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에고 리베라
착취는 쉽게 지탄받는다.
그것은 고발하기에 정의롭다.
메세지는 명확하고 이견을 허락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을 착취해선 안된다.
거기에 더 이상 덧붙일 말은 없다.
매일의 생계를 위해 돌덩어리처럼 무거운 꽃을
산더미처럼 짊어진 구부러진 어깨를 보라.
꽃의 아름다움은 기만적인 삶의 밑바닥을 난도질하는 칼일 뿐이다.
사람들은 외친다.
사람이 사람을 착취해선 안된다.
거기에 더 이상 덧붙일 말은 없다.
그런데 성적인 착취는 어떤가?
이건 또 얘기가 다르지.
그것은 기꺼운 욕망이라는 이유로,
근원적인 본능이라는 핑계로,
자유를 상징한다는 명목으로,
예술에서 높이 평가된다. 환영 받는다.
그림 속의 여자는 여자가 아니며
그러니 성적인 착취라는 것도 환상에 불과한 걸까?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라는 명제를
면죄부삼아 완장처럼 두르려는 것인가.
그럼 우리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
이것은 파이프가 맞고, 이것은 여자가 맞다고.
색색의 물감은 기만적인 삶의 밑바닥을 난도질하는 칼이라고.
우리 자신이 바로 저 발기된 성기처럼 뾰족한 꽃이라고.
자, 모두 그 꽃을 마음껏 휘두르시라.
착취의 고발과 착취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착취의 고발이야 말로 착취라는 이 기묘한 세계가
방탕과 음란을 고상하고 뻔뻔하게, 또한
합법적이고 도덕적이고 공공연히 즐길 수 있게 해 주었음을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그런데 누구에게?
화가에게?
아니면 그림 속 여자에게?
그림 속의 여자는 정말 여자일까?
어째서 여자의 허리띠를 저토록 꽉 죄어 놓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