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도 다른 가구도 없는 작은 방 한가운데에 놓인 커다란 철제 책상 앞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중년을 넘긴 그는 수염이 덥수룩하고 우락부락한 몸집과 험상궂은 인상 탓에 전형적인 범죄자의 모습이었다. 그는 깍지 낀 두 손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서 눈앞의 허공 어딘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사방은 이상할 정도로 지독한 정적에 잠겨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갑자기 갈색 정장을 입은 한 여자가 커피잔과 서류철을 손에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미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추녀도 아닌 평범한 외모의 여자였다. 여자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사무적인 몸짓으로 그의 건너편 의자에 앉았다. 진한 블랙커피 향기가 순식간에 방안에 가득 퍼졌다.
“아, 커피가 한 잔 뿐이라 미안해요. 급하게 오느라.”
여자가 무성의하게 말하며 가져온 서류철을 펼쳐 들었다.
“씨팔, 도대체 왜 나를 체포한 거야?”
남자가 위협하듯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서 이빨을 갈며 소리쳤다. 자신의 상대가 여자라는 것에 더 분통이 터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여자는 남자에게 별 관심이 없는 듯 서류철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아, 서둘지 마세요. 다 말해 줄 테니까요. 당신이 알고 싶어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말이에요. 시간은 아주 많답니다."
"시간이 많다고? 하, 나는 바쁜 사람이야. 여기서 1분도 1초도 더 있고 싶지 않다고. 그러니 꾸물거리지 말고 어디 설명을 좀 해보시지. 대체 나를 왜 체포한 거야?"
그러나 여자는 천천히 서류의 종이들을 뒤로 넘기며 한가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어디 보자. 24살 때 6건의 살인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었군요. 하지만 폭풍우 때문에 감옥의 벽 한쪽이 허물어진 틈을 타서 탈옥을 했죠. 그때는 고작 청부 살인으로 밥벌이나 하는 하수인에 불과했는데, 30년이 넘은 지금은 대단한 거물이 되셨네요. 아시아 최대 조직의 보스라니, 마약, 자금 세탁, 비트코인, 횡령, 주식 사기, 재판 거래, 정치자금 로비, 거기다가 46건에 대한 직접 살인과 200건이 넘는 살인 교사에 대한 혐의가 있구요. 휴, 정말 대단하네요. 자신이 살아온 삶에 만족하십니까?”
그는 대답 대신 콧방귀를 뀌었다.
"내게 자백이라도 받아내겠다는 거야?"
"아뇨. 자백은 필요 없어요. 우리는 당신이 지난 30년 간 저지른 일에 대해 속속들이 다 알고 있으니까. 사형 제도란 바로 당신 같은 사람을 위해 필요한 거죠."
그의 미간이 심하게 꿈틀거렸다. 그러나 애써 스스로를 자제했다. 일단 이곳에서 나가는 게 중요했다. 그다음에 저런 여자쯤 하나 죽여버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여자는 서류철을 덮더니 처음으로 남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자, 이제부터 제가 하는 말을 잘 들으세요. 아주 아주 중요한 얘기거든요. 또 좀 어려운 얘기이기도 하구요.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 국가 프로젝트 하나가 만들어졌어요. 아, 당신이 태어날 때쯤 되겠네요. 그 당시 세계적으로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사형제도에 대한 찬반이 아주 뜨거웠어요. 좌파와 우파가 하도 극성들이어서 사형 선고는 내리지만 막상 사형수를 죽일 수는 없는 지경이었죠. 뭐, 여기서 그들 각자의 주장에 대해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양쪽 다 틀림없이 옳고, 양쪽 다 무정하고, 무엇보다 도무지 끝이 없는 이야기니까요. 도저히 양쪽을 모두 만족시킬 해결 방법이 보이지 않았어요. 그래서 고민 끝에 이 프로젝트가 만들어진 겁니다. [엘리시온 프로젝트]가요.”
남자는 어안이 벙벙한 채 숨을 죽이고 듣고 있었다.
“'엘리시온'은 일종의 가상현실입니다. 아, 물론 당신도 다른 사람들처럼 가상현실을 이용하고 계시겠죠. 하루 5시간의 시간제한 하에서 말이에요. 하지만 이건 그것보다 더 진보된 형태입니다. 더 이상 육체가 필요 없거든요. 시간제한도 없고, 강제 종료도 없고, 가상현실임을 나타내는 표시도 없어요. 그냥 현실과 똑같은 거죠. 그러니까 사형수의 사형이 집행되는 순간, 그의 정신과 자아를 이 '엘리시온'으로 보내기로 한 겁니다. 거기서 자기가 하고 싶은 데로 하면서 살 수 있게요. 예를 들어 살인도 마음껏 할 수 있습니다."
"살인도 할 수 있다고?"
남자는 비아냥 거리는 말투였지만 말끝이 떨려왔다.
