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네
Le Déjeuner sur l'herbe 풀밭 위의 점심식사 - Edouard Manet 마네 (1863)
솔직히 말해서
이 그림이 감각적으로, 정서적으로, 논리적으로
회화적으로, 예술적으로, 역사적으로
어떤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보아도 일면 평범하고 지루한,
어딘지 조금 잰체하는 부르주아 지식인의 일상을 그린
어딘지 조금 잰체하는 부르주아 지식인의 그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문득 저 나체의 여성과 눈이 마주치면,
비웃는 것도 그렇다고 친절한 것도 아닌 미소가 작위적인
그녀의 아름답고 뻔뻔한 입술에 눈길을 빼앗기게 되면 그제서야
이 그림이 얼마나 도발적인지 알게 된다.
그것은 이 그림이 모더니즘의 시작을 알리기 때문이 아니라
포르노의 시작을 알리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페미니즘?
나는 딱히 그것에 대해 말할 생각은 아니지만 정확하게
그것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반드시 옳을 수밖에 없고 반드시 옳았으면 하는 페미니즘의
난해하고 불편한 본질.
그녀는 벌거벗었지만 희생자는 아니다.
주체적이고 자발적이며 거리낌이 없다.
그녀는 사람들의 욕망뿐만 아니라 비난까지도
너그럽게 포용하고 비웃을 준비가 되어있다.
그녀는 부끄러움이 없는 만큼 분노도 없다.
아 그래, 그것이 문제야. 분노가 없다는 것.
여성은 분노해야 마땅하지 냉소적이어선 안되니까.
그리하여 그녀는 페미니스트들의 적이 된다.
배신자이고 부역자이다.
남자들 앞을 자신의 하얀 나체의 몸으로 가로막고서
그들에게 향하는 화살을 대신해서 맞는
창녀이자 성녀.
그녀는 단연코 이 그림의 주인공이다.
포르노의 주인공이 언제나 여자이듯이.
그러나 동시에 그녀는 자신을 주인공으로 만드는 시선들, 남성들,
그 진짜 주인공들을 똑바로 직시함으로써,
스스로 시선이 됨으로써,
작가와 관객이 공모하는 남성적 시선의
근원적인 가증과 음모를 폭로한다.
이제 우리는 저 여자의 진짜 정체를 안다.
여자는 바로 '그림' 그 자체다.
창녀이자 성녀.
그리하여 (결국) 이 그림은 모더니즘의 시작을 알린다.
그리고 (물론) 그 뒤를 이어 포르노가
그 모더니즘을 완성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