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렌 슬레이터
요즘 심리학 책을 연달아 읽었다. [소녀는 왜 다섯 살 난 동생을 죽였을까], [비밀스러운 삶의 해부], [심리학], [스키너의 심리상자]. 우선 [소녀는 왜 다섯 살 난 동생을 죽였을까]는 구성이 조금 독특하다. 보통 심리학 책은 상담자가 내담자를 관찰하고 진단하는 형식이기 때문에 상담자의 감정과 인격은 절제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책은 내담자보다는 상담자, 즉 작가 본인에 대한 솔직한 자기 고백과 성찰이 주를 이룬다. 작가는 내담자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조정하고 해결하는 전지적인 상담자가 아니라 본인도 영문을 알 수 없어 갈팡질팡 하고, 결정적인 실수를 하고, 실패할까봐 두려워하고, 내담자에게 분노하거나 심지어 내담자에게 집착하는 인간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처음에는 그런 솔직한 면모가 신선하기도 해서 읽는 재미가 있었는데 점차 글이 진행될수록 지긋지긋해지기 시작한다. 작가의 징징거리는 감상과 푸념에 지치는 데다가 자기 합리화와 자기 미화를 (작가가 최대한 아닌 척 가장하거나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책을 쓴다는 건 자기애와 자아 과잉의 발로가 아닌가) 받아 줄 마음의 여유가 내게는 없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일반 에세이를 좋아하지 않는데, 이 책은 심리학 책이기보다는 작가 개인의 에세이이며 성장 드라마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비밀스러운 삶의 해부]는 평범한 사람들의 비밀스러운 삶을 엿보는 재미가 있고 분석의 대상이 되는 인물들의 면면이 상당히 흥미롭게 펼쳐진다. 그러나 작가가 '비밀'이라는 책의 주제에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우며 '비밀'과 '중독'의 경계조차 애매하게 처리하고 있어서 끝에 가서는 흥미가 조금 떨어진다. ([심리학]은 개론서여서 딱히 언급할 것이 없다.)
그중 마지막으로 읽었던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를 나는 꽤나 재미있게 읽었다. 그것은 마치 금발 머리 소녀가 세 마리 곰의 수프를 한 수저씩 떠먹다가 작은 곰의 수프 그릇에 만족한 것과 비슷했다.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작가가 적절하게 개입하면서도 스스로를 잘 통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작가가 너무 개입하면 구질구질해지고 너무 거리를 두면 냉담해지기 마련인데, 작가는 글 전체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주체로서 중심을 잡아 주고, 당사자나 관계인들과의 직접 인터뷰로 흥미와 신뢰를 높이고, 인간적인 문제의식과 관찰력을 제시하는 선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작가는 '심리학'이란 [인간을 다루는 '학문']이 아니라 ['인간'을 다루는 학문]이라는 것에 집중하면서 동시에 너무 깊지도 그렇다고 너무 얕지도 않게 책의 균형을 유지한다. 이 책은 전문성과 대중성이 잘 조화를 이룸으로서 심리학에 대해 잘 모르는 나 같은 초심자도 거부감 없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는 10가지 심리 실험에 관한 내용과 논점, 진실과 오해, 영향력과 발전 과정, 윤리적 문제 등을 골고루 짚어준다. 10가지 심리 실험은 대부분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들이지만 접근 방식과 글솜씨 덕분에 진부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 실험들 대부분은 아직까지도 다소 신비에 싸여있고 충격적이며 논쟁적이다. 그 10가지 심리 실험 중에서 특히 [밀그램의 복종 실험]이 내 관심을 끌었기에 언급하려고 한다. 나뿐만 아니라 누구나 이 실험에 대해 처음 듣는 순간 충격에 빠졌을 것이다. 사회 심리학자 밀그램은 신문에 '학습에 관한 실험' 참가자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냈다. 광고를 보고 모인 참가자들은 소정의 보수와 호기심 때문에 참가한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실험은 학생 역할을 맡은 참가자가 (참가자 중 한 명이라고 소개되었지만 실은 밀그램이 심어놓은 연기자였다) 문제에 답을 못할 시 교수 역할을 맡은 (진짜) 참가자가 전기 충격을 가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전기 충격의 강도가 점점 올라가면서 학생 역할의 참가자의 고통 역시 가중되었고 (물론 연기였다) 과연 (진짜) 참가자들이 어느 정도에서 그 처벌 행위를 멈출 것인가가 연구의 핵심이었다. 그것은 '학습'에 대한 실험이 아니라 '복종'에 대한 실험이었던 것이다. 놀랍게도 62%-65% 참가자들은 상대방이 고통에 몸부림치고 비명을 질러대는 대도 불구하고 전기 충격을 최고 단계까지 밀어붙였다. 이 실험은 선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상대방의 고통에 무감각해지고 적극적으로 악을 행할 수 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한나 아렌트가 유대인 학살에 대해 분석하면서 사용했던 [악의 평범성]이라는 유명한 문구에 대한 증명처럼 여겨졌다. 이 실험은 그 교묘함과 잔인함으로 인해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는데, 무고한 상대방에게 고통을 가하면서 우월감과 쾌감을 느끼는 평범한 인간의 가학성을 떠올리게 한다. 인간의 부드러운 얼굴 피부를 한 꺼풀 벗겨내면 기꺼이 타인을 고문하고 죽일 수 있는 본성이 기회를 노리며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이런 비관적이고 극적인 시각은 스파이물이나 반전 스릴러, 사이코 드라마처럼 짜릿하게 우리를 흥분시킨다. 