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약은 놓고 가렴."
소년의 아버지가 말했다. 자신의 가방에 알약 통을 챙겨 넣던 소년은 의아한 얼굴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럼 저는 어떻게 식사를 하지요?"
소년이 물었다. 아버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알약을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플 거예요."
다시 소년이 말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주말 캠프 여행을 가려면 이게 필요해요. 집에 돌아올 때까지요."
아버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소년은 다시 알약 통을 가방 안에 넣으려고 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소년의 손에서 거칠게 알약통을 낚아챘다. 그 바람에 알약통 뚜껑이 열리면서 새하얀 알약이 쏟아져 나와 방 바닥 여기저기에 흩어졌다. 두 사람은 잠시 그 하얀색 알약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 가면 배고프지 않을 거야. 걱정할 필요 없어."
아버지는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오히려 매우 침울해진 듯했다. 아버지는 고개를 숙이더니 앞장서서 방을 나서며 소년을 재촉했다. 소년도 아버지를 따라 방을 나서다 말고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방바닥에 쏟아진 하얀 알약들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밖으로 나오니 집 앞에 검고 커다란 차 한 대가 소년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년은 차를 향해 걸음을 옮기려다가 문득 멈추어 섰다. 영문은 알 수 없었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소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리가 너무나 조용했다. 그러고 보니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어디선가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은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뜨거운 한 여름에 아스팔트 길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소년은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그때 아버지가 소년의 어깨를 떠밀었다. 소년은 검은 차 앞까지 다가갔다. 그러자 운전석 문이 열리더니 한 여자가 나왔다. 여자와 소년의 아버지는 간단하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서로 잘 아는 사이는 아닌 듯했다.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다. 그저 이상하리만치 진지하고 슬픈 눈빛을 주고받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차 뒷문을 열고 소년을 타도록 했다. 뒷좌석에는 한 소녀가 타고 있었다. 소년을 본 소녀는 어리둥절한 얼굴이었고 소년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인사를 나누었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여자가 운전석에, 소년의 아버지가 조수석에 앉자 차는 조용히 출발했다.
차는 마을을 벗어나 사막으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망망대해 같은 자갈과 모래 위를 정처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소년이 뒤를 돌아보니 차 뒤로 먼지가 길게 뿜어져 나와 멀어지는 도시를 지워버렸다. 차 안은 조용했다. 라디오도 음악도 틀지 않았다. 그러나 30분도 채 되지 않아 소년과 소녀는 곧 친해졌다. 소년은 소녀가 운전을 하고 있는 여자의 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학교 일이며, 텔레비전 만화 주인공이며, 놀이터며, 친구들이며, 자신들의 동네에 대해 재잘재잘 떠들어댔다. 그들은 자신들이 동갑이라는 사실이 굉장한 우연이라면서 기뻐했다. 그동안 소년의 아버지와 소녀의 어머니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뒷좌석에 아무도 타지 않은 것처럼 앞만 보고 꼿꼿이 앉아있었다. 차는 빠르게 사막의 지평선을 향해 달려갔다.
그렇게 반나절을 넘게 달리면서 그들이 마주친 차는 오직 트럭 한 대 뿐이었다. 소년과 소녀는 그토록 거대한 트럭을 이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커다란 집 한 채만 한 크기였다. 트럭에는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았기 때문에 화물칸에 무엇이 실렸는지 알 길이 없었다. 소년은 유람선이 들어있을 거라고 했고, 소녀는 서커스단이 들어있을 거라고 했다. 트럭은 그들이 다가오자 길 밖에 멈춰 서서 그들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소년과 소녀는 그 운전사가 매우 친절한 사람이라며 감탄했다.
그렇게 늦은 오후가 되었을 때쯤, 지평선 끝에 건물 하나가 나타났다. 밋밋한 모양의 하얀색 건물은 공장 같기도 하고 관공서 같기도 했다. 차는 그 건물 입구 앞에서 멈추었다.
"내려라."
소년의 아버지가 소년과 소녀에게 말했다. 소년과 소녀는 어리둥절했다. 그들은 주말 캠프 여행을 간다고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도무지 여행을 올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들이 꼼짝도 하지 않자 소년의 아버지와 소녀의 어머니가 먼저 차에서 내렸다. 소년과 소녀도 하는 수 없이 자신들의 가방을 챙겨서 차에서 내렸다.
