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학 편저
나는 이 책을 내 '책장'에 넣어야 할지 말지, 거기에 덧붙여 이 책을 공개적으로 소개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 고민했다. 아니, 과연 이 책의 존재 자체가 옳은지 아닌지를 고민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것은 거의 양심의 문제였다. 왜냐하면 이 책은 쓰레기였기 때문이다. 미안하지만 이건 사실이다. 이것은 독자에 대한 모욕일 뿐만 아니라 '책'에 대한 모욕으로까지 느껴졌다. 편집은 엉망진창이고, 주체가 불분명한 대명사 주어로 시작되는 글이 부지기수에, 얘기가 마무리도 되기 전에 뒷부분이 잘려 나가기 일쑤, 글 중간중간에 영문을 알 수 없는 문자표가 출몰하고, 똑같은 이야기가 3번, 4번 반복되기도 한다. 이것은 다듬어지지 않은 조각난 자료를 모아놓은 수준이었고 지난밤 급하게 갈겨쓴 글을 검토조차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도대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이 책이 정식으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는지 믿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한 사람이 작가이자, 교정가이자, 편집자이자, 출판업자였으며 책을 단 하루 만에 타자를 쳐서 인쇄소에서 찍어내야만 하는 절체절명의 이유라도 있었단 말인가. 그 무엇보다 이런 엉성한 책의 가격이 무려 35,550원인 것에 나는 분노했다. (이 알뜰한 -550원은 또 뭐란 말인가.) 한 가지만 예를 들어보자면 [현덕 왕비가 세조의 아들 덕종을 죽임]이라는 제목이 이 책에서는 [현덕 왕비가 세종의 아들 독종을 죽임]이라고 되어 있었다. 이 책의 전체적인 허술함에 비하면 이런 실수는 짓궂은 에피소드에 불과할 정도다. 이런 책을 버젓이 출판시켰다는 건 사고를 넘어서서 사기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성의 없고 무책임한 책이 무려 35,550원이라니 말도 안 되지. 이런 책은 사라져야 해. 끔찍해. 그런데 보시다시피 나는 이 책을 내 책장에 넣었으며 여기에 소개까지 하고 있다. 왜냐고? 이제 양심을 가책을 무릅쓰고 말하노니, 이 책은 재밌다.
이 책은 재밌다. 일단 자료의 양이 상당히 방대하다. 여러 경로로 모은 다양한 이야기들을 한 권으로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중에는 낯설고 독특한 이야기도 꽤나 많고 실존 인물과 관련된 이야기들도 흥미를 끈다. 우리나라 옛이야기가 개성이 없다거나 상상력이 부족하다고 느꼈다면 필히 읽어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야기 이면 이면에서 의외성이 허를 찌르기도 한다. 이야기 구성이 간결한 것도 마음에 드는데 괜한 대화체를 지어내어 동화처럼 꾸며내는 것을 개인적으로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내 취향을 자극한 것은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출신, 지역, 이야기 출처 등이 구체적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그 인물들이 정말 실존인물이냐 아니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런 장치들이 인물에게 개성을 부여하고, 이야기의 현실성을 담보하고, 독자가 감정을 이입하게 해 주며, 지적 즐거움을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야기들 중에는 의아하게도 블로그에서 발췌한 요즘 괴담 몇 개가 성의 없고 뜬금없이 섞여있어 눈살을 찌푸리게도 하지만, 뭐, 나는 그렇게 까다로운 사람은 아니니 그런 건 문제 삼지 않겠다. 어쨌거나 나는 이 더운 여름날 이 책을 재미있게 읽었고 조악한 편집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옛이야기, 전설에 대한 편견이 바뀐 계기가 되기도 했다. 쌍욕을 하면서도 빠져들었던, 정말이지, 내 돈과 시간을 들여서라도 편집을 다시 해주고 싶을 정도로 읽는 내내 애증이 교차했던 책이다. 인내심이 있는 독자라면 여름에는 차가운 대나무 돗자리에 배를 깔고 누워서, 겨울에는 따듯한 아랫목 이불속에 웅크린 채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