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y Nielsen의 일러스트 [백설공주]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전 세계에 알 수 없는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다. 전염성뿐만 아니라 치사율도 매우 높아서 병에 걸리면 살아남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혹여 살아남는다 해도 생식기능이 망가져서 여자는 생리를 하지 않게 되었고 남자는 정자를 생산해내지 못했다. 이제 인류는 더 이상 자손을 가질 수 없게 된 것이다. 전염병은 빠르게 퍼져나가 몇 년 만에 지구 상의 대부분의 인류가 죽음을 맞았다. 사회, 국가, 나아가 문명이 너무 빠르게 붕괴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얼마만큼의 사람들이 살아남았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인류가 이룩한 모든 것이 폐허가 되고 황폐해졌다.
병에 걸렸다가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곳저곳을 홀로 떠돌아다녔다. 그들 중 대부분은 쓸쓸하게 죽어갔다. 운이 좋으면 다른 생존자들을 만나게 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렇게 만난 7명의 남자들이 함께 도시 외곽에 정착해 살게 되었다. 그들은 날이 밝으면 거대한 시멘트 덩어리가 겹겹이 쌓여있는 캄캄한 도시로 들어가 통조림이며 과자 등을 찾아다녔고 저녁이면 집으로 돌아와 자신들이 발견한 것들을 나누어 먹었다. 먹을 것은 충분했고 집도 편안했다. 그들은 여가시간에는 운동도 하고 게임도 하면서 즐겁게 보내려고 노력했다. 왁자하게 웃을 때도 있었지만 금세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들의 마음은 시멘트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 것 같았다. 밝은 태양도 그들의 축축하고 짙은 우울을 걷어내지는 못했다. 그렇게 산지 몇 년이 흘렀다.
해가 질 무렵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침대에서 자고 있는 한 여자를 발견했다. 여자라니. 그들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마치 외계인이라도 만난 것 같은 놀라움이었다. 그들은 숨을 죽이고 여자가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곁에서 기다렸다. 마침내 잠에서 깨어난 여자는 그들을 보고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황홀해져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따듯하고 부드러운 여성성이 그들의 거칠어진 영혼을 어루만져 주었다. 여자는 눈물이 날 정도로 예뻤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그것은 상대적일 수 없는 절대적인 아름다움이었다. 모두가 여자를 환영했다. 그렇게 여자는 그들과 함께 살게 되었다.
여자가 함께 살게 된 뒤부터 그들의 일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들이 도시에서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여자가 집에 불을 환하게 밝혀놓고 그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여자는 웃고 노래하고 춤을 추고 요리를 했다. 요리를 잘하지는 못했지만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따듯함, 남성이 오직 여성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따듯함이 온 세상을 가득 채웠다. 햇빛은 포근해지고 바람은 시원해졌으며 공기는 상쾌해졌다. 이제 밤마다 그들은 깊이 잠들 수 있었고 아침에 깨어나는 것이 즐거웠다. 그들은 시도 때도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웃음이었다.
물론 그들 사이에는 금세 성적인 긴장감이 돌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두 여자를 사랑했고 여자가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더 사랑해주기를 원했다. 여자를 차지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그들은 서로서로 눈치를 보고 견제하기 시작했다. 소소한 싸움과 반목들이 일어났다. 하지만 여자는 현명하게도 그 부분을 확실하게 못 박아 두었다. 그녀는 누구 하고도 특별한 관계를 맺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만일 그랬다가는 그들 사이에 질투와 번민 나아가 폭력이 만연할 것이고 결국 이 공동체는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이 붕괴되고 파괴될 것이다. 이미 그들은 그로 인해 충분히 고통받지 않았던가. 간신히 이룩한 이 화합을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한다고 여자는 주장했다. 여자의 말이 옳았다. 결국 남자들도 동의했다. 사실 다른 사람이 여자를 차지하느니 그 누구도 차지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그렇게 그들은 화목한 가족이 되었다. 여자는 공정하게 친절했으며 공평하게 사랑했다. 여자는 그들의 중심이었고, 어머니였고, 여신이었다. 남자들은 여자의 귀여운 어린아이들이었다. 아름다운 어머니 품 속에서 그들은 순수하고 천진했다. 그들의 집은 천국과도 같았다. 웃음이 끊이지를 않았다. 모두가 행복했다. 물론 욕망이 불쑥불쑥 그들을 괴롭히기도 했지만 그들은 자신을 잘 다스릴 수 있었다.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한 남자가 나타났다.
