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어떤 책은 중반 이상을 읽어야 비로소 그 책의 진가가 드러난다. 많은 훌륭한 책들이 중반을 넘어가면서 혹은 심지어 후반에 도달해서야 자신의 정체성과 개성, 문학적 세계관을 성취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때때로 지독하게 재미없고 지루하며 심지어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는 독서일 때조차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기며 인내하는 것이다. 그러나 또 어떤 책은 처음의 몇 페이지에서부터 이미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며 사악할 정도로 재빠르고 적극적으로 우리의 혼을 쏙 빼놓는다. 그런 책은 예의를 차리고 서로 안면을 트고 자신을 소개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독자는 책을 펼치자마자 찰싹 따귀를 맞은 듯이 정신이 번쩍 들어서 자신도 책의 멱살을 잡고 늘어지게 된다. [사형장으로의 초대]는 바로 이 후자에 속하는 책이다. 두 세 페이지 정도를 읽으면 독자는 이미 이 책이 꽤나 재미있으며 재미있을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닫는다. 본질적으로 '유희'야 말로 이 책의 중심에서 돌아가면서 모든 걸 빨아들이고 또 뱉어내는 축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아무 체면도 차리지 않고 아무 비밀도 없기에 나중에는 다소 감흥이 시들고 결말은 기대보다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이 책의 단점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솔직함을 - 설사 그 솔직함이 자학적인 신랄함이라 할지라도 - 단점이라고 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며, 사실상 이 책은 서사적인 구조와는 아무 상관없이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낱낱이 독립적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이 책이 신선하냐고 묻는다면, 글쎄, 단번에 대답하기는 곤란하다. 완성도가 높냐고 묻는다면 역시나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구조적으로 치밀한 것도 아니고 내용에 깊이가 있는지도 의문이다. 그러나 온갖 잡동사니를 긁어모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은 기괴한 인형극의 소동을 보는 듯한 불온한 즐거움을 놓치고 싶은 사람은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 나는 이 작가의 [롤리타]란 소설을 예전에 읽어보고 크게 실망했었다. 그 명성에 비해서 소설의 인상은 애매하고 지지부진했다. 그래서 이 작가의 소설을 더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지내다가 [사형장으로의 초대]가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사형장으로의 초대]는 예리하고 날렵한 문학적 열정이 칼춤을 추는 듯한데 [롤리타]는 노쇠하고 진부하며 다분히 자조적이었기 때문이다. [롤리타]가 더 후기 작품이라고 하는데 대체 그동안 작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작가가 지나치게 작가가 되었던 것일까.
이 책의 주인공인 친친나트는 평면의 세상에서 유일하게 입체적인 인물이다. 얇은 종이인형들의 인형극이 요란하게 법석을 떠는 가운데 그는 이 연극 무대 이면을 볼 수 있는 사람이며, 사실상 이 인형극의 창조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또한 이 인형극의 등장인물로서 (주인공으로서) 그 세계에서 고통받고 번민하면서 자신이 창조한 인물들에게 휘둘리고 괴롭힘을 당한다. 그는 차가운 새벽, 꿈인 줄 알면서도 꿈에서 깰 수 없는 잠든 사람과 같다. 마치 이 연극적인 2차원의 세계는 친친나트의 꿈이며, 친친나트 역시 3차원 현실의 꿈인 듯하다. 진정한 그는 저 3차원의 세계 어딘가에 살고 있는 걸까? 그는 그것을 직감하면서도 도무지 꿈에서 깰 수가 없는데 그것은 그가 이 종이 인형의 우스꽝스러운 세계를, 기만적이고 연극적인 세계를, 유한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무엇보다 '친친나트'의 세계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마치 타락한 신이 욕망에 이끌려 인간들 사이에 뒤섞여 살아가다가 자신이 신이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린 듯하다.
독자는 첫 페이지부터 이 소설이 연극적이고 심리적이며 비현실적, 내면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그것을 숨기지 않으며 오히려 노골적이니까. 그러나 이 책에 나오는 등장인물 하나하나,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 사물이나 장소 하나하나가 무엇의 비유이며 상징인지 따지는 것은 정말이지 쓸데없는 짓이다. 어떤 이들은 영화나 책을 보면서 특정한 비유와 상징을 등가 시키려 하고, 공식과 해석에 집착하면서, 실마리를 찾기 위해 작가의 배경이나 사상에 파고들고, 심지어 작가에게 직접 묻기까지 한다. 혹여 작가가 - 자신의 교만과 나약함 때문에 - 그들에게 낚여서 한마디 하기라도 하면 그제서야 사람들은 정답이라도 찾아낸 것처럼 만족한다. 단언컨대 그것은 오히려 그 작품을 오도하고 모욕하는 짓이다. 작품이 완성된 뒤에는 작가마저도 그저 3자에 불과하며 작품에 대한 작가의 의견은 그저 많은 사람들의 의견 중 한 가지에 불과할 뿐이라는 걸 무시하는 처사이다. 작품은 언제나 작가나 출신 그 이상이며 그 이상이 되기 위해 쓰여진 것이다. 예술이란 스스로 실존하지 않으면 그저 종이 나부랭이 위에 쓰여진 문자의 나열일 뿐이다. 작품 속에서 무언가가 소용돌이칠 때, 그 소용돌이의 힘과 속도, 움직임, 인상, 충격, 무엇보다 자신에게 부딪혀오는 감정의 동요 자체를 순수하고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편이 좋다. 모든 것을 해체하기 위해 돌아가는 소용돌이를 단단히 고정시켜 놓고 오히려 그 해체를 해체하는 것은 편집증적이고 지적인 즐거움을 주지만 결국 작품을 불구로 만드는 짓이다. 물론 그 소용돌이를 충분히 즐겼다면 하나하나 따져보고 해부해 보는 것도 여흥으로 나쁘지 않을 것이다. 시간의 원리를 알기 위해 아름다운 시계를 분해하고 나서 다시 조립하고 나면 언제나 부품 몇 개가 뒤에 남는다는 것을 각오하고서 말이다.
이 소설은 하나의 연극이고 이것이 연극인 줄 알면서도 그 연극 안에서 울고 웃고 고통받는 연기를 해야 하는 배우/작가의 이야기다. 연기자는 이 모든 게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한 편의 이야기일 뿐이고 무대를 내려오면 망각 속으로 사라질 유희라는 걸 알면서도 무대 위에 있는 동안에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 인물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리하여 가짜 눈보라를 맞으며 추위에 떨고, 가짜 술을 마시며 술에 취하고, 거짓 희망에 부풀어 노래를 부르고, 사랑하지도 않는 연인에 대한 사랑 때문에 눈물을 쏟는다. 그리고 죽음. 아니, 어쩌면 그것만은 무대 위에서나 무대 밖에서나 가짜가 아닐지도 모른다. 막이 내리면 연극의 배우들이 모두 (심지어 극 속에서 죽었던 자들조차) 앞으로 나와 관객들에게 인사를 올리고 관객들은 환호성을 내지르며 열렬히 박수를 치지만, 지금 이 곳에서 누군가가 죽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다. 심지어 그 누구도 죽지 않는 이야기에서조차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