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lter Crane의 [Beauty and The Beast] 일러스트
벌써 1시간 전부터 세미나 실은 수많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모두들 고대 생물학 역사에 한 획을 긋게 될 중대한 발표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전 세계의 이목이 오늘 이 자리에 쏠려 있었다. 이윽고 고대 생물학에 있어 세계 최고의 권위자가 나타나자 실내는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박사는 조금 긴장한 듯 숨을 고르더니 입을 열었다.
[오늘 이 위대한 발견을 제가 발표하게 되어서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약 10만 년 전에 멸종한 고대 생물 '인간'을 지속적으로 연구해왔습니다. 비록 이 생물이 저희의 직접적인 조상은 아니지만, 한 때 전 지구에 퍼졌던 주류종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우리의 흥미를 끕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이 '인간'이 문명을 이루고 살았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제가 '문명'이라는 단어를 쓴다고 해서 그들의 문명이나 지적 수준을 과장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원시적인 게 사실이지요. 그들은 멸종될 때까지 결코 자신의 생물학적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문명이라는 것도 지극히 물질적이었어요. 그래서 그들에게 '문명'이라는 개념을 적용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이냐 하는 것에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많습니다. 어쨌거나 이 고대 생물이 미개하게나마 집단 체제를 이루고, 문자를 사용하며, 예술과 기술을 발전시켰을 거라는 증거들이 드문드문 발견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확정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이것은 하나의 가설에 불가했습니다. 사실 거의 포기하다시피 한 가설이었지요. 그러다가 얼마 전 저희 발굴 팀이 고대의 지각변동을 조사하던 중 '인간'의 유물 하나를 발굴했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권위자는 작은 물건 하나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물건은 네모나고, 납작하고, 반들반들한 모양이었으며 검은색이었다.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어디에 썼던 물건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0만 년이 흐르는 동안 유물이 이 정도로 손상 없이 발견되었다는 건 정말이지 기적에 가깝습니다. 두꺼운 시멘트 구조물로 둘러싸인 진공의 공간 안에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인간'에게 시멘트와 철로 보금자리를 꾸미는 본능이 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죠. 처음에 우리는 이 유물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이것과 비슷한 물건들이 몇 번 발견되었지만 모두 심하게 부패되어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우리는 면밀히 조사한 끝에 이것이 일종의 기계장치였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작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믿을 수 없다는 반응들이었다.
[조악한 수준이라 '기계'라고 부르기도 민망합니다만, 어쨌든 이 기계가 '인간' 개체 사이의 기초적인 소통을 가능하게 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 기계 없이는 그 어떤 소통도 할 수 없었을지도 몰라요. 그렇다면 분명 '인간'들은 이 기계를 늘 몸에 지니고 다녀야 했겠지요. 이런 생물들은 무엇보다 고립을 두려워하니까요. 그런데 이 기계에는 소통 외에도 다른 기능들이 몇 가지 더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중 하나가 시각 자료를 저장하는 기능인데요, 저희는 갖은 노력 끝에 이 기계 장치 안에서 수백 개의 시각자료를 복원해 냈습니다.]
순식간에 실내는 사람들의 흥분으로 술렁거렸다. 누군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눈이라는 신체기관이 있었다는 말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인간'은 그 당시의 다른 많은 생물들처럼 비효율적이고 부정확하기 그지없는 시각 기능을 발달시켰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죠. 진화의 단계가 그러했으니까요. 더 비극적인 것은 그들의 인지 능력 역시 대부분 시각 기능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을 하나의 '인상'으로만 파악할 수 있었던 거예요. 불안하고 상대적이며 편협하고 감상적일 수밖에 없는 '인상'말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정신세계 전체를 지배했습니다. 오염시키고 훼손시켰죠. 그 사실이 우리에게 깊은 혐오감을 일으키지만 그 당시에는 그들의 생존 전략이었던 셈입니다. 결국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멸종 또한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지만요. 아니, 자멸했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하겠군요. 어쨌거나 '인간'의 시각 자료를 확인한 건 이번이 처음이니만치 고대 생물학 연구의 큰 진보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얘기하고 권위자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10만 년 전 고대 생물의 유물을 손에 꼭 쥐고 있자니 가슴이 벅차오르는 모양이었다. 앞으로 그 누구도 이 이상의 성과를 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제 그의 권위는 거의 절대적이었다.
