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슈피겔만
이 책은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아버지의 사연을 아들이 만화로 그린 것이다. 그래서 얼핏 유태인 학살에 관한 이야기로 보이기도 한다. 그것이 이야기의 주요 골격을 형성하고 있고 아버지의 생생한 증언이 흥미를 더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만약 그뿐이었다면 나는 이 책을 내 '책장'에 넣지 않았을 것이다. 유태인 학살에 관해서는 이미 많이 알려져 있는 데다가 그에 관한 책이 수없이 많고 또 그중에는 이 책 보다 더 훌륭한 책도 있을 거리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의 작가는 유태인 학살이라는 특정된 역사적 사건 그 이면을 관통하여 모든 사람들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보편적인 아픔을 건드린다. 그것은 바로 지난 세대로부터 다음 세대로 상속되는 고통과 슬픔의 유산에 관한 것이며, 또한 지난 세대와 새로운 세대 사이의 단절에 관한 것이다. 세대 어쩌고 하면 다소 거창하게 느껴지지만 이것은 사실 우리 모두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참으로 구질구질하고 지긋지긋한 이야기이다. 당장 우리의 부모님과 나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된다. 우리의 모든 부모님들은 - 설사 유태인이 아니더라도 - 나름의 고통스럽고 힘겨운 삶을 살았고 또한 그것을 버티고 이겨낸 생존자들이다. 그리하여 그 발자취를 따라 자식인 우리가 이곳에 있는 것이다. 아마도 부모님보다 풍족하고 안전하게. 물론 우리도 다음 세대에게 전가할 우리만의 삶의 짐이 있지만 언제나 부모의 인생이 자식의 인생보다 더 크고 무거운 법이다. 부모들은 당신들의 고단했던 삶이 자식들로부터 존중받고 공감받기를 바란다. 자식들이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겨주기를 바란다. 우리가 자신들의 장점을 계승하고 단점을 연민해 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가정에서 이와 반대되는 일들이 일어나는가. 솔직히 말하자면 자식들이 얼마나 냉정한 눈으로 부모들을 평가하고 있는지 부모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바란 적도 요청한 적도 없지만 우리에게 억지로 강요된 부모들의 희생. 그리고는 마치 우리가 그들에게 빚이라도 진 것처럼 그들이 뻔뻔하게 이자를 요구한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사실 자식이 부모에게 감사와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건 참으로 비논리적이고 불공정한 괘변이 아닌가.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우리 역시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누구보다 이해하지만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그들의 모든 결핍과 뒤틀림까지. 이 세상에 부모 자식 관계만큼 징그러운 것도 없다. 그런데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자식들이 또 역시 자신들의 자식을 낳아 똑같은 짓을 되풀이한다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다. 분명 그들은 자신과 자신의 부모와는 다른 부자 관계를 꿈꾸겠지만 그건 지극히 망상일 뿐이다. 부모 자식 관계란 본래 태생적으로 가증스럽고 기만적인 굴레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건 '사랑'이 아니다. 사랑이라는 순진하고 박약한 단어로는 이 끔찍함을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다. 그러나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기도 전에 이미 사랑하고 있었던 본질적인 사랑. 자식은 언제나 - 어쩌면 평생 동안 끊임없이 - 이 사랑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부모가 죽고 나서도, 심지어 자신이 죽을 때까지도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는 게 우리의 진정한 비극이다. 부모는 우리의 세계다. 그 세계가 더 이상 신이 없는 천국이든지 혹은 지옥이든지 간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