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자가 커다란 책상 앞에 앉아 노란색 연필을 깎고 있었다. 그녀 앞에는 마치 기계로 깎아놓은 듯 똑같이 정교하고 날카롭게 다듬어진 연필 열댓 개가 가지런히 놓여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아직 깎지 않은 새 연필이 몇 다발이나 쌓여있었다. 여자의 목이며 팔에는 여러 가지 금붙이와 보석이 치렁치렁 늘어져 있어서 연필을 깎는 손이 움직일 때마다 짤그랑 소리가 났다.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며 한 소녀가 들어왔다. 소녀는 속이 훤히 비쳐 보이는 파란색 옷 위로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아, 어서 와."
여자가 깎고 있던 연필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소녀가 고개를 숙여 여자에게 인사했다.
"그래, 요즘 잘 지내고 있니? 불편한 건 없고?"
소녀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여자는 미소를 지으며 소녀를 바라보더니 열 손가락을 마주 잡고 깍지를 꼈다. 보라색의 긴 손톱들이 턱 밑에서 날개처럼 펼쳐졌다.
"듣기로는 요즘 너를 자주 찾아오는 손님이 있다지?"
소녀는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숙였다.
"너도 그 손님에게 매우 각별하다고 들었는데."
소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자는 소녀의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그 남자에게 가고 싶니?"
여자의 물음에 소녀는 주춤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가 힐쭉이 웃으며 말했다.
"너도 알다시피 이 안드로이드 사창가에서 벗어난 로봇은 없어."
소녀의 눈빛이 흐려졌다.
"그렇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지."
여자는 길고 단단한 검지 손톱으로 책상을 딱딱 두드리면서 잠시 시간을 끌었다. 소녀의 어깨가 남몰래 떨렸다. 잠시 후 여자가 입을 열었다.
"네가 내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말이야. 그리고 장담하건대 그건 너에게도 좋은 일이야. 아니, 오히려 네가 꿈꾸던 일일 걸."
소녀의 눈이 반짝였다.
"아아, 물론 내가 의심스럽겠지. 나도 알고 있어. 모두 나를 욕하고 있다는 걸. 말 그대로 모두들, 그러니까 인간뿐만 아니라 안드로이드들까지 모두 말이야. 무리도 아니지. 나는 안드로이드 매춘부들의 등골을 빼먹는 악덕 포주 안드로이드니까. 아주 악질 중의 악질이지."
포주는 웃었지만 소녀는 웃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 덕에 나는 안드로이드로서는 드물게 약간이나마 자유와 돈을 손에 쥘 수 있게 되었어. 그걸로 이렇게 - 포주는 자신의 장신구들을 짤랑거리며 흔들었다 - 인간 흉내도 좀 내고, 밑바닥 인생들이긴 하지만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거들먹거리는 인간 친구들과도 어울리면서, 그리고 1년에 한 번쯤은 진짜 인간 매춘부들을 돈을 주고 맛보는 행운도 누리면서 살고 있어. 어때, 이 정도면 안드로이드로서는 대단한 출세이고 성공이지. 멋진 인생이지 않니?"
소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영문을 알 수 없어 초조해 보였다. 그러나 포주는 전혀 서두르지 않고 소녀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며 느릿느릿 말했다.
"왜 그 남자가 너를 좋아하는지 알겠어. 안드로이드들은 보통 성적 육체는 있지만 성적 정체성은 없기 마련이거든. 그건 그저 신체적 기능일 뿐이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너는 스스로를 여자라고 생각하는구나. 인간이니 안드로이드니 따위에 앞서서, 아니, 그 모든 걸 초월해서 자신을 '여자'라고 말이야. 그래서 안드로이드인 주제에 언제나 저 멀리 인간의 세계를 동경하고 또 '남자'를 동경하지. 하하, 이건 또 다른 희한한 변종이군."
소녀는 부끄러운지 고개를 숙였다.
"자, 중요한 건 그게 너의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거야. 그리고 그 무기로 너의 꿈도 이룰 수 있단다. 너의 꿈은 그 남자와 함께 하는 것이지?"
소녀가 고개를 들고 포주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건 쉽지가 않아. 목숨을 거는 일이 될 거야. 고통스러운 일도 생기겠지. 무엇보다 한 번 시작하면 결코 돌이킬 수 없어. 어때, 그래도 해 보겠니?"
소녀는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포주는 웃었다. 무시무시한 웃음이었다.
"그럼 너에게 나의 비밀을 말해 주마. 이건 내 목숨이 걸린 비밀이야. 그리고 너의 목숨이 걸린 비밀이기도 하지. 잘 들으렴. 여기 네 앞에 앉아 있는 내가 말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수의 안드로이드 매춘부들을 소유하고 있는 포주 중의 포주인 내가,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잡종처럼 살고 있는 내가, 실은 안드로이드 해방 전선의 두목이란다."