"바로 그렇습니다. 자, 한번 탁 터놓고 얘기해 볼까요. 사람을 죽이고 싶은 욕망만 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욕망을 갖고 있는 게 그 사람 개인의 잘못은 아니잖아요. 욕망에는 죄가 없으니까요. 다만 그걸 행동으로 옮겼을 때 사회가 받아들일 수 없을 뿐이죠. 그렇다면 사회적으로 배척된 욕망을 가진 사람 입장에서는 부당하고 불공정하다고 느낄 만도 하지요. 그래서 그런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영구히 사회에서 격리시키면서도 그가 가상현실에서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해주자는 게 이 프로젝트의 취지입니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완벽한 분리죠"
"육체는 죽고 정신만 가상현실로 보내진다니, 그게 가능하단 말이야?"
"그럼요. 이미 오래전부터 가능했는 걸요. 다만 사회적 혼란과 윤리적 타락을 방지하기 위해 공개하지 않았을 뿐이죠. "
남자는 큰 소리로 침을 삼켰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듯했다.
"우리는 이 프로젝트가 좌파와 우파를 모두 만족시키리라고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예상 밖으로 양쪽 모두에게서 비난을 받았어요. 좌파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옥에 보냈다고 분노했고, 우파는 범죄자를 천국에 보냈다고 분노했죠. 하지만 뭐 어쨌든 양쪽은 결국 이 프로젝트에 합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보다 더 뾰족한 수는 없었으니까요. 그렇게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이 프로젝트가 시행되었고, 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우리나라가 유일한 시행 국가죠.”
“어째서지?”
그가 얼이 빠진 채 물었다.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들처럼 윤리적으로나 철학적으로 까다롭지 않잖아요. 지극히 실용적인 사람들이니까요."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렇게 지금껏 우리나라에서 이 프로젝트에 참가한 사형수는 총 19명이었습니다.”
“아아, 알겠어. 알았다고. 바로 내가 20번째 참가자가 된다는 거군.”
남자는 너무 놀란 나머지 이상할 정도로 침착함을 유지하며 말했다.
“글쎄, 그게 그렇게 간단치가 않아요. 좀 더 설명을 드려야겠습니다. 그 19명의 참가자들은 '엘리시온'에서 하고 싶은 대로 하며 마음껏 살았습니다. 그들은 신나게 사람들을 죽이고 어린애를 강간하고 은행을 털러 다니고, 뭐 그런 짓거리들을 했어요. 그들은 행복해 보였죠.”
“사람들이 그걸 다 볼 수 있나?”
“저런, 국가의 인권 의식이 그렇게 허술하지는 않습니다. 개인의 프라이버시 침해 문제와 또 관음증 등 윤리적인 문제들 때문에 그들의 행위는 절대 비디오 정보로는 기록되지 않도록 법으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대신 문자 정보로 기록되지요. 물론 그것 역시 극비로 관리됩니다."
“자아, 잘 알겠어. 그러니까 내 허락이 필요하다는 거지? 그렇게 하겠어. 나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을뿐더러, 뭐, 상당히 구미도 당기니까 말이야."
그는 호탕하게 웃고 싶었지만 목에 걸려 격하게 기침을 했다.
“아, 좀 더 들어주세요. 우선 여기에는 몇 가지 심각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거야?"
"그 19명의 참가자들이 모두 자살을 했거든요.”
"자살했다고? 가상현실 안에서 자살이 가능하단 말이야?"
그는 그들이 자살했다는 사실보다 가상현실에서 자살이 가능하다는 것에 더 놀라서 소리쳤다. 가상현실 안에서는 불멸일 거라고, 죽음은 철저하게 제거될 거라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요, 물론이죠. '엘리시온'에서는 가능합니다. 자살은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질이기도 하니까요. 자살을 금지한다면, 그리고 자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차단한다면, 인간은 스스로를 견딜 수 없을 겁니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건 최악의 경우 자살할 수 있다는 희망 덕분이에요. 자살 덕분에 인간은 스스로 자유롭다고 느끼며 자신이 스스로의 주체라고 믿을 수 있는 거죠. 그러니 자살을 빼고는 가상현실을 구성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가상현실 역시 결국 진짜 현실처럼 죽음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셈이죠."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여자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 계속했다.
