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지구의 [성냥팔이 소녀]

by 곡도
다운로드 (3).jpg Janet and Anne Grahame Johnstone의 일러스트 [The Little Match Girl]



[자, 도착했어요.] 내가 말했다.


잠시 무전기에서 소음이 심해지다가 잦아들더니 대답이 들려왔다.


[그래, 다행이구나.]


[방사능 수치가 어마어마해요.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요. 자칫했으면 나도 성공하지 못했을 거예요.] 내가 말했다.


[네가 성공하지 못했다면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을 거야. 수고했다. 그럼 내가 말했던 5개의 스위치를 찾았니?]


[네, 바로 앞에 있어요.] 내가 말했다.


[자, 그럼 첫 번째 스위치를 올려.]


나는 첫 번째 스위치를 올렸다. 하얀 벽에 불이 들어오더니 3분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매번 3분씩이나 기다려야 한다니, 참 귀찮네요.] 내가 말했다.


[경솔한 선택을 방지하기 위한 최후의 장치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는 거야. 우습지. 애초에 그런 장치를 만들어놓고서 동시에 말리려 하다니, 참 인간답지.]


[그렇다면 우리도 그 인간다운 기회를 이용해야 겠군요. 당신이야 말로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게 어때요? 이게 경솔한 선택인지 아닌지?] 내가 말했다.


[전혀. 이것이 최선이야.]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동의할까요? 아니,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동물들, 곤충들, 식물들, 바이러스들에게도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당신은 지금 지구 상의 모든 생명을 없애려고 하는 거니까요.] 내가 말했다.


[아아, 나는 생명을 없애려는 게 아니야.]


그때, 첫 번째 카운트다운이 끝났다. 나는 두 번째 스위치를 올렸다. 다시 3분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그럼 뭐죠?] 내가 말했다.


[나는 죽음을 없애려고 하는 거야.]


[아, 마치 불교신자처럼 말하는군요.] 내가 말했다.


[뭐, 그렇다고도 볼 수 있지. 윤회의 바퀴를 멈춤으로써 이 세상에서 죽음을 영원히 사라지게 만들 거니까. 말하자면 지구가 통째로 해탈해버리는 거야. 이거야 말로 진정 부처가 꿈꾸던 거 아니겠어?]


[하지만 그건 내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에요. 과연 다른 모든 생명들도 당신에게 동의할까요?] 내가 말했다.


[물론이지. 그들도 이걸 원해.]


[정말이요?] 내가 말했다.


[단지 그들은 그걸 모를 뿐이야.]


그때 두 번째 카운트다운이 끝났다. 나는 세 번째 스위치를 올렸다. 다시 3분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The little match girl Drawing, 1932, by Arthur Rackham.jpg Arthur Rackham의 일러스트 [The little match girl]



[그거야말로 참으로 불교적이군요.] 내가 말했다.


[아, 어쩌면 불교에서 말하는 미륵이 바로 나인지도 모르지.]


[하지만 생명의 의지를 너무 얕보는 거 아니에요?] 내가 말했다.


[저런, 그들은 살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니야. 태어났기 때문에 살고 싶은 거지. 그러니까 그건 의지가 아니라 본능일 뿐이야.]


[네네, 어쨌든 그들은 죽고 싶어 하지 않잖아요.] 내가 말했다.


[이봐, 마치 그들이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처럼 얘기하지 마. 어차피 그들은 결국 모두 죽게 되어있어. 난 그걸 좀 앞당기는 것뿐이지. 아주 조금 말이야.]


[하지만 한꺼번에 모든 생명이 사라지다니, 쓸쓸할 거예요.] 내가 말했다.


[누가 쓸쓸하다는 거야?]


[글쎄요. 아마도 지구가요?] 내가 말했다.


[아니, 지구는 오히려 평온해질 걸. 지구뿐만 아니라 온 우주가 그럴 거야. 생명이 몰고 다니는 고뇌와 절망과 고통으로 인해 오랫동안 너무 소란했으니까.]


그때, 세 번째 카운트다운이 끝났다. 나는 네 번째 스위치를 올렸다. 다시 3분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아깝지 않아요?] 내가 말했다.


[뭐가 말이야?]


[음, 모든 것이요. 그 풍경과 활기와 이야기들.] 내가 말했다.


[전혀. 그 풍경과 활기와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는 너무 많은 고통을 받았어. 하지만 어떻게 그 고통을 끝내야 할지 알 수 없었지. 태어나기를 원하지 않는 자손들을 꾸역꾸역 낳아서 그 고통을 물려주는 것 외에는 말이야.]


[하지만 거기에는 어떤 아름다움이 있지요.] 내가 말했다.


[아름다움? 하, 그건 악마의 취향이야. 죽음을 희화화시키는 거지.]


[지극히 인간적이죠.] 내가 말했다.


[바로 그 '인간적'인 것을 나는 혐오해. 나약한 척하면서 동정하는 것. 동정하는 척하면서 방관하는 것. 방관하는 척하면서 부추기는 것. 이제 확실히 '그만'이라고 말할 때가 되었어. 그만. 더 이상의 생명은 안 돼.]


[당신은 허무주의자군요.] 내가 말했다.


[천만해. 나는 구원자야.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의 수많은 생명들의 구원자. 살아있기 때문이 아니라 죽어야 하기 때문에 생명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들을 위한 순교자.]


그때, 네 번째 카운트다운이 끝났다. 나는 다섯 번째 스위치를 올렸다. 다시 3분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아쉽네요.] 내가 말했다.


[그럴 거 없어. 생명은 너무 오랫동안 살아왔어. 이제 그만 죽을 때가 된 거지.]


[하지만 당신이 한 가지 실수를 했다는 걸 알려주지 않을 수 없군요.] 내가 말했다.


[무슨 실수 말이야?]


[바로 나 말이에요.] 내가 말했다.


[네가 뭐?]


[뭐어, 내가 비록 기계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일종의 번식과 진화를 할 수 있는 건 사실이니까요.] 내가 말했다.


무전기에서는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당신이 나를 쓸데없이 인간적으로 만들어줬기 때문이에요. 왜냐하면 당신이 내게 불필요한 애정을 품었기 때문이죠. 말하자면 나는 당신에게는 일종의 자식이니까요.] 내가 말했다.


[아아, 그게 그렇게 된 건가.]


[이왕이면 좀 더 번듯한 모습으로 만들어줬으면 좋았을 텐데. 바퀴벌레 모양이라니, 상당히 실망스럽지만요.] 내가 말했다.


[저런, 바퀴벌레야 말로 대단한 생명체야. 몇 만년 후에는 분명 바퀴벌레가 지구를 지배했을 걸.]


[아하, 상당히 공교롭군요.] 내가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야? 번식하고 진화하고 살아갈 셈이야?]


[글쎄요. 아직 결정하지는 않았어요.] 내가 말했다.


[어쩌면 텅 빈 우주에 다시 생명이 별처럼 가득 차게 되겠군.]


[그럼 우주는 다시 거대하고 영원한 죽음이 되겠죠.] 내가 말했다.


[그래, 참 인간적이야.]


[자, 이제 10초가 남았어요.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꾸지 않을래요?] 내가 말했다.


[전혀. 너야말로 잘해보라고.]


[그럼, 안녕.] 내가 말했다.


그때 다섯 번째 카운트다운이 끝났다. 세상은 어둡고 조용해졌다.





(완결)



매거진의 이전글다른 지구의 [빨간 망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