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 단계

세키네 노부오

by 곡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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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ase of nothingness 무(無)의 단계 / Sekine Nobuo 세키네 노부오






그림은 안전하다.


그림과 우리는 거울처럼 서로를 마주 보지만 실은 수천만 광년이나 멀리 떨어져 있다.


우리는 결코 서로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


그림의 환상은 너무나 환상적이어서 마치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처럼 멀다.


아무리 잔인한 장면도, 아무리 날카로운 무기도, 그 어떤 고통이나 슬픔도


그 평면의 세계에서 납작하고 투명해져서


우리가 억지로 숨 쉬고 있는 이 단단한 공기의 밀도를 뚫고 나오지 못한다.


아름다움이란 결국


두 세계의 절대적인 경계 위에서 줄타기를 하는


절대적인 관객에게 가능한 평온함이다.


그러나, 조각(조형물)은 안전하지 않다.


애초에 우리 사이에 경계란 없다.


우리는 마치 배다른 혹은 씨다른 혼혈의 형제와 같다.


조각은 우리가 견뎌야 하는 같은 물리적 인과 속에서


외면과 내면을, 육체와 삶을,


가치와 모순을 공유하며 (공유하기 때문에)


서로 대립한다.


우리는 조각에게서 도망칠 수 없는데


그것을 뒤집어 돌려놓을 수도, 그 뒤가 막혀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우리는 조각이 아름답다고 말할 수도 없다.


아름답다는 것은 관객들이나 할 수 있는 평가이지


같은 무대 위의 배우들이 짐짓 서로를 향해 외칠 수 있는 대사가 아니다.


무엇보다 자명하게도


조각은 결코 환상이 아니며, 환상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그래서 조각은 신성시되며 또한 파괴되는 것이다.


구태여 적당한 표현을 찾자면


교란자-라고 해야 할까.


돌연 지구 내부에서 솟구쳐 올라 땅 위로 흘러내리는 마그마처럼.


마그마가 단단한 돌이 되면


우리는 그것을 어깨 위에 짊어지고 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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