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덱커(글) / 테티옹킹(그림)
나는 종교가 없다. 반종교인이 아니라 비종교인인 셈인데, 딱히 나 자신을 무신론자라고 규정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나는 종교적 믿음에 무관심하다. 한 번도 신을 믿어본 적 없었고 신을 믿고 싶었던 적도 없었다. 절박한 순간에조차 기도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누군가 기도하라고 하면 경박하고 우스꽝스럽게 생각되었다. 나는 선천적으로 일종의 영적 불감증을 앓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 종교인들이 말하듯 - 영적 믿음에 대한 갈망이 인간의 기본 본성이라면 말이다. 물론 종교적 열망과 신비는 언제나 내게 영감을 주지만 그것은 인문학의 영역 안에서 일 뿐이지 신의 실존이나 신과의 교감에 대한 끌림은 아니다. 게다가 솔직히 말하자면 신도들의 선민의식, 자격지심, 자기애, 무지와 아집, 맹목성, 나약함, 허세, 신비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기만, 형이상학적 속물근성 등등등이 내 비위를 상하게 한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신을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다. 신을 옹호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부정하고 싶지도 않다. 종교가 폭력을 지양하며 타인을 강제로 교화하려 하거나 방해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포용할 자세가 되어있다. 그러나 누군가 성스러운 신념으로 자랑스럽게 눈을 빛내며 다른 피조물들을 자비롭게 동정할 때면 면전에서 신을 조롱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못된 기질 또한 나에게 있다. 물론 그들은 인간을 사랑한다. 어쩌면 나보다 더 인간을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신이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 어느 무신론자나 심지어 악마주의자보다 더 냉담하다. 이쯤에서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종교'라고 썼지만 사실 기독교(개신교+천주교)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 어디에선가 이런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한 배가 풍랑을 만나 작은 섬에 닻을 내렸다. 배에는 한 위대한 주교가 타고 있었는데 섬에 살고 있던 은자가 주님에 대한 가르침을 얻기 위해 그를 찾아왔다. 은자는 뱃사람들을 통해 그리스도를 알게 된 뒤로 매일 신께 감사기도를 드리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주교는 은자가 성경을 읽은 적이 없으며 주기도문조차 모르는 것을 알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주기도문조차 모르면서 어찌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주교는 은자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주고는 아침저녁으로 한 번씩 주기도문을 외우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리고 마침내 폭풍우가 멈추자 주교를 태운 배가 섬에서 출발했다. 배가 섬에서 꽤 멀어졌을 때 주교는 바다 위를 뛰어오는 은자를 보았다. 은자는 바다 위를 달리며 주교에게 물었다.
[나라와 권세와, 그다음 단어가 뭐죠?]
내가 이 이야기를 기독교를 믿는 친구에게 해주었더니 친구는 그 우화가 기독교에 맞지 않는 신비주의라고 일축했다. 기독교는 지식의 종교이며 지식 없이는 믿음도 구원도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여호와가 인류에게 계시나 기적이 아닌 성경을 전해준 이유라고 하였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친구는 똑똑하게 시시비비를 따지느라 저 우화가 가지고 있는 유머를 놓치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왜 저 우화가 유머러스하게 느껴지는가의 문제를 말이다.
사실 내가 위에서 기독교인들에 대해 가혹하게 얘기했지만 그건 모든 종교인들의 특성이면서 동시에 현대인들의 특성이기도 하다. 현대인은 종교의 도움 없이도 자아를 과잉시키기 위해 분투하며 악착같이 자신의 주체성 구축한다. 물론 그것은 설사 종교가 아니라더라도 '종교적'인 어떤 것을 발판으로 해야 가능한 것이다. 이념이라든지, 민족이라든지, 국가라든지, 명예나 돈, 어떤 신념을 통해서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선민의식, 자격지심, 자기애, 무지와 아집, 맹목성, 나약함, 허세, 신비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기만, 형이상학적 속물근성 등등의 특성을 형성한다. 어쨌거나 우리에게 겸손함과 소박함은 미덕이 아니며 겸손함과 소박함도 일종의 '스타일'이 되어야만 인정을 받는다. '소박한 생활'과 '미니멀 라이프'는 언어적 차이가 아니라 전혀 다른 본질적 차이이다. 소박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결코 '소박하다'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건 더 이상 '소박하지' 않으며 사실상 한 번도 '소박한' 적이 없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설명하기 위해 쓸데없는 소리를 너무 많이 늘어놓았다. 왜냐하면 이 책을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설명할 것이 없다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 책은 몇 페이지 되지 않는 단출한 책이다. 글보다는 그림이 많으며, 사실 그림조차 그리 많지 않다. 그저 한 페이지에 한 줄 혹은 두 줄의 글과 몇 개의 작은 그림이 있을 뿐이다. 그 글과 그림이라는 것도 그리 어렵거나 심오하지 않다. 한 남자의 간단한 소회라고 해야 할지, 중얼거림, 문득 떠오르는 생각 등이다. 그는 마치 어린아이들이 부모에게 물어보듯 신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넨다. 거기에 어떤 신학적인 이슈나 윤리적인 쟁점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이 신에게 말할 수 있는 모든 걸 말하고 있다. 신은 결코 대답하지 않지만 우리는 그것이 대화라는 것을 알게 된다. 기도가 그러하듯이 말이다. 신과 인간이 실존 대 실존으로서 동등하고 허물없이 나누는 소박하고 정다운 대화. 그것은 한 방울 한 방울씩 스며들어 나 같은 사람에게도 아주 약간의 신심을 불러일킨다.
책은 이 성자가 - 자신이 성자라고는 결코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을 이 성자가 - 꽃이 만발한 꽃밭에서 작은 꽃 한송이를 손에 들고 꽃이파리를 하나씩 떼면서 중얼거리는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사랑..... 하신다. 아니다. 하신다. 아니다. 하신다. 아니다. 하신다.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기도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