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

셰익스피어

by 곡도


SE-748317c6-91dd-425e-9d01-16b337207e2e.jpg 아는 사람은 아는 [학원세계문학전집]




[ 햄릿 ] 셰익스피어




[햄릿]은 읽을 때마다 재미있고 또 수없이 읽었는데도 매번 새롭다. 그리 긴 글도 아닌데 참 주저리주저리 말이 많고, 참 말이 많은가 싶다가도 군더더기 없이 적절하다. 조금 잰 체하는 잔소리 같은 면만 감안한다면 놀라울 정도로 현대적이기도 하다. 햄릿은 결코 늙지 않는 영원한 청춘이 아니던가. 하지만 '햄릿'이 청춘의 상징이 된 건 단지 햄릿이라는 인물이 젊은 나이에 죽었기 때문은 아니다. 아니, 아니다. 그가 젊은 나이에 죽었다는 것이야 말로 이 모든 것의 본질인지 모른다. 청춘은 현재이며 현재란 실존이고 실존이란 비극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모든 시대의 '우리'는 햄릿에게 공감한다. 우리는 지금도 실존하고 있으며, 혹은 적어도 한 번쯤은 실존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젊은 사람이 죽는 소설이나 희곡은 흔하디 흔한데 왜 하필이면 [햄릿]이 비극의 대표격이 된 것일까. 그것은 결코 마지막 장면에서 모든 등장인물들이 우수수 죽어나갔기 때문이거나, 잔혹한 폐륜이나 살인, 치정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쉽게 받는 인상과는 다르게 이 이야기는 '죽음'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비극적인 예감과 계시로 가득하지만, 그 처참한 결말은 그저 그 예감과 계시의 다소 김 빠지는 답습에 불과하다. 이 희곡에서 '죽음'은 효과적인 연극적 장치이거나 더 본질적으로는 당연한 연극적 기반일 뿐이다. [햄릿]의 모든 비극적인 예감과 계시는 죽음이 아닌 '햄릿'이라는 이름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다. 햄릿의 고뇌는 '햄릿'이라는 역할에 욱여넣어진 인물의 고뇌이다. 바로 '햄릿'이라는 거푸집에 들어가기 전 끓어올라 녹아내려야 하는 쇳물의 고통이다. 묘지에서의 사색 역시 '죽음'이 아닌 '역할'에 대한 것으로, '요릭'이라는 가면이 벗겨진 요릭의 두개골은 주변에 굴러다니는 다른 두개골들과 전혀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햄릿'이어야 하며 너는 '요릭'이어야 하는가.

햄릿의 죽은 아버지의 이름 역시 '햄릿'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햄릿'이 '햄릿'에게 복수를 요구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햄릿'이 '햄릿'에게 '햄릿'이 되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어쩌면 '햄릿'이라는 이름은 사람의 것이 아니라 저주나 지옥의 이름인지도 모른다. 우리 자신의 이름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만약 햄릿이 아들을 낳았다면 햄릿은 자신의 아들에게도 '햄릿'이라는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또 하나의 무고한 영혼에게 '햄릿'을, 선택을, 이야기를 강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햄릿은 자신의 운명을 바꿀 수는 없었어도 자기 자식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을 만큼은 정직하고 강직했다. 아이를 낳지 않고 죽어버렸으니 말이다.