Arthur Rackham의 일러스트 [백설공주]
새로 온 남자는 10년 이상 사람이라고는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8명의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겁에 질려서 처음에는 불모지 광야로 다시 도망가려고 했을 정도였다. 진정이 된 후에도 그는 그리 유쾌한 사람은 아니었다. 말이 없고 우울했으며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그 새로운 남자를 환영해 주었다. 새로운 인물의 유입은 전체 공동체에 활기를 주었다. 모두들 새로운 이야기와 새로운 개성에 목말라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원래 뇌신경외과 의사였다고 했다. 그는 여러 가지 위생과 건강에 대해 실질적인 조언을 해주어서 모두를 - 특히 여자를 - 기쁘게 했다. 한동안 그들은 잘 지냈으며 오히려 모든 게 전 보다 더 나아진 듯했다.
얼마 안가 8번째 남자도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여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웠으니까. 8번째 남자는 홀로 떨어져 앉아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이 많아졌다. 물론 8번째 남자도 이들의 규칙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제대로 동의한 적이 없다는 걸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그 규칙이 너무 당연했으며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통보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8번째 남자는 7명의 남자들과 1명의 여자가 어린아이들처럼 어울리며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을 음울하게 바라보곤 했다. 그리고 그 음울함 속에서 여자를 향한 8번째 남자의 욕망은 나날이 커져갔다. 그녀는 이 세계에서 유일한 아름다움이었다. 그러나 또한 유일한 욕망이기도 했다. 여자는 조금씩 늙어가고 있었고 언젠가는 완전히 늙어버리거나 죽어버릴 터였다. 그리고 남자도 언제까지나 어린아이인 척할 수는 없었다. 남자는 여자의 사랑을 받는 것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여자를 숭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엄마의 젖을 빠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행복한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8번째 남자의 머릿속에서는 이런 생각들이 들끓고 있었다.
마침내 8번째 남자는 다른 7명의 남자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여자를 여자로서 욕망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이다. 처음에 7명의 남자들은 경악했다. 공포에 질렸고 분노를 터트렸고 그를 쫓아내려 하기도 했다. 다시는 그런 얘기를 꺼내지 말라며 8번째 남자에게 엄포를 놓았다. 그러나 그날부터 남자들의 머릿속에서는 8번째 남자가 심어놓은 생각이 떠나지를 않았다. 그것은 그동안 내내 그들의 마음속 깊이 또아리를 틀고 있던 생각이기도 했다. 사실 그들 역시 한 번도 그것을 잊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한단 말인가? 여자는 그 누구와의 관계도 단호하게 거부하지 않았나. 더구나 공평하게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애정의 불균형으로 인해 반목이 생길 것이고 공동체가 붕괴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러나 여자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은 이미 숨길 수 없는 욕망으로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도저히 진정되지가 않았다. 그러자 8번째 남자가 슬그머니 방법을 제안했다. 그는 자신이 뇌수술을 해서 여자를 식물인간으로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여자는 죽은 것처럼 영원히 잠들게 될 것이다. 그럼 모두가 공평하게 여자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공동체도 안전할 것이다. 아니, 어쩌며 더 단단해질 것이다. 처음에 남자들은 저항했다. 태양을, 여신을, 어머니를 잃어야 한다니 끔찍한 일이었다. 여자의 친절함과 따듯함 만큼 소중한 건 없었다. 여자의 노래와 춤, 그리고 웃음 소리야 말로 삶의 기쁨이었다. 그러나 남자들의 저항은 헛된 것이었고 결국 그들은 8번째 남자의 제안에 동의하고 말았다. 그 모든 것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침이 되면 자리에서 일어나 시멘트 덩어리가 겹겹이 쌓여있는 캄캄한 도시로 먹을 것을 찾으러 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자신들이 발견한 것을 나누어 먹었다. 그들은 운동을 하기도 하고 게임도 하며 여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밤이 으슥해지면 그날의 차례인 남자가 여자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오늘 밤 여자는 온전히 그의 것이었다. 그는 하룻밤 내내 여자를 마음껏 소유하고 차지하고 사랑할 수 있었다. 남자가 될 수 있었다. 자신을 잊을 수 있었다. 그동안 나머지 남자들은 불가에 모여 앉아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밤은 점점 깊어갔지만 잠은 오지 않았고 아침이 오는 것은 멀고도 두려웠다. 노래도 춤도 웃음도 영원히 사라졌다. 행복했던 유년시절도 꿈처럼 희미해졌다. 세상은 더이상 아름답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철없는 어린애들이 아니었고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