? 이것이 바로 모든 연극을 관통하는 본질적인 질문이다. 이 질문이 연극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연극 무대 전체를 진동시킨다. 가령 햄릿 역을 맡은 배우 A씨가 무대 위에 섰다고 하자. (하지만 이것은 사실 주인공이냐 엑스트라냐 하는 문제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는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를 부르짖으며 아버지의 복수를 다짐한다. 그렇다면 그는 햄릿인가? 하지만 그가 햄릿이 아니라는 건 우리도 알고 배우 자신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여전히 그는 A씨인가? 아니, 그가 하는 말, 그의 행동, 그의 의지는 결코 A씨의 것이 아니다. 혹은 그는 햄릿과 A씨 중간쯤의 누구인 걸까? 아니면  햄릿도 A씨도 아닌 전혀 다른 누구인 걸까? 아, 그렇다면 그는 햄릿이면서 동시에 A씨인가? 그런데 이건 그저 말장난이 아닌가? 사실 그것이 어떤 답이든지 간에 답을 확정하려 하는 순간 그것은 모두 말장난이 된다. 왜냐하면 이것이 연극의, 그리고 모든 예술의 함정인데, 연극이란 그리고 예술이란 답을 거부하는 혹은 답을 거부하기 위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고정된 답이 아니라 그 질문 자체가 주는 진동이다. 그러한 진동 속에서, 아니 바로 자기 자신이 진동 자체가 되면서, 배우는 마치 반신과도 같은 존재가 된다. 그리하여 그는 무대 위에 들어 올려져 연극이라는 십자가 위에 높이 매달린다. 관객들은 배우가 십자가 못 박혀 피 흘릴 때는 기꺼이 웃음을 터트리지만 그가 [저들은 자신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외칠 때 무릎을 꿇고 기어가 그의 발에 매달린다. 그가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 매달려 있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 순간  관객 역시 배우와 함께 진동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새 [그는 누구인가]라는 말에서 주어가 사라진다.

     [누구인가]

     바로 이 것이 연극의 유일한 질문이며 모든 것이다. 배우는 이 질문을 견디어냄으로써 머리에는 저주이자 영광의 상징인 가시관이 씌어질 것이다. 우리의 죄인이자 구세주. 그는 이 무대와 함께 죽을 것이고 또 다른 무대와 함께 부활할 것이다. 그 사이 동안에는 그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렇게 연극이 끝나고 모두들 밖으로 나오면 사람들은 그동안 한 평생이 아니라 그저 한 시간이 지난 것뿐이라는 사실에, 세상이 여전히 멸망하지 않고 멀쩡하다는 사실에,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무심한 얼굴에 놀라서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뿔뿔이 흩어진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는 서로 만나지 못하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며, 설사 기억한다고 하더라도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우리는 다시 길을 잃은 미아가 되어 이 세상을 헤매고 다닐 것이다. 




     (글이 다소 낭만적이고 거창하게 된 것은 그놈의 코로나 탓일 테지. 만약 코로나가 더 길어진다면 '관객'과 '시선'에 대해서도 한 번 따져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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