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지구의 [빨간 망토]

by 곡도
다운로드 (2).jpg Edward Frederick Brewtnall의 일러스트 [Little Red Riding Hood]



소녀의 어머니는 소녀의 가늘고 하얀 목에 빨간색 리본을 매어주었다. 소녀가 15살이 된 아침이었다. 소녀는 기쁘면서도 두려웠다. 그건 그녀가 어머니처럼 어른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어머니의 목에도 역시 빨간 리본이 매어져 있었다. 그녀의 마을에서는 15살이 넘은 여자는 반드시 목에 빨간 리본을 둘러야 했다. 오직 임신 중이거나 40살이 넘어야 풀 수 있었다.


"저녁에 성대하게 생일 축하 파티를 하도록 하자. 그건 너의 성인식이기도 하니까."


어머니의 말에 소녀의 눈은 기쁨으로 반짝였다.


"하지만 그전에 네가 해야 할 일이 있단다."


"뭔데요, 어머니?"


"마을 밖에 좀 다녀와야 해."


"하지만 아이들이 마을을 나가는 건 금지되어 있잖아요."


"이제는 너도 어른이 되었으니 갈 수 있단다."


소녀는 기뻤다. 이제 자신이 어엿한 어른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게 자랑스러웠다. 무엇보다 저녁에 있을 생일 파티 생각에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런데 마을 밖에는 왜 나가나요?"


소녀의 물음에 어머니는 조금 곤란한 얼굴을 하더니 소녀에게 작은 손가방을 내밀었다.


"마을 밖 길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다 보면 돌산이 나오고 그 아래에 집이 한 채 있을 거야. 거기 사는 할머니에게 이 가방을 드리도록 해라."


소녀는 가방을 받아 들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마을 밖 바위 산 밑에 사는 할머니는 언제나 음울한 얼굴에 말이 없는 노인으로 마을 사람들과도 거의 얘기를 나누지 않았다. 그저 가끔 마을로 내려와서 식료품이며 필요한 물건들을 사서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왜 할머니가 마을 밖에 사는지, 왜 마을 사람들이 그것을 묵인하는지 소녀는 알지 못했다.


"그러고 나서 그 할머니가 시키시는 데로 하도록 해. 그게 뭐든지 말이야. 알겠니?"


어머니가 힘주어 강조했다.


"네, 알겠어요. 다녀올게요."


소녀는 자신 있게 말했다. 소녀의 어머니는 소녀에게 무언가 더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꾹 다물어 버렸다. 어차피 소녀도 다 알게 될 일이었고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소녀는 어머니가 주신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 집을 나서면서 슬쩍 가방을 열어보니 안에는 제법 큰돈이 들어있었다.


멀어지는 소녀를 창문으로 내다보면서 어머니는 두 손을 맞잡고 자신이 처음 빨간 리본을 목에 매고 어머니의 심부름을 했던 때를 떠올렸다. 20년 전, 15살 소녀는 어머니가 주신 바구니를 손에 꼭 쥐고 거리로 나섰다. 목에서 반짝이는 빨간 리본 때문에 소녀는 으쓱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했다. 소녀를 잘 아는 옆집 아주머니와 목수 아저씨가 소녀의 리본을 빤히 쳐다보았지만 별 얘기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른 척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소녀는 큰 소리로 그들에게 인사하고는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마을 입구를 지키고 있던 경비원들이 소녀의 빨간 리본을 보고 말없이 길을 비켜주었을 때 소녀의 가슴이 얼마나 뛰었는지.


마을을 벗어나자 이윽고 처음 보는 황량한 풍경이 펼쳐졌다. 온통 회색빛 흙과 검은색 돌이 가득했고 황색과 보라색의 납작한 이끼만이 웅덩이를 뒤덮고 있었다. 소녀는 어른들에게 핵전쟁에 대한 얘기를 수없이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온 지구가 파괴되었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죽었다. 몇몇 사람들만이 겨우 살아남아 지금의 마을을 건설했다. 처음에는 수없이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마을은 점차 자리를 잡았고 인구도 조금씩 늘어났다. 사람들은 3겹의 온실 안에서 채소와 과일과 꽃을 키우고, 특수 시설을 통해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등을 얻고 (그러나 물고기는 실패했다), 수없는 연구 끝에 물을 깨끗하게 정화하는 데 성공했다. 마을에는 다시 음악이 울려 퍼지고, 시장이 서고, 정부 비슷한 것이 세워졌다. 사람들은 아이들과 웃음과 희망을 되찾았다. 소녀는 그런 자신의 마을을 무척이나 사랑했다. 마을의 역사가 자랑스러웠고 사람들도 모두 선하고 부지런했다. 이제 자신도 그들의 일원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뿌듯하기만 했다.


소녀는 돌투성이 길을 한참 동안 걸어서 커다란 바위산 밑에 있는 집에 도착했다. 집은 소녀가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소녀는 쓰러져가는 오두막을 상상했지만 그 집은 크고 근사했다. 심지어 마을에 있는 어떤 집보다도 좋았다. 하지만 주변의 살풍경과 대비되어 집은 아름답기보다는 괴상하고 동떨어져 보였다. 소녀는 어쩐지 불쾌해져서 얼른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대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한 할머니가 문을 열고 나왔다. 그녀는 소녀가 멀리서 보았던 것보다는 나이가 많지 않은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엄마가 이 바구니를 갖다 드리라고 했어요."