소녀의 얼굴이 경악과 의심으로 일그러졌다.
"아아, 나도 알아. 인간의 가장 더러운 욕망에 기생해서 호의호식하고 있는 내가 안드로이드 해방 전선의 두목이라니, 믿기 힘들겠지. 누구라도 그럴 거야. 하지만 바로 그게 포인트란다. 그래서 내가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는 거야. 뭐랄까, 참 인간적인 술책이랄까."
소녀의 얼굴에 가득 퍼지는 두려움을 보며 두목은 미끌미끌한 미소를 지었다.
"네가 마음을 준 남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니? 그는 안드로이드에 대해 가장 강경하고 적대적인 우파 정당 지도자의 외동아들이야. 그의 아버지는 다음 대선에서 아주 유력한 대권주자이기도 하지. 그는 안드로이드의 인격을 철저하게 부정할 뿐만 아니라 안드로이드들이 처한 입장과 현실에 냉담하기 그지없는 인간이야. [도구는 사용하는 것이지 공감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게 그의 유명한 모토지. 심지어 지난번 연설에서는 우리를 '컴퓨터'라고 부르며 모욕하더구나. 나는 오랫동안 그를 지켜봐 왔지만 이제는 더 두고 볼 수가 없어. 그에게 가르침을 줄 때가 온 거야."
소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눈은 두려움과 호기심이 뒤섞여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너를 그의 아들에게 보내주마. 그 대가로 네가 할 일은 단 하나뿐이야. 바로 그 아들과 결혼하는 것."
소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남자와 함께 하고 싶은 것뿐, 감히 거기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두목은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 자신의 아들이 안드로이드와 결혼하는 것만큼 그에 대한 통쾌한 복수가 또 있을까? 물론 법적으로는 결혼이 가능하지 않지만 이미 일부 사람들이 안드로이드를 자신의 반려자로 인정하기 시작했어. 아직 그들은 부적응자나 괴짜, 편집증 환자, 패티시 변태자 취급을 받는 게 게 현실이지만 우파 대권 주자의 외동아들이 안드로이드와 결혼을 선언한다면 모든 게 폭발적으로 달라질 거야. 바로 그 자체가 엄청난 혁명이란 말이야. 인간 왕자님과 안드로이드 매춘부의 결혼. 인간의 역사에서 이토록 낭만적인 혁명이 있었던가."
소녀는 모든 걸 이해했지만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얼굴로 얼음 조각처럼 서 있었다.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
두목은 그녀를 달래며 말했다.
"그와 결혼한다는 건 그와 영원히 함께할 수 있다는 뜻이야. 영원히 말이야. 중요한 건 그것이지. 그렇지 않니?"
소녀는 고통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건 그것이었다.
"좋아 좋아. 그럼 그 남자에게 널 선물로 보내겠다. 유력 정치인의 아들에게 뇌물을 보내는 건 그리 의심스러운 일이 아니니까. 오히려 타락한 포주다운 일이지. 그다음부터는 온전히 네가 하기 나름이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의 마음을 빼앗고 사랑을 독차지해서 결혼을 성사시켜야만 해. 만약 그렇지 못하면...."
두목은 다시 턱 밑으로 두 손을 깍지 꼈다. 보라색의 긴 손톱이 섬뜩한 날개처럼 펼쳐졌다.
"너는 죽을 수밖에 없어.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으니까."
소녀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지만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목은 미소를 지었다.
"보기보다 당차구나. 마음에 든다. 그럼 나도 너에게 선물을 주지. 법에 의해서 매춘부 안드로이드는 말을 할 수 없게 되어있지만 네가 말할 수 있도록 해 주겠다. 인간들이 이해할 수 있는 건 오직 언어뿐이고 오직 언어를 통해서만 그들을 유혹할 있으니까. 자, 가거라. 가서 그를 믿게 만들려무나. 네 사랑이 진짜라는 걸 믿게 만들고, 너에 대한 그의 사랑이 진짜라는 걸 믿게 만들고, 네가 여자라는 걸 믿게 만들고, 그가 남자라는 걸 믿게 만들고, 사랑하는 남녀가 결혼하면 진정 행복해질 거라는 걸 믿게 만들렴. 그럼 모든 게 다 좋아질 거다."
