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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Sep 25. 2020

코로나 때문에 계-속 연극 관람을 쉬며


공연 마스크 모자이크 (로마, 2세기)

                                    



     나는 8월 중에 일찌감치 9월 연극 공연 4편을 예매해 놓았었는데 현재 그 공연은 모두 주최 측에 의해 취소된 상태다. 어찌 보면 다행이기도 한데,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루에도 몇 번이나 마음을 고쳐먹었을 나의 내적 고뇌를 말끔하게 정리해준 셈이다. 지금은 에라 모르겠다, 공연 안 본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배부르고 등 따시면 되었지, 그 돈으로 맛난 거나 사 먹어야겠다... 뭐 대충 이런 심정이다. 코로나 확진 환자가 하루에 100명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언제 다시 늘어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공연계는 이제  정말로 깊은 침체기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연극 공연을 1주일에 한 번씩 거의 의무처럼 보러 다니던 나까지도 관람이 망설여지는 시국이니 말이다. 그래도 브런치에 연극 공연 관련 매거진을 만들어놓고는 마냥 비워둘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간만에 뭐라도 끄적여보려고 한다. [시작하며]까지 포함해서 '연극&코로나 시리즈 제4탄' 정도 될 것 같다.

     나는 글을 쓸 데 기독교적 상징이나 비유를 그리 선호하는 편은 아니다. 내 개인의 삶에서 뿐만 아니라 인류의 삶의 관점에서도 이제 지긋지긋할만하기 때문이다. 사실 수다쟁이 신 그동안 너무 많은 말을 하지 않았나. 너무 많은 상징과 비유들을 남발하고 소비하도록 강요하지 않았나. 그래서 성경 비슷한 얘기만 나와도 넌더리가 날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연극에 대해서 만큼은 즐겨 기독교적 비유를 떠올리곤 하는데 무대 위의 배우가 일종의 희생제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다른 종교에서는 비밀에 부쳐있거나 에둘러 암시되어 있는 희생제물의 신성을 노골적으로 폭로하고  교리화 시킴으로써 유의미한 독자성을 확보하였다. 성경의 거대한 드라마가 적시하는 것처럼 우리는 제물을 신에게 바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제물에 깃들어 있는 신을 죽이고 다시 부활시키는 것이다. 즉, 제물이야말로 신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연극은 내게 성경적인 제의를 연상시키는데, 종교가 멸종한 오늘날에 연극이야 말로 유일하게 신성을 지키고 있는 신전 인지도 모르겠다.

     그럼 성경적 비유를 좀 더 밀고 나가 보자면, 나는 배우와 관객의 관계를 예수와 유다의 관계로 상상하곤 한다. 내가 무대 위의 배우를 우리 모두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처럼 여긴다는 건 앞에 썼던 글들에서 여러 번 밝혔기 때문에 이번에는 관객에게 더 집중해 보려 한다. 모두 알다시피 유다는 예수를 팔아넘기고, 그의 손 발에 가차 없이 못질을 하고, 십자가에 매달아놓고 구경하며 깔깔거린 배신자이다. 그러나 누가 예수에 대한 유다의 사랑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유다의 키스를 생각해 보라. 유다는 예수를 죽이고 자기 자신마저도 죽였다. 예수를 판 대가로 받은 돈은 그들 죽음의 지참금이었다. 그 보다 더 깊고 낭만적인 사랑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왜 유다는 예수를 배반했을까. 그건 중요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유다가 아니었다면 누가 예수를 희생양으로 바칠 수 있었을 것인가, 이다. 유다가 아니었다면 인류의 죄를 구원하는 그 거대한 연극판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 유다는 사실 반드시 일어나야만 하는 일을 일어나게 한 것뿐이지 않은가. 그것도 가장 의미심장하고 극적인 방식으로 말이다. 그것은 신의 의지이자 유다 자신의 의지이기도 했다. 그들은 같은 의지 안에서 궁극의 합일을 이룬다. 그리하여 유다는 배신자의 누명을 벗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이 우주적 공연의 주인공이 된다. 유다 개인의 굴곡진 감정이나 생각이 어떠했든 간에, 그는 결국 예수와 함께 [메시아]라는 역할을 완성시켰으며, 자신 역시 메시아이며, 예수만큼이나 신적인 존재이다.

     관객 역시 이와 같다. 예수가 아무리 신이라고 하여도 아무도 없이 혼자 십자가에 매달려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것이 애초에 신이 인간을 창조해낸 이유일까?) 배신자들, 구경꾼들, 증인들, 추종자들과 비난자들, 다시 말해 관객이 없다면 그의 행위는 무의미하며 사실상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사건이 있기 때문에 구경꾼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구경꾼이 있기 때문에 사건이 생기는 것이다. 말하자면 태초에 관객이 있었다. 앞에 유다에 대해 언급했듯이, 각자 자신만의 개성이나 역할, 역사를 가진 관객들의 연극을 보는 각자 자신만의 이유나 감상, 평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건 배우들 역시 마찬가지인데 무대 위에서 배우의 개인성은 뛰어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대의 연극에서 배우들이 각각의 개인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면을 썼음을 이해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나를 나로 만드는 그 모든 것들을 잠시 내려놓고 거대한 의지 안에서 우리 모두를 관통하는 하나의 인격이 되어 현존하는 것이다.  그것은 '신의 인격'이라고 부를 만한 근원적이고 원형적인 예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다시 '인간의 인격'이라고 고쳐쓸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제 '시선'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과연 무대 위에서 관객을 바라보고 있는 배우는 실은 무엇을? 어디를? 언제? 누구를 바라보고 있는 걸까? 마찬가지로 과연 무대 밑에서 배우를 바라보고 있는 관객들은 무엇을? 어디를? 언제? 누구를 바라보고 있는 걸까?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낯선 사람들이 한 장소에 모여 서로를 바라보며 대체 무엇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그들의 시선이 마주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우리 모두는 - 배우든 관객이든 상관없이 - 서로에게서 바로 '인간의 인격'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서로의 거울인데 거울이란 자기 자신을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파편을 통해 그 너머를 보는 것이다. 메세지니, 이야기니, 대사니, 연기력이니, 무대 장식이니 하는 것들은 그것이 때로는 너무나 매혹적으로 우리를 사로잡는다 해도 연극에 대한 근원적인 원동력은 아니다. 본질적으로 연극은 관객과 배우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공연장에서 그저 서로 시선을 마주치기만 해도 이미 완성되고 성취되는 것이다.

     공연장 안에서 우리는 모두 배우이면서 동시에 모두가 관객이다. 무대는 무대의 단상을 넘어 관객석을 넘어 한 없이 확장되며 그 심연 속에서 배우는 배우의 역할을 관객은 관객의 역할을 연기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결국은 그러한 기술적인 차이마저도 무색해져서 배우도 관객도 모두 사라지고 어느새 신들만이 남는다. 공연장은 신들의 놀이터인 셈이다. 마치 우리 자신 각자가 신들의 놀이터이듯이. 우리는 그 놀이터가 텅 비어있음을 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텅 빔이 아니라 꽉꽉 채워져서 끊임없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그런 텅 빔이다. 우리는 그런 텅 빔에 우리를 내던지기 위해 공연장에 간다. 종교적인 용어를 빌린다면 [우리는 '기도'를 드리기 위해 공연장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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