[대체 그 시각 자료에는 어떤 것들이 있었습니까?]
누군가 큰 소리로 물었다.
[아, 그 부분도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당시 많은 생물들처럼 '인간'도 성이 단 두 종류뿐이었다는 건 알고 계시겠죠. 암컷과 수컷 말입니다. 이 기계 안에서는 유독 암컷의 시각 자료가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주로 벌거벗은 모습이더군요. 그중에는 성기나 젖가슴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지료도 많았습니다. 미루어 짐작컨데 이 기계 장치는 수컷의 것이라고 사료됩니다. 암컷과 수컷의 교접으로 세대를 이어가는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으로 볼 때, 성적 욕망이 비정상적일 만큼 비대해지는 쪽으로 진화를 했던 것 같습니다. 이 시각자료들이 바로 그 증거지요. 이걸 보면 이 고대 생물의 일상이 얼마나 성교에 대한 필요와 욕구와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 이성의 시각자료를 평소에 소지하고 다닐 정도라니, 거의 병적일 만큼 집요한 집착이군요. 그런 압박을 견딜 수 있었던 걸 보면 그들의 신경은 굉장히 질기고 튼튼했나 봅니다.]
누군가 힐난조로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사실 '인간'은 성교를 하기 위해 존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존재의 가장 중심에 성적 욕망이 있었어요. 왜 '인간'의 몸 중앙에 뇌가 아니라 성기가 있었는지 생각해 보세요. '인간'에게는 오직 성교만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자신의 흔적을 이 세상에 남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성교야말로 최상의 그리고 최고의 지상 과제였던 것이죠. 아니, 어쩌면 곧 다가올 자신들의 멸종을 예감했기 때문에 그토록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헌신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고대 생물의 삶을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사람들의 마음이 조금 진정될 때까지 기다린 후 권위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 기계는 암컷에 대한 시각자료 외에도 또 다른 시각자료가 있었습니다.]
권위자는 다소 주저하는 말투였다.
[자료의 양은 암컷의 것만큼이나 많은데, 문제는 도무지 해석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수컷이 암컷의 시각자료를 보존함으로써 언제라도 성교가 가능하도록 항상 성적 자극을 유지하려고 하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왜 이 대상을 시각자료로 보존하고 있는지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아요.]
[그 대상이 뭐죠?]
궁금해진 사람들이 외쳤다.
[바로 '개'입니다.]
['개'요?]
Jessie Willcox Smith의 [Beauty and the Beast] 일러스트
[그렇습니다. '개'는 '인간'과 같은 시대의 생물 중 하나입니다. '인간'과 지능 차이가 그리 크지는 않습니다만 그렇다고 딱히 특색 있는 생물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기계에 저장된 시각자료의 반 정도가 바로 이 생물에 대한 것입니다. 뭐, 이것만이라면 그리 이상할 건 없을 겁니다. 아마도 이 유물의 소유주였던 '인간'이 이 동물을 길렀다거나 뭐 그런 것이었겠지요. 그런데 너무나 미스터리한 것은 '인간'이 이 '개'라는 생물을 갖가지 옷이며 장신구로 꾸며주었다는 것입니다.]