햄릿은 우울하다. 그는 우울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이 희곡의 맨 처음부터 고시되고 있다. 그의 아버지 유령은 그에게 개인적으로 나타나 복수를 부탁하지 않는다. 아들에 대한 따듯한 말 한마디 없다. 그저 성루 꼭대기 위에서 모두 들으란 듯이 큰 소리로 그에게 외친다. [맹세하라.] 이것은 사적인 부탁이 아니라 공적인 요구이다. 햄릿에게 너의 역할과 의무를 다하라는 압박이다. 어른이 되라는 것이다. '햄릿'이 되라는 것이다. 햄릿은 '햄릿'이기 때문에 그 유령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지만 그것을 부정하고 저항하고 싶은 내적인 반발 역시 억누를 수 없다. - 아버지 유령을 조롱하고 비아냥거릴 정도로 말이다 - 그는 자신이 함정에 빠졌으며 벗어날 수 없는 이야기 속에 갇혔다는 걸 깨닫는다. 이제 그는 다른 그 누구도 아닌 '햄릿'과의 싸움을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 모든 젊은이들의 우울이다. 햄릿의 고뇌는 설사 아버지를 위한 복수가 성공한다 해도, 혹은 아버지를 위한 복수 후에 살아남아 왕이 된다 해도, 혹은 오필리어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다 해도 사라지지 않을 만큼 깊은 것이다. 그는 여전히 그리고 끝까지 '햄릿'이기 때문이다. 그는 살아있는 한 '햄릿'이 되기 위해 부단히 발버둥 쳐야 하며 언제나 앞서가는 '햄릿'의 뒤를 쫓아가야 한다. 햄릿은 종종 그 우유부단함 때문에 비난받지만 - 어쩌면 그것은 사실이지만 - 그가 망설이는 것은 아버지를 위한 복수가 아닌 '햄릿'이라는 역할인 것이다. 그리하여 이것은 실은 아버지의 죽음을 복수하는 덴마크 왕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무대 위에서 자신의 역에 몰입하지 못하는 젊은 애송이 배우의 이야기라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이 희곡의 주인공은 '햄릿'이 아니라 '햄릿'이라는 역할을 맏은 이름 모를 배우인 것이다. 자신의 대사를 잊어버릴까봐 더듬거리는 무대 위의 배우를 보는 것보다 더 비극적인 일이 있을까? 바로 우리 자신이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지 않는가. [햄릿]의 현대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복수'라는 가십적인 대의명분은 우리를 자칫 이 이야기의 본질에서 빗겨나게 한다. 그러나 이것이 화끈한 복수극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곧 혹은 결국 눈치채게 된다. 복수극이라고 하기에는 이 이야기는 놀라울 정도로 시시하다. 복수극이라면 어째서 햄릿의 삼촌이자 새아버지, 악당, 살인자인 클로디어스의 비중이 이리도 작은 것인지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그는 이 비극의 원흉인데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존재감이 없다. 보통 복수극에서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악당이 점점 두드러지기 마련인데 클로디어스는 점점 더 맥이 빠진다. 그는 처음부터 '햄릿'의 상대가 되지 못하며 햄릿 역시도 그에게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하다. 햄릿의 망설임과 방황이 복수의 대상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닌가 - 범인은 처음부터 이미 만천하에 공표되었는데도 - 의심스러울 정도이고 마지막의 클로디어스의 죽음이 정말 '복수의 완성'인지 조차 의심스러워진다. 그것은 당연하다. 햄릿은 클로디어스를 향해 복수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햄릿은 클로디어스를 지나쳐 더 멀리 달려간다.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올 때까지 말이다. 햄릿이 칼을 겨누는 것은 바로 '햄릿'으로, 이것은 일명 햄릿과 '햄릿'의 싸움이다. 햄릿은 '햄릿'이 됨으로써 '햄릿'을 향해 칼을 휘두르고, 결국 자신이 그 칼에 찔려 죽는다. 클로디어스는 그저 '진짜 범인'을 지목하는 손가락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어째서 오필리어가 악당이자 살인자인 클로디어스보다 훨씬 더 강렬한 인상을 주는 지를 이해하게 된다. 오필리어 역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오필리어는 바로 쌍둥이 '햄릿'이며 '오필리어'라는 이름은 바로 '햄릿'이 되지 못한 햄릿의 이름이다. 오필리어 역시 햄릿과 똑같은 처지에 처해있다. 다정하고 덕망 있고 무고한 아버지가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에게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제 그녀의 머리 위에도 '햄릿'이라는 영광의 가시관이 내려온다. 그녀는 기꺼이 그 이름을 뒤집어쓸 수도 있었다. 그렇게 거창한 비극의 당당한 주인공이 되어 "사느냐 죽느냐"라는 번지르르한 대사를 멋들어지게 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오필리어는 '햄릿'이 되기를 거부한다. 좋아, 정 '햄릿'이 싫다면 남편을 죽인 원수와 결혼한 햄릿의 어머니처럼 '거트루드'가 되어 햄릿과 결혼해도 좋지 않겠니. 그것도 꽤나 흥미로운 이야기가 될 것 같은데. 그러나 오필리어는 '거투르드'도, 그 누구도 거부한다. 그녀는 꽃말을 가진 꽃이 되기를 거부한다. 그녀는 모든 역할을 거부함으로써 복수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지는 것을,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지는 것을 차단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미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 이상 아무런 역할이 없기 때문이다. 역할을 갖는 데 실패한 사람에게 우리 사회는 '광인'이라는 텅 빈 이름을 주었다.