볼품없는 우리 안에는 신과 같은 신성함과 악마와 같은 사악함이 자리를 다투며 전쟁을 벌이고 있지. 우리는 얼마나 역동적이고 신비로운 존재인가. 뭐, 그건 사실이지만 (문학작품에서가 아닌) 살아있는 한 인간 안에서 그것이 그토록 다이내믹하게 구현되는 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우선 널리 퍼져있는 이 실험의 결과가 다분히 오해와 왜곡으로 이루어져 있음이 지적되어야 한다. 우선 몇몇 사실관계부터 바로잡아야 하는데, 상대방에게 전기 충격을 가했던 참가자들은, 심지어 최고 수준의 전기 충격을 가했던 참가자들 마저도, 그것을 즐기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들 대부분은 계속 하기를 거부했다. 아, 물론 의심이 많은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겉으로는 그런 척했지만 속으로는 즐기고 있었던 게 아닐까?" 가능하다. 그러나 그들은 여러 번 거부하고, 항의하고, 눈물을 흘리고, 충격과 스트레스로 인해 복통과 같은 신체 반응을 보였으며, 심지어 실험 감독관과 몸싸움을 벌였던 사람들도 있었다. 약간의 보수와 호기심을 위해 실험에 참가한 불특정 사람들이 돌연 메소드급 연기를 했다고 보는 건 부자연스러운 듯하다. 혹은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의식은 그렇지 않더라도 무의식에서는 그걸 즐기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럴듯하긴 하지만 (사실 요즘의 우리는 이런 류의 소설과 영화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일단 무의식이 등장하면 이것은 학문이나 과학의 영역이 아닌 신비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그 누구도 무의식 안에서 진정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다. (심지어 무의식의 영역 자체를 부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잘은 모르지만 '심리학'은 의식과 전의식의 영역에서 관찰 가능한 행위만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나의 의식은 진정 이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나의 무의식은 진정 그것을 원했다거나 그 반대의 가정은 결코 증명될 수가 없다. 그리고 과연 그렇다면 내가 그것을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 저울질하는 것 역시 불가능해진다. 어쨌거나 그들은 의식적으로는 진심으로 그런 짓을 하고 싶어 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은 전기 충격을 가하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을까. 상대방이 고통스러워하는 걸 빤히 보면서도 말이다. [휴먼카인드]라는 책에서도 이 부분을 자세히 다루고 있는데, 실험 참가자들을 위한 변은 이렇다. 우선 그들은 애초에 이것이 학생들의 학습에 관한 '선한' 목적의 교육용 실험이라고 믿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선한' 실험이 '악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얼른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또한 그 실험을 기획하고 감독하는 사람들이 박사와 교수들로 이루어진 전문가들이라는 사실도 단단히 한몫했을 것이다. 이 실험에 대해 가장 잘 알고 또 책임이 있는 전문가들이 어련히 알아서 실험을 통제하고 있으리라는 믿음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 그들이 자신이 당면한 문제를 충분히 숙고하고 판단할 만한 시간적 여유나 충분한 정보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도 언급할 수 있다. 하지만 제일 큰 문제는 그 실험의 감독관들이 상당히 강압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참가자들이 거부했을 때에도 감독관들은 실험을 계속하기를 종용했다. 심지어 실험을 그만두려는 사람을 압박하고 물리적으로 제지하기까지 했다. 전문가들은 실험 내내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보기보다 심각하지 않으며 모든 게 실험의 일환일 뿐 전혀 문제가 없다는 단호한 태도를 견지했다. 참가자들은 혼란한 나머지 정신적인 무기력증에 빠졌고 결국 맥락과 권위와 상식을 따르기로 선택한 것이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실험 도중 발작적인 웃음을 터트렸다고 하는 데 어쩌면 웃음의 기원이 기쁨이 아닌 고통인지도 모른다는 점이 재미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최고 단계까지 전기 충격 버튼을 눌렀는데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이 이들과 같았던 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무려 35%의 사람들이 (그렇게 작은 비율은 아니다) 실험을 진행하기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대체 이런 주체적인 의지와 결단력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란 말인가. 밀그램은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다른 선택을 한 두 그룹의 사람들에게서 아무런 차이점도 도출해내지 못했다. 과연 이 실험에서 우리는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이 실험은 섬뜩하면서도 공허하며, 단순한 듯하면서도 복잡하고, 비정한 것 같으면서도 온갖 인간적인 것으로 가득 차있다. 그리하여 이 실험은 사실상 악명 높은 미스터리로 남고 말았다.