소년의 아버지와 소녀의 어머니는 그들을 데리고 건물 입구로 올라갔다. 건물의 입구는 커다란 쇠문으로 굳게 잠겨있었다. 소녀의 어머니가 문 옆에 있는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후 쇠문이 열리더니 한 여자와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요. 도착이 좀 늦어서 걱정하던 참이었습니다."
여자가 말했다. 딱히 나무라는 투는 아니었다.
"건강한 아이들이군요. 아주 좋아 보입니다."
남자가 아이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소년과 소녀는 그들이 정말 웃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자, 수고하셨어요. 이제 그만 가보도록 하세요."
여자가 소년의 아버지와 소녀의 어머니에게 말했다. 그들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소년과 소녀는 자신들의 부모를 바라보았다. 이 침묵의 뜻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누가 귀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것보다 더 분명한 침묵이었다. 소년의 아버지가 소년을 안심시키며 말했다.
"괜찮아. 데리러 오마."
소녀의 어머니도 말했다.
"잘 지내고 있으렴."
어머니는 소녀를 품에 꼭 껴안았다. 아버지도 소년을 품에 안았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자동차를 타고 사라져 버렸다. 더 이상 자동차가 보이지 않자 아이들은 더럭 겁이 나서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자자, 얘들아. 배고프지? 어서 들어가자. 우선 식사부터 하자꾸나."
남자가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곧 기분이 좋아질 거야."
여자도 애써 아이들을 다독였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 뒤로 쇠문이 굳게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건물 안도 건물 바깥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공장 같기도 하고 관공서 같기도 했다. 그래도 놀라울 정도로 밝고 깨끗해서 소년과 소녀는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들은 긴 복도를 돌고 돌아 어떤 방으로 들어갔다. 텅 빈 방 한가운 데에는 갖은 음식들이 가득 차려져 있는 커다란 식탁이 놓여있었다. 닭고기, 소고기, 돼지고기 등등으로 만들어진 진수성찬의 요리들과, 각종 샐러드, 치즈, 과일들, 빵과 과자들, 사탕들, 초콜릿, 여러 종류의 주스 등이 가득했다. 소년과 소녀는 넋을 잃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방안 가득 진동하고 있는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게 뭐죠?"
소년이 놀라서 물었다.
"음식이란다. 진짜 음식이지."
남자가 말했다.
"우린 한 번도 진짜 음식을 본 적이 없어요."
소녀가 어깨를 떨며 말했다.
"이런 냄새는 처음 맡아봐."
소년이 코를 벌름거리며 말했다.
"그래 그래, 언제나 그 작고 하얀 알약만 먹어왔겠지."
여자가 두 손을 비비며 말했다.
"알약은 인간에게 필요한 완전한 영양을 공급하지만 안타깝게도 먹는 즐거움은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거든. 아무 맛도 없고 아무 포만감도 없지."
남자가 말했다.
"하지만 먹는 즐거움이란 원래 자연스러운 거란다. 자, 마음껏 먹어도 돼. 모두 너희를 위해 준비한 거니까"
여자의 말에 소년은 당장 식탁을 향해 달려들려 했다. 그러나 소녀는 소년의 손을 꼭 잡았다.
"다른 아이들은 오지 않나요? 저희 둘 뿐이에요?"
소녀가 물었다. 여자와 남자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희 둘 뿐이야. 우리는 많은 아이들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단다."
남자가 말했다. 그리고는 소년과 소녀를 식탁 앞으로 이끌었다. 식탁 앞에 앉은 소년과 소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음식으로 손을 뻗었다. 처음에는 조금 머뭇거렸지만 곧 두 손이 점점 빨라졌다. 오, 맛이란 정말 굉장한 것이었다. 5가지 맛이 있다고 책에서 읽었지만 그건 완전히 틀린 말이었다. 수천, 수만 가지의 맛이 입 안에서 불꽃처럼 터지는 것 같았고 수천수만 가지의 감촉과 식감이 입안을 얼얼할 정도로 온통 휘저어 놓았다. 소년과 소녀는 접시 위로 고개를 처박고 게걸스럽게 음식들을 들이켰다. 할 수만 있다면 식탁 위로 뛰어들어 헤엄이라도 칠 기새였다.
"아아, 점점 배가 불러와."
소녀가 크림이 묻어있는 손가락을 탐욕스럽게 핥으며 말했다.