반면 햄릿의 어머니 거트루드는 햄릿과 오필리어와는 전혀 다르다. 긍정적인 의미로 말이다. 그들이 애송이들이라면 거트루드는 원숙한 선배이자 베테랑이다. 그녀야 말로 한가운데서 이 이야기를 추진하는 든든한 기준이고 원동력이다. 오직 그녀만이 자신의 역할에 아무런 의심 없이 온전히 몰입해있음으로써 이 이야기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오직 그녀만이 배우가 아니라 거트루드 자신이다. 거기에 햄릿은 자신의 어머니가 남편을 쉽게 바꿔치기했다고 비난하지만 그건 완전히 잘못된 오해이자 부당한 비난이다. 거트루드는 남편을 바꿔치기한 것이 아니라 '여왕'인 자기 자신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여왕'외에는 다른 역할을 맡고 싶지 않고 또 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 세간의 혐의와는 다르게 - 그녀는 [햄릿]의 등장인물 중 그 누구보다 정숙하다고 할 만하다. 현명한 그녀는 무대 위에서 돌연 역할을 바꾸는 것이 얼마나 부당한 일인지 잘 알고 있기에 결국 '여왕'으로서 죽음을 맞았다. 결코 후회는 없었을 것이다.

햄릿으로 말하면 오필리어와 거트루드 중간에 있다기보다는 세 사람이 삼각형을 이루고 있는 그림이 내게는 더 그럴듯해 보인다. 햄릿의 고뇌는 양편의 저울질이 아니며 저울질할 있는 문제도 아니기 때문이다. 세 사람은 실존이라는 구심력에 의해 고정되고 존재라는 원심력에 의해 팽팽하게 당겨진 세 꼭짓점이다. 비극의 세 꼭짓점은 바람 속에서 특유의 무늬를 그리며 빙글빙글 돌아간다. 그래, 거기에는 바람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바람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유령의 '말'에서 온다. 유령이 침묵의 무덤을 깨고 솟아 나와 '말'을 함으로써 이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고 등장인물들은 눈을 뜨고, 웃고, 울고, 분노하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럼 유령의 '말'이란 무엇인가. 단언컨대 그것은 '진실'은 아니다. 햄릿에서는 요행히 그것이 진실처럼 보였으나 꼭 그러리란 법은 없다. 전혀 다른 진실을 보여주었던 [멕베스]의 마녀들의 예언이나 [오셀로]에서 이아고의 간교 같은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유령의 '말'이란 내용의 질적 여부와는 상관없는 신호, 개입, 즉 감독의 큐 사인이다. 감독이 큐 사인을 외치는 순간 커튼이 올라가고 환하게 조명이 들어오면 무대 위에 있는 - 혹은 무대 위에 갇힌 - 사람들은 꼼짝없이 햄릿이, 오필리어가, 클로디어스가, 거트루드가 되어야 한다. 햄릿은 '사느냐 죽느냐'라는 유명한 대사를 읊어야 하고 오필리어는 강물로 뛰어들어야 한다. 그들 모두가 죽음으로서 마침내 연극의 막이 내릴 때까지 말이다. 아니, 연극의 막을 내리기 위해 그들은 죽어야만 하는가? 그럼 '감독'은 대체 누구냐고? 나도 모르겠다. 그에게 여러 가지 이름을 붙일 수도 있겠지만 차라리 빈칸으로 남겨놓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그러나 감독이 왜 큐 사인을 외치는지는 자명하다. 바로 관객을 위해서이다. 거기에는 반드시 관객이 있다.

아, 어쩌면 '관객'이야말로 바로 '감독'이 아닐까? '바람'이란 결국 관객들의 숨죽인 입김이 아닐까? 아니, 아니면 '관객'도 하나의 역할에 불과한 걸까? 이 세계 전체가 무대이며 무대와 관객석의 경계란 애초에 없는 게 아닐까? 아니면 관객은 화장을 지우고 가발을 벗어던진 '햄릿'이고 '오필리어'이고 '거트루드'인 건 아닌지. 혹은 이 세계는 감독도 관객도 없으며 그저 고장 난 태엽 인형들처럼 멋대로 돌아가고 있는지도 몰라. 글쎄, 이 문제는 내 능력 밖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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