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nette Schroeder의 일러스트 [The Frog Prince]
눈을 떴을 때, 나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황금빛 광선에 둘러싸여 있었다. 나는 넋이 빠지고 어안이 벙벙해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윽고 빛이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는 새하얗고 커다란 원통형 기계 속에 누워있었다. 흡사 MRI 기계와 비슷하게 생긴, 그러나 더 커다란 기계였다. 어리둥절하고 있는 사이 내가 누워있던 받침대가 천천히 움직이더니 나는 기계 밖으로 빠져나왔다. 거기에는 열댓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알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내 말은, 그들은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그들은 사람들이었지만 한 눈에도 다른 걸 알 수 있었다. 그들은 키가 더 작고 팔은 더 길었으며 얼굴은 길쭉하고 뒷 머리가 동그랗게 튀어나와 있었다. 얼굴을 보자면 눈이 더 작고 눈동자는 더 컸으며 코가 더 길고 입은 더 작았다. 피부는 회색에 가깝고 머리카락은 하나도 없었다. 대신 머리에 하얗거나 검게 칠을 하고 무늬를 그린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무엇보다 이상했던 것은 그들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모두 다르게 옷을 입고 다르게 치장을 하고 있었지만 성별을 구별할 수 있는 특징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특이한 외모보다 그들의 무성성이 나를 더 두렵게 했다.
"여기가 어디죠? 혹시 다른 별인가요?"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외계인들에게 납치되었다고 지레짐작했던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미소를 지었다. 그들도 웃을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조금 긴장이 풀렸다.
"안심해도 좋아요. 이곳은 지구입니다. 우리는 지구인들이구요. 다만 당신이 살던 시대보다 3만 년 후일 뿐이죠."
이곳이 지구라는 말에 느낀 안도가 더 컸는지 3만 년 후라는 말에 받은 충격이 더 컸는지는 대답하기 힘들다. 다만 한동안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마치 영영 벙어리가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그러나 결국 나는 구역질을 하듯 질문을 쏟아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된 거죠?"
"당신 시대에는 냉동인간이 크게 유행을 했었죠. 삼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냉동인간이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껏 아무도 살려내지 못했어요. 당신을 제외하고 말이죠. 당신은 우리가 유일하게 살려낸 냉동인간이에요."
그제서야 나는 내가 냉동인간 계약서에 사인을 했던 것이 기억났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했던 일이었다.
"자, 미래에 온 걸 환영합니다. 분명 당신이 예상했던 것보다는 훨씬 더 미래가 되었겠지만, 이 미래가 당신의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요. "
물론 그들이 한국말로 유창하게 말한 건 아니었다. 그들은 번역기를 쓰고 있었는데 그 번역기는 놀라운 수준이어서 의사소통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3만 년 후의 미래에서 살게 되었다. 물론 그들의 세계는 불가해한 것 투성이요 어떤 것은 거의 기적과도 같았지만 무엇보다 나를 당황하게 한 것은 그들의 성별이었다.
"당신들은 성별이 어떻게 되는 거죠? 나는 당신들의 성별을 전혀 구분할 수가 없어요."
나는 늘 내 곁에서 나를 도와주면서 동시에 나를 연구하고 있는 연구원에게 물었다.
"우리는 딱히 자신의 성을 남들에게 내세우거나 강조하지 않아요. 그렇다고 숨길 것도 없지만요. 우리에게는 생물학적으로는 23가지의 성이 있고, 취향이나 성향까지 더하자면 57개 정도 되죠."
그리고 그는 알 수 없는 57개의 단어들을 늘어놓았다. 그동안 나는 바보처럼 입을 크게 벌리고 있었다.
"10년 안에 한 가지 성이 더 생길 가능성이 있어서 우리는 큰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은 많을수록 좋으니까요."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꽥 질렀다.
"그럼 어떻게 관계를 맺나요. 그러니까, 누구와 누가 짝을 맺을 수 있는 거죠?"
처음에 그는 내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한참이나 설왕설래를 한 후에야 겨우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이상한 질문이군요. 성별과 성관계가 무슨 상관이 있죠? 당연히 누구든 원하는 사람과 자유롭게 관계를 맺을 수 있어요. 자신과 같은 성까지 포함해서 말이죠. 물론 각자 취향이라는 게 있겠지만 아무도 관계를 제한하지는 않아요."
Arthur Rackham의 [The Frog Prince] 일러스트
"아니, 그럼 아이는요. 아이는 어떻게 갖지요?"
"아, 아이 말이군요. 물론 그건 조금 다른 문제이긴 하죠.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조합의 경우의 수는 개인의 성별에 따라 14가지에서 최대 18가지가 돼요. 그러니까 어떤 관계의 조합에서는 아이를 가질 수가 없지요. 하지만 우리는 아이를 가지는 걸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모두의 관심사는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건 일종의 소신에 속해요. 종교나 정치성향, 환경보호, 혹은 채식주의처럼 말이에요."
"그럼 결혼 제도도 없겠군요."
"물론이죠. 뭐하러 제도를 만들어서 관계를 구속하겠어요?"
"글쎄요.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무엇으로부터요?"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당신들은 성이 단 둘 뿐이었다죠?"
이번에는 연구원이 내게 물었다.
"생물학적으로는 그렇습니다만, 취향이나 성향을 포함한다면, 글쎄요, 에, 아마도 6-7개 정도 되려나..."
나는 얕보이고 싶지 않아 최대한 부풀려서 대답했다.
"하지만 대부분 단 하나의 성하고만 관계를 맺었다고 하던데요?"
연구원은 망설이는 말투로 말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네, 그건 사실이에요."
"믿을 수 없는 일이군요. 그런 압박과 긴장을 견딜 수 있다니 말입니다. 우리는 오직 한 가지 성에만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욕망을 일종의 정신병으로 간주합니다. 유일성애집착증이라고 번역해야 할까요, 아주 심각한 문제로 보고 있죠. 뭐, 그들은 단지 취향일 뿐이라며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지만 솔직히 변태적으로 보이는 건 사실이거든요. 인종차별주의를 정신병의 관점에서 치료해서 박멸한 것처럼 이 병도 치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그런 병이 생긴 이유는 아직 정확히 알 수가 없어요. 47대 위의 조모와 관계가 있다는 이론이 유력하지만 113대까지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새로운 이론도 최근에 주목을 받고 있죠."
그것은 도대체가 놀라운 얘기였다. 나는 머리가 빙글빙글 돌아서 도저히 여기서 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처음에는 사람들을 피해 도망다니기까지 했다. 그러나 사람은 어디서든 다 적응하기 마련인 모양이다. 몇 년이 지나자 어느새 나는 수많은 사람들과, 그러니까 수많은 성과 관계를 맺게 되었다. 아직 57가지 성의 반도 다 관계를 맺어보지 못했지만, 그 성마다 각자의 즐거움이 있고 기쁨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직도 경험해 보지 못한 성이 많이 남았다는 사실이 매우 만족스러웠다. 미래의 사람들은 내가 유일성애집착증 환자가 아니라는 걸 크게 기뻐했다. 유일성애집착증이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라고 주장하는 극히 일부의 극단적인 사람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미지와 신비의 쾌락이 있는 누군가의 침대로 뛰어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