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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Oct 19. 2020

코로나 때문에 쭉쭉쭉 연극 관람을 쉬며


배우와 연주자를 묘사한 로마 모자이크 (BC2)





     도대체가 코로나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정말이지 이제는 스트레스를 넘어 울적해질 지경이다. 마치 밀폐가 잘 되지 않는 반찬통 안에 삶을 통째로 넣어둔 기분이 든다. 당분간은 괜찮겠지만 결국 상하고야 말 것이다. 혼자 지내기를 좋아하는 나도 이러니 활동적인 사람들이야 오죽할까 싶다. 비가 오면 불평을 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우산을 챙겨 들듯이 이제 코로나에게도 그렇게 적응해야 되는 걸까. 어쨌거나 확진자 수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해서 나는 연극을 예매했다. 이미 수없이 그랬던 것처럼 어쩌면 또 일방적으로 취소될지도 모르지만 뭐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 아닌가.

     다시 연극 감상을 시작하기에 앞서서 지난번에 썼던 [코로나 때문에 계-속 연극 관람을 쉬며]를 짧게 보충해 볼까 한다. 장황하게 두서없이 늘어놓았던 글인데 거창하게 성경 이야기까지 끌어다 붙였었지. 예수니 유다니 신의 인격이니 하는 것들..... 그래, 내가 했던 말처럼 배우는 예수이고 관객은 유다라고 치자. 그리하여 신의 인격과 접촉하기 위해 그 모든 역사와 드라마가 창궐하였고 다시 해체되었다고 치자. 그런데, [신의 인격]이라는 것이 왜 중요하다는 것일까. 도대체 그 모든 난리법석이 왜 필요했던 것일까. 왜 신은 구태여 인간에게 생명을 불어넣고 또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고는 다시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그 죄를 사하여 주더니 그것으로도 모자라 인간을 심판하려고 내려오는 것일까. 왜 인간은 구태여 허허벌판에 무대를 세우고, 배우들은 그 위에서 가상의 인물들을 연기하면서 외치고 울고 웃으며, 관객들은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인 채 그들을 지켜보며 그 공허에 자신을 내던지려고 하는 것일까. 

     나는 이 물음에 좀 더 접근하기 위해 새로운 비유를 끌어다 붙이려고 한다. 바로 [연금술]이다. 연금술은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무언가를 창조하는 작업이 아니다. 그들이 만들어내려고 하는 [현자의 돌]이란 사실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찾아내는' 것이며 더 정확히 말하자면 깨끗하게 씻어내어 온전하게 '건져내는' 것이다. 그것은 불결하고 혼잡하며 불완전한 모든 물질과 생명과 우주에, - 그 불결함과 혼잡함과 불완전함이 결국 물질과 생명과 역사와 시간과 개성과 인격을 만들어내지만 - 순수하고 근원적이며 본질적이고 절대적인 무언가가 있다는 믿음이다. 순수하고 근원적이며 본질적이고 절대적이라는 관점에서 그것은 과학과 철학과 종교의 경계를 뛰어넘어 [진리]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리]라는 말이 본능적으로 거부감과 알레르기를 일으킨다면, 간단히 말해서 - 지나치게 간단하게 말해서 - 모든 것에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사람이라는 존재에, 사람이 존재라는 사실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믿음, 그리하여 그 의미를 찾아내고 들추어내고 싶은 열망으로 인해 연극무대는 [연금술사의 실험실]이 된다. 연금술사가 유리 증류기에 여러 물질들을 넣고 섞는 것이 그것을 결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제하기 위한 것인 것처럼, 연극도 결국 가상의 이야기와 장소와 시간과 인물들을 무대 위에서 뒤섞는 것은 거짓말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인간과 이 세계의 의미를 찾는 것이 바로 연극의 목적이고 또 예술의 목적이며 사실상 과학까지 포함한 인간 활동 전체의 목적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인간의 의미]라는 것이 과연 무엇이냐는 것이다. 자, 자명하게도 내가 그것을 알리가 없지 않은가. 연금술사들에게 물어보라. [현자의 돌]이 정확하게 무엇이냐고. 그럼 그들은 화를 낼 것이다. 그걸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연금술사'인 것이다.

     그럼 인간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인 - 혹은 인간일 수 있는 - 걸까. 인간의 의미를 찾는 것이 바로 인간의 의미라면 사실 끔찍한 일이다. 그것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한 평생 거울 속 내 모습만을 바라봐야 하는 것과 같은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인간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이 세계에 순수하고 근원적이며 본질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란 없다는 걸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는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공연장을 찾는 것인지도 모른다. 실망하고 절망하면서도, 그리고 실망하고 절망하게 될 줄 알면서도 왜 다시 그리고 또 또다시 공연장을 찾느냐고? 글쎄, 아마도, 실망하고 절망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거기에 분노까지 스며든다면 더 좋겠지.) 그것은 마치 내일 죽는 줄 알면서도 오늘을 악착같이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같지 않은가. 사람들은 죽음을 모른 척하거나, 매일 죽음과 대면하거나, 혹은 정말 죽어버림으로써 자신의 부조리와 부당함에 대응한다. 연극을 하는 사람들은(만드는 사람과 보는 사람을 모두 포함해서)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이 아닌가 싶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매일 떠올리지 않고서는, 실망하고 절망하지 않고서는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모순되게도 삶에 대한 실망과 절망이 그들의 삶의 이유가 된다. 나도 안다. 다분히 자위적이고 자학적이라는 거. 연극이란 사실 자위적이고 자학적인 행위라는 거. 그리하여 그들은 불가능한 실험을 계속하기 위해 오늘도 증류기의 불을 지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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