"맞아. 계속해서 먹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소년이 닭튀김을 씹으며 배를 두드렸다. 그러나 동시에 딸기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그렇게 될 거란다."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여자가 말했다.
"이 맛있는 음식을 계속 먹을 수 있어요?"
소년과 소녀가 외쳤다.
"그럼, 매일매일 먹을 수 있지."
남자가 말했다.
소년과 소녀는 너무 기뻐서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실제로 그들은 펄쩍펄쩍 뛰며 식탁을 두드리면서 마치 어린 짐승들처럼 입맛을 다시고 혀를 내둘렀다. 그들은 이미 맛에 중독되어 있었다. 참을 수 없는 식탐으로 온몸이 떨렸다. 위장이 작은 게 억울할 지경이었다. 뱃속의 음식들을 모두 게워내고 다시 처음부터 먹고 싶었다. 그리고 다시, 그리고 또 다시.
"이젠 알약 따위는 먹고 싶지 않아."
소년과 소녀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래, 이제 알약은 먹지 않아도 된단다."
여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년과 소녀는 목을 길게 빼고 기분 좋은 새끼 늑대처럼 울었다.
"그런데 너희는 그 알약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고 있니?"
남자가 물었다. 소년과 소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약은 한 달에 한 번씩 사람들에게 배급되고 있었다. 하루에 두 번 알약을 먹으면 그걸로 식사는 충분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따로 식사 시간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대멸망 이후로 대부분의 동식물이 죽어버렸기 때문에 알약을 먹는 거예요."
소년이 학교에서 배운 대로 또박또박 말했다.
"언제나 알약을 소중히 해야 해요. 우리 인류가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니까요."
소녀가 질세라 말했다.
"그래 그래, 둘 다 맞다. 똑똑한 아이들이구나."
남자가 박수를 치며 말했다..
"하지만 알약이 소중한 건 그것 때문만이 아니란다."
여자가 말했다. 그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나는 것을 아이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너희는 알약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고 있니?"
남자가 또다시 같은 질문을 했다. 소년과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건 학교에서도 배운 적이 없었다.
"대부분의 동식물들이 죽어버렸는데 알약의 영양분들은 어디서 생겨나는 걸까?"
여자가 말했다. 소년과 소녀는 다시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데 그것은 단지 답을 모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두 사람의 눈은 벌써 반쯤 감겨 있었다. 졸음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진짜 음식을 먹을 수 있단다."
남자가 말했다.
"그리고 너희가 바로 그 소수의 사람들이지."
여자가 말했다. 소년과 소녀는 게걸스럽게 웃음을 터트리며 외쳤다.
"아, 행복해."
그리고 그들은 접시 위에 얼굴을 처박고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다.
"이 아이들이 마음에 들어."
남자가 잠든 소년을 안아 올리며 말했다.
"정말 그래."
여자도 소녀를 안아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들은 아이들을 안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소년과 소녀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자신들 눈앞에 또다시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기쁨의 탄성을 내질렀다. 그들은 이것저것 생각할 것도 없이 다시 허겁지겁 음식들을 움켜쥐고는 입안으로 쑤셔 넣기 시작했다. 맛, 식감, 목구멍을 넘어갈 때의 기분 좋은 이물감. 그들은 먹고 또 먹었다. 이상하게도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먹을 수 있었다. 음식은 끊임없이 나왔고 모두 새롭고 맛있는 것뿐이었다.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나지 않았다.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혀, 하나의 거대한 위장이 된 것만 같았다. 그들은 먹기 위해 존재했고 먹을 때만이 행복했다. 심지어 그들은 더 이상 자신들에게 몸이 없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자신들이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원통형으로 생긴 거대한 기계 양쪽으로 그들의 머리만이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그리고 기계로 된 앙상한 손이 그들에게 열심히 음식을 먹이고 있었다. 그동안 기계 아래쪽 작은 구멍에서는 작고 새하얀 알약이 컨베이어 벨트 위로 쏟아져 내렸다. 소년의 방 바닥에서 반짝이던 그 알약이었다. 여자가 그중 하나를 집어 들고서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아주 질이 좋아."
여자가 만족스럽게 말하며 입안에 넣고 꿀꺽 삼켰다.
"그래, 오직 1년만 사용할 수 있다니 안타깝군."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도 알약 한 알을 집어 입안에 털어 넣었다.
"괜찮아. 아이들은 계속 태어나니까."
여자가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공장 같기도 하고 관공서 같기도 한 그 방을 유유히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