"처음 자살한 참가자는 고작 2개월 만에 목숨을 끊었습니다. 절반 정도가 5년을 넘기지 못했고 대부분은 10년을 넘기지 못했죠. 놀랍게도 제1번 참가자가 가장 길게 버텼는데 그것도 고작 17년이었어요. 그건 자신이 첫 번째라는 자의식이 그의 의지를 북돋아 주었던 걸로 판단됩니다. 그는 47명의 여자를 살해한 연쇄살인마였는데, 가상현실에서 눈을 뜨자마자 미친 듯이 여자들을 죽이러 다니더군요.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 수가 점점 줄어들더니 어느샌가 종교 지도자가 되어 있더라구요. 가상 세계의 인간들에게 이 모든 게 다 하구라며 설교를 하고 다녔죠. 그는 신도들을 꽤 많이 모아서 제법 큰 교단을 형성했어요. 말하자면 진실을 말하는 사이비 교주였던 겁니다. 그러더니 그것도 시들해져서는 다 때려치우고 마지막 몇 년을 시골에 처박혀 농사를 지으며 조용히 지냈습니다. 물론 가끔 여자들을 죽이기도 했지만 그건 욕망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서였어요. 이미 의미도 쾌감도 없는 습관적인 행위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16살 소녀를 처참하게 죽인 그는 집으로 돌아와 뜨거운 물에 몸을 씻고 커다란 초콜릿 케이크 한 판을 맥주와 함께 먹어치우고는 총으로 관자놀이를 쏴서 자살했습니다. 그렇게 모든 참가자들이 자살해 버리자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특히 정치인들이요. 좌파, 우파 모두 '엘리시온'이 비인간적인 처사라며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사형제도를 둘러싼 오래된 논쟁으로 되돌아갔죠. 긴 논의 끝에 참가자가 이것이 가상현실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게 하자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럼 참가자들이 쓸데없이 진지해지는 걸 막을 수 있을 테니까요. 사실 진지함이란 삶의 부작용 같은 거잖아요. 알아야 하는 것을 알아야 할 권리만큼이나 알 필요가 없는 것을 알지 못할 권리 역시 보호해 줘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 결론이 정치인들에게 어느 정도 만족감을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내 기억을 지우겠다는 거군.”
남자가 겁에 질려 웅얼거렸다.
“그러니까 그게 그렇긴 한데, 사실, 미래형이 아니라 과거형으로 말해야 합니다.”
“뭐라고?”
“당신은 이미 30년 전에 20번째 참가자였어요. 기억이 지워진 첫 번째 참가자이기도 하죠. 사형 직후 사형당한 기억이 지워진 채 '엘리시온'으로 보내진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폭풍우 때문에 감옥이 무너져서 탈옥을 했다구요? 솔직히 좀 조악한 설정이 아니었나요? 그 나이가 될 때까지 잡히지 않은 게 이상하잖아요. 거기다가 아시아 최대의 범죄 조직이요? 하하, 요즘 세상에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여자는 웃었고 남자는 얼어붙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이게 모두 다 가상현실이란 말이야?”
"맞습니다.”
“내 아내와 자식들과 부하들.... 내가 죽인 사람들도... 모두 가짜라고?”
“네.”
남자는 무너지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쉽게 말이 나오지 않는지 몇 번이나 입을 벙긋거리다가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럼 너는 누구지?”
“저도 역시 AI입니다. 당신의 주변 사람들처럼요. 다만 나는 이 소식을 당신에게 전하기 위해 급조되었죠. 나는 이 문을 들어오기 직전 저 문 앞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무례하게도 커피를 한 잔 밖에 가져올 수가 없었던 겁니다.”
남자의 온몸이 벌벌 떨렸다. 믿어지지가 않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것은 분명 또 다른 속임수인 게 분명했다. 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왜, 왜 이제 와서 내게 이 사실을 밝히는 거지? 그냥 계속 모른 채 살도록 내버려 둘 수도 있었잖아.”
“아아, 어쩔 수 없었어요. 정권이 바뀌었거든요."
여자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더니 말을 이었다.
"이번 정권은 '엘리시온'의 참가자들이 자신의 상황을 정확히 알 권리가 있다고 다시 결론을 내렸습니다. '진리를 향한 주체의 복원'이라나요. 어찌 되었든 그것이 진정 인간답다고 하더군요. 설사 참가자들에게는 끔찍한 일이 될지라도 말입니다."
남자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깊은 잠에서 불시에 깨어난 사람처럼 완전히 넋이 나가 있었다. 남자가 고개를 떨구자 여자는 그제서야 자신 앞에 놓여 있던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아, 커피란 이런 맛이군요. 아까부터 궁금했거든요.”
남자는 그만 울음을 터트렸다. 여자는 마지막 한 방울의 커피까지 천천히 남김없이 빨아먹고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자, 이제 나의 역할은 끝났습니다. 이제 나는 저 문 밖으로 나가면 사라지게 됩니다. 좀 아쉽기도 하네요. 어찌 보면 당신이 부럽기도 하구요. 당신은 살아갈지 죽을지 선택할 수가 있으니까요. 이곳에서 정해진 수명까지는 아직 30여 년이 남았으니 그리 짧은 시간은 아니에요. 천천히 생각할 여유는 충분할 겁니다. 뭐, '엘리시온'에서 자살하지 않고 수명을 다 채운 최초의 사람이 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자 그럼, 이제 나는 그만 가보겠습니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그러나 남자는 그대로 굳어진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날 줄을 몰랐다. 그는 오랫동안 빈 커피잔을 바라보며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