소녀가 최대한 공손하게 말했다. 할머니는 소녀의 빨간 리본을 유심히 보며 물었다.


"아직 어려 보이는데, 벌써 빨간 리본을 받았단 말이냐?"


"어리지 않아요. 오늘 15살이 되었는 걸요."


소녀가 힘주어 말했다.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바구니 안을 열어보았다. 소녀는 바구니 안에서 어머니가 아끼던 고급 벽걸이 시계를 얼핏 보았다.


"들어오너라."


할머니가 말했다.




2f4e183d733e8392868a9466ae137576.jpg Gustave Dore의 일러스트 [Little Red Riding Hood]



소녀는 그냥 마을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할머니가 시키는 데로 하라던 어머니의 당부가 생각나서 할머니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안은 밖에서 본 것보다 더 크고 화려해서 소녀의 두 눈을 휘둥그렇게 만들었다. 섬세하게 세공된 가구며 레이스 커튼, 도자기와 장식품 등 진귀한 물건들이 집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할머니는 바구니를 탁자에 내려놓고 소녀를 데리고 2층으로 올라갔다. 2층 방에는 아래층에서 본 것보다 더 화려하고 아름다운 물건들이 가득했다. 각종 책과 그림들, 금이 세공된 조각상들, 보석이 박혀있는 상자들, 모피 깔개, 알록달록한 유리병, 은주전자 등등 마을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사치품들이었다.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그리고는 그것들을 구경하는 데 정신이 팔려서 방 한쪽에 놓인 커다란 침대에 누가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자, 이제 침대 안으로 들어가라."


할머니가 명령조로 말했다. 소녀는 할머니의 이상한 요구에 놀라 그제서야 침대를 바라보았다. 침대 이불속에 누군가가 있었지만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어서 보이지 않았다.


"누가 있어요."


소녀가 말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다시 되풀이해서 말할 뿐이었다.


"어서 침대로 들어가."


"하지만 왜 그렇게 해야 하죠?


할머니는 피곤한 듯 대꾸했다.


"내가 시키는 데로 하라고 어머니가 얘기하지 않던? 어머니의 말을 어길 셈이야?"


소녀는 어머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망설이면서도 침대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할머니는 그대로 방을 나가버렸다. 층계를 내려가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소녀는 두려움에 떨며 그대로 침대에 누워있었다.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그때 자신의 옆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이 비틀린 듯 괴상한 쇳소리가 나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자, 가까이 오렴."


소녀는 몸을 떨며 그대로 있었다. 그러자 남자가 소녀에게 바짝 몸을 붙여왔다. 소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아저씨는 팔이 왜 이렇게 길어요?”


“그건 너를 잘 안아 주기 위해서야.”


“아저씨는 발이 왜 이렇게 커요?”


“그건 너에게 더 빨리 달려가기 위해서지.”


“아저씨는 귀가 왜 이렇게 커요?”


“그건 너의 말을 잘 듣기 위해서야.”


“아저씨는 눈이 왜 이렇게 커요?”


“그건 너를 잘 보기 위해서지.”


“아저씨는 이가 왜 이렇게 날카로워요?”


“그건 너를 잡아먹기 위해서야.”


그리곤 남자는 혼자 키득키득 웃었다.


"걱정하지 마. 진짜 잡아먹는 건 아니니까. 자, 예쁜 아이야, 빨리 옷을 벗으렴. 그럼 너에게 예쁜 아이를 만들어 주마."


"아이요?"


소녀가 비명을 질렀다.


"왜 내가 아저씨의 아이를 가져야 하죠?"


남자는 또 혼자 키득키득 웃었다. 마치 쇠톱으로 쇠막대기를 톱질하는 듯한 웃음소리였다.


"그건 바로 나만이 아이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란다. 네 마을에 사는 남자 놈들은 겉만 번지르르하고 멀쩡했지 모두 불량품들이거든. 남자 구실을 못한단 말이지. 정자가 단 한 방울까지 모두 말라버렸단 말이야. 바로 방사능 때문이지. 하지만 나는 방사능 때문에 이렇게 흉측한 몰골이 되긴 했지만 정자만큼은 쌩쌩하단 말이야. 그래서 내가 이런 봉사를 하고 있는 거란다. 모두를 위해서. 내가 아니었으면 네 마을은 벌써 사라지고 말았을 걸. 웃음도 희망도 없었을 테니까. 너는 마을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에게 왜 엄마만 있고 아빠가 없는지 생각해 본 적이 없니?"


소녀는 더욱 몸을 심하게 떨었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쥐어짜며 말했다.


"그럼 아저씨가 제 아빠라는 말인가요?"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불속으로 파고들었다.


어머니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내다보았다. 소녀를 데리러 갔던 마차가 집 앞에 도착해 있었다. 소녀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숙인 채 마차에서 선뜻 내리지 못하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소녀를 데리고 온 그녀의 오빠가 소녀를 마차에서 내려주자 소녀는 자신의 방으로 뛰어들어가 문을 닫아 버렸다. 어머니는 젖을 빨고 있던 아기를 아기 침대에 내려놓고는 오븐에서 막 구워진 자두 케이크를 꺼냈다. 오늘은 소녀의 가장 우울한 15번째 생일이 될 것이다. 이 마을의 모든 15살 소녀들의 생일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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