이 실험을 유대인 학살에 직접 적용하는 건 무리가 있다. 그러나 어쨌든 이 실험에서 우리는 인간의 나약함, 스스로에 대한 불신과 혼란, 결단성 부족, 가치 판단의 모호함, 비겁함 등을 엿볼 수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 실험은 이 정도에서 마무리되지가 않는다. 차후에 이 실험의 실체를 알게 된 참가자들, 특히 전기 충격을 끝까지 가했던 65%에 속한 참가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처음에는 이 실험과 자기 자신에 대해 실망하고 좌절하고 분노했지만 그들 중 몇몇은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고 발전시키는 개기로 삼았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예전에 어디선가 읽었던 일화 하나가 떠올랐다. 출처도 모르겠고 내용도 정확하지 않지만 (어쩌면 일종의 우화였는지도 모른다)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자면, 이것은 일본에서 있었던 일종의 교육 실험이었다. 교육자들은 한 교실의 학생들을 지정해서 새끼 돼지를 키우게 하고는 (학생들이 새끼 돼지와 나누었던 순수한 교감과 아름다운 일화들은 굳이 말하지 않겠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그 돼지를 잡아서 아이들의 식사로 내놓았다. 얼핏 잔인해 보이는 이 교육의 의도는 간단했으며 사실 정직했다. 너희들이 먹는 돼지고기가 어디에서 오는가를 직시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아이들은 눈물을 흘리며 아무도 그 고기를 먹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성인이 된 아이들을 추적하여 조사해 보니 많은 아이들이 그 사건 뒤로 자신의 행위와 선택에 대해 좀 더 책임의식을 가지게 되었다고 대답했다. 심지어 그 아이들 중 몇 명은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성인이 된 학생들이 그 교육 실험에 매우 만족했으며 고마워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세상의 진실과 대면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면서 말이다. 그들이 마트에서 손쉽게 집어 드는 깔끔하게 포장된 고깃덩어리가 실은 아이들이 함께 도시락을 나눠먹고, 아이들의 발 뒤꿈치를 졸졸 따라다니고, 아이들이 쓰다듬으면 좋아서 꿀꿀 소리를 내고, 아이들의 무릎 위에서 꾸벅꾸벅 졸곤 했던 그 천진난만한 새끼 돼지와 전혀 다르지 않음을 그들은 (상당히 충격적인 방식으로) 깨달았다. 그래, 그것이 우리가 사는 이 세계가 작동하는 진짜 방식이 아닌가.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우리의 교육 현장에도 이 실험이 도입되기를 권장하고 싶다. 아이들이 충격을 받을 거라고? 물론 그럴 것이다. 그런데 과연 아이들은 정확히 어느 부분에서 충격을 받는다는 것일까? 놀랍게도 이 맛있는 돼지고기가 한 때 나처럼 살아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세상이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자신이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이것이야 말로 모든 교육의 목적이자 본질이 아닌가?
모든 심리학 실험에는 다소 악마적인 구석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악마성에 매력을 느낀다는 것도 부정할 순 없다) 그것은 사람들을 속이고, 함정으로 몰아넣고, 그들을 관찰한다. 요즘의 많은 경쟁 버라이어티 프로그램들이 하고 있는 짓이기도 하다. 그러한 실험이 재미있는 건 인간은 정말이지 판에 박은 듯 똑같으면서도 천차만별로 다르고, 또 외계인처럼 다른가 싶다가도 쌍둥이처럼 똑같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바로 실험 대상자뿐만 아니라 실험자 본인의 심리까지도 뒤얽혀서 빠져나오기 힘든 미로가 펼쳐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대답을 듣기 위해 질문을 하지만, 그 대답은 또 다른 질문이 되고, 그렇게 끝없이 이어진다. 거기에는 일종의 미신적인 영감과 통찰이 깃들어있기 때문에 반대급부로서 심리학이 숫자에 집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과연 인간 심리의 모든 비밀이 밝혀지는 날이 오긴 올까? 의식뿐만 아니라 무의식의 지도까지 상세하게 만들어지는 그런 날이 정말 올 것인가? 그렇다면 자기 자신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인간이란 어떤 존재가 될까? 더 인간적이 될까? 더 비인간적이 될까? 분명한 건 그렇게 되면 정말 재미없는 세상이 될 거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미리부터 걱정할 건 없다. 우리는 아직 충분히 무지하며 비겁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