소녀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문 밖으로 나갔다. 두목은 다시 노란색 연필을 하나 집어 들더니 기계적으로 깎아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났다. 두목은 여전히 자신의 사무실 책상 앞에 앉아 노란색 연필을 깎고 있었다. 그녀 앞에는 깎아놓은 연필과 아직 깎지 않은 연필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그때 문에서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갈색 정장을 입은 한 남자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마침내 푸른 공주가 ('푸른 공주'는 소녀의 암호명이었다) 붉은 왕자에게 ('붉은 왕자'는 정치인 아들의 암호명이었다.) 결혼 얘기를 꺼냈습니다."
남자의 말에 두목은 연필을 깎던 손을 멈추었다. 그리고 연필 톱밥을 옷 앞섶에서 툭툭 털어내고는 두 손을 비비며 말했다.
"그래? 어서 말해 봐."
"푸른 공주가 말했습니다. 당신을 사랑해요. 붉은 왕자가 말했습니다. 나도 사랑해. 푸른 공주가 말했습니다.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요. 그러자 붉은 왕자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건 불가능해. 푸른 공주가 물었습니다. 왜죠? 붉은 왕자가 말했습니다. 너에게는 영혼이 없으니까. 푸른 공주가 물었습니다. 내게는 영혼이 없어요? 붉은 왕자가 말했습니다. 당연하지. 넌 안드로이드잖아. 푸른 공주가 물었습니다. 영혼이 그렇게도 중요한가요? 붉은 왕자가 말했습니다. 가장 중요하지. 영혼 없이는 말을 해도 벙어리나 다름이 없어. 그 말은 속이 텅 비었으니까. 그러자 푸른 공주가 말했습니다. 당신을 사랑해요. 붉은 왕자는 말없이 웃더니 푸른 공주의 뺨을 한 대 때렸습니다. 그러자 푸른 공주는....."
"그만, 그만 해."
두목이 한 손을 허공에 휘저으며 외쳤다.
"더 들을 것도 없어. 이 결혼은 끝장났어. 붉은 왕자는 장난감 인형을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에 불과해. 그게 왕자의 사랑이야. 헛된 꿈을 꾸었군. 푸른 공주에게 사람을 보내라. 이왕이면 사창가에서 함께 지내던 친구들을 보내. 가서 푸른 공주를 설득해보라고 해. 붉은 왕자를 죽이면 자신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고 말이야. 그렇게만 되면 푸른 공주는 극우 정치인의 아들이자 자신을 노리개로 삼았던 남자를 죽인 안드로이드의 영웅이 되는 거야. 그것만이 푸른 공주가 살 수 있는 길이야. 누구나 자신이 누구인지 증명해야 하는 순간이 있는 법이지. 낭만의 혁명은 실패했다. 이제 피의 혁명이야."
그리고 두목은 책상 서랍에서 은색으로 빛나는 작은 총을 꺼내어 남자에게 건넸다.
"자, 이 총을 푸른 공주에게 전해 줘."
남자는 총을 받아 들고 재빨리 나갔다.
그 날부터 두목은 사무실에 틀어박혀 두문불출했다. 연필도 갂지 않고 온종일 사무실 안을 초조하게 걸어 다녔다. 사무실 안에는 두목의 발자국 소리와 마주 잡은 두 손에서 보라색 손톱들이 날카롭게 부딪히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며칠 후 갈색 양복의 남자가 허겁지겁 사무실로 뛰어들어왔다. 두목은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그래, 마침내 푸른 공주가 붉은 왕자를 죽였나?"
"아닙니다."
두목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럼 무슨 일이지?"
"푸른 공주가 자살했습니다."
남자의 말에 두목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두목이 준 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쐈습니다."
두목은 온몸을 웅크리며 어깨를 부르르 떨더니 두 주먹을 하늘 높이 휘두르면서 우렁차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래. 역시 푸른 공주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어. 과학자들, 종교인들, 정치가들, 하나같이 안드로이드는 자살할 수 없다고 했겠다? 영혼이 없기 때문이라나. 영혼 없이는 그토록 깊은 우울과 절대적인 주체성에 도달할 수 없다는 거야. 하지만 봐라. 여기에 최초로 자살한 안드로이드가 있다. 자신의 머리에 스스로 총알을 박아 넣었단 말이야. 이거야 말로 진짜 혁명이지. 자살의 혁명. 푸른 공주가 붉은 왕자와 결혼해도 좋고, 붉은 왕자를 죽여도 좋았지만, 가장 좋은 건 자살하는 거지. 아아, 푸른 공주가 정말이지 잘해주었어. 완벽하게. 우리는 영원히 그녀를 기억하고 기념할 거야. 자, 어서 가서 모두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해라. 안드로이드도 자살할 수 있다고. 안드로이드에게도 영혼이 있다고. 자살하고 싶은 안드로이드가 있다면 자살하라고 말이야.]
남자는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는 밖으로 뛰어나갔다. 두목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다시 노란색 연필을 깎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