실내에는 적잖은 소요가 일어났다. 여기저기서 신음소리도 들렸다. 권위자는 당연한 반응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개'에게 각종 옷을 입히고 모자를 씌우고 안경을 끼워주는가 하면 심지어 신발을 신기기도 했어요. 믿어지시나요? 물론 저희도 처음에는 이 기계의 소유주의 예외적이고 변태적인 취향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각자료를 분석하던 중에 이 '개'들의 물품만을 판매하는 가게의 시각자료 역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정말이지 여러분께 차마 말씀드릴 수 없는 여러 가지 물건들이 가득하더군요. 앞으로도 결코 공개적으로 발표할 수는 없을 겁니다. 결론만 말씀드리면, 이 '인간'에게는 '개'를 '인간'으로 대하는 문화가 있었다는 겁니다. 아아, 너무 동요하지 마세요. 무려 10만 년 전에 있었던 일이니까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의 직접적인 조상도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여러분의 반응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다만 우리 학자들은 도덕적인 평가보다는 객관적인 질문을 해아만 하는 운명이지요. 대체 왜 '개'를 '인간'처럼 치장해놓은 걸까요? 우리는 여러 가지 가설을 세우고 그 부분을 심도 있게 연구하고 있습니다.]
[어떤 가설인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사람들이 외쳤다. 그들은 어떤 그럴듯한 대답이라도 듣지 않으면 절대 이대로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기세였다.
[아직 연구 중이라 단정해서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현재 세 가지 가설의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보고 있습니다. 첫 번째 가설은, 이 '인간'이라는 생물의 성교에 대한 집착과 헌신을 고려할 때, 그리고 암컷의 사진들과 함께 저장되어 있다는 사실과의 연관성을 볼 때, '인간'에게 수간 문화가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각자료 속의 '개'는 이 '인간'의 성적 파트너였던 겁니다. 그래서 '인간'처럼 꾸며놓은 거지요. 그동안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에서 '개'와 성교를 한다는 식의 표현이 많이 등장한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것을 비유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비유가 아니었다는 강력한 증거가 제시된 셈이죠.]
사람들은 조용히 침을 삼켰다.
[둘째는, 종교적인 의미입니다. 종교라는 습성이야 말로 '인간'을 다른 생물들과 구분시켜주는 가장 큰 특징이죠. 이들이 종교를 창조했고 또한 종교가 이들을 창조했다는 이론이 사실이라면, 왜 '인간'이 '개'의 시각자료를 이토록 많이 소장해야 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인간'의 신이 '개'의 모습을 하고 있었거나, 혹은 '개' 자체가 메시아라고 생각했거나, 혹은 자신들의 조상이 개라고 믿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들은 '개'를 열렬히 숭배했던 겁니다. 그러니 '개'에게 공물을 바치고 '개'를 아름답게 꾸미고, '개'를 '인간적으로' 대우하는 것이 그들에게 그토록 중요했던 것이지요. 일종의 종교의식이라고 할까요.]
권위자는 물 한 모금을 마셨다.
[셋째는 가능성이 좀 적긴 합니다만, '개'가 '인간'의 지배종이었을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개'의 숙주였던 거지요. 어쩌면 '개'에게는 마약 성분과 같은 물질을 인간에게 분비할 수 있는 능력 같은 게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혹은 뇌파를 조종할 수 있는 기능이 있었을지도 모르죠. 만약 그렇다면, '인간'은 자신이 노예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스스로 자발적이라고 믿으며 '개'를 부양하고 보호하는 데서 큰 기쁨을 느꼈을 겁니다. 희한해 보이기는 하지만 바이러스나 곰팡이의 경우처럼 그 당시 생물들 사이에서 그런 주종관계가 아주 드문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사람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모두들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10만 년 전의 고대 생물을, 그것도 이토록 결핍과 모순과 불균형으로 가득한 고대생물을 이해한다는 건 정말이지 어려운 일이었다. 언젠가는 이 생물에 대한 비밀을 온전히 밝힐 수 있을까?
[쉽지는 않겠지만 오늘도 학자들은 최선을 다해 연구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고대 생물학 최고 권위자의 겸손한 발언과 함께 오늘의 발표는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