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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Apr 09. 2020

시작하며

로마 B.C. 1세기




     연극을 보러 다닌지는 10년 정도 되었고, 블로그에 감상을 써온지는 2년이 조금 넘었다. 작년 겨울부터는 시간 여유가 있어서 매주 1-2편의 연극을 보고 있다. 사실 2020년부터 더 가열차게 연극을 보러 다니겠다고 투지를 불태웠건만 코로나 때문에 좌절하고 (예매해 놓았던 연극 4편이 코로나를 이유로 줄줄이 취소되고 나서는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다.) 현재는 대기를 타고 있는 중이다.

     내가 왜 연극을 좋아하는지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어찌 생각하면 아무 이유가 없는 듯도 하다. 사실 연극을 보고 나면 공허함이 밀려올 때도 많다. 10개의 작품을 보면 그중 한 작품 정도 건질까 말까인데 한 공연을 보기 위해 들여야 하는 시간과 노력에 비하면 높은 타율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가 더 낫지 않느냐고 한다. 언제 어디서나 편하게 볼 수 있고, 언제 어디서나 같은 걸 볼 수 있고, 언제 어디서나 최상의 상태를 담보한다. 영화란 완성품이다. 그러니 무한히 복제도 가능한 것이다. 연극은 그렇지 않다. 시간과 장소의 제약이 있고, 내가 직접 시간 맞춰 찾아가야 하는 불편이 있고, 그날그날의 공연 조건이나 배우들의 컨디션, 심지어 관객들의 상태에도 영향을 받는다. 무엇보다 똑같은 공연을 두 번 다시는 볼 수 없다. (설사 이틀 연속 같은 연극을 본다 해도 그것은 이미 같은 연극이 아니다.) 연극은 늘 미완성이다. 그러니 연극에 비해 영화의 장점은 요즘같이 완벽주의의 시대에는 확고하고도 우월하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연극을 영화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다. 그것은 마치 그림과 사진을 비교하는 것만큼이나 부당하다. 물론 연극과 영화가 (그림과 사진도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면에서 접점과 교차점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두 영역은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데, 그 본질이란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근본적이고 현실적이며 경험적인 것이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영화 상영 도중에 관객이 영화의 장면 속으로 뛰어들어가 영화를 망칠 수는 없다. 물론 관람을 방해하거나 화면을 찢을 수는 있어도 여전히 영화는 완벽하게 온전할 것이다. 그러나 연극은 관객이 마음만 먹는다면 무대 위로 뛰어들어가 연극을 망쳐버릴 수 있다. (물론 비참하게 끌려 내려와야겠지만 한 번 시도해봐도 좋을 것이다. 이것은 나의 로망 중에 하나이기도 하니까.) 관객은 바로 그때 거기에서 현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관객이 그때 거기에서 현존하고 있다는 건 무슨 뜻일까. 아무 뜻도 없다. 그저 말 그대로 내가 그때 거기에서 현존하고 있다는 것일 뿐. 바로 그 무대와 함께, 바로 그 배우들과 함께 말이다. 우리는 이 끝없는 시간과 세상 속에서 놀랍게도 이토록 짧은 시간, 이토록 작은 장소로 모여든다. 어떤 일이 벌어지기 때문에 우리가 모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이기 때문에 어떤 일이 벌어진다. 그리고 마치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렸듯이 배우들은 무대라는 십자가에 매달리고, 관객들은 그것을 지켜보는 참여자-목격자가 된다. 그럼 다시 한번 질문이 날아오겠지. 왜 배우들은 무대라는 십자가에 매달리며 왜 관객들은 그것을 지켜보는 목격자가 되어야 하느냐고. 그럼 나는 또 같은 말을 되풀이해야 한다. 아무 뜻도 없다고. 하지만 계속 이 말만 되풀이할 수는 없으니 억지로라도 문장을 만들어 보자면, 그것은 장대한 역사의 틈새에 끼어들어 단 한 점의 순간 위에 멈추어 서는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멈추어 서기 위해서는 거의 '신성'이라 할 만한 힘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렇게 거의 우연히 혹은 필연적으로 멈추어 선 순간 우리는 일종의 실존을 예감한다. 이건 이론화시킬 수도 추상화시킬 수도 없다. 그것은 마치 죽음과 부활의 경험과도 비슷한데 많은 소극장들이 지하에 위치한 것도 단지 경제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좀 더 솔직하게 말해야겠다. 배우들과 관객들 사이에는 사실 묘한 긴장과 기싸움이 있다. 처음에는 그게 너무나 불편하더니 나중에는 슬슬 즐기게끔 되었다. 사실 나는 어둠 속에 숨어 밝은 무대 위의 배우들을 바라보며 애잔함이나 비장함 만큼이나 내밀한 잔인함과 전능함을 만끽한다. 마치 그것은 자신의 키스로 인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몰래 지켜보는 유다의 기쁨과도 같다. 그것은 어쩌면 관음증보다도 더 뒤틀리고 사악하며 뻔뻔한 기쁨일 것이다. 그러나 연극이 끝날 때쯤에는 배우들이 다름 아닌 바로 나를 대신해 십자가에 매달렸음을 깨닫게 된다. 진정 잔인하고 전능한 건 어느 쪽인가. 진정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건 어느 쪽인가. 연극이 끝나고 극장을 빠져나올 때면 나는 약간의 어지러움증과 함께 자괴감과 수치심마저 느껴진다.  

     어쨌거나 빨리 코로나가 지나가서 다시 편하게 연극을 보러 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다시 연극을 보게 되면 예전보다 더 신랄하고 가차 없이 감상을 써 볼 참이다.  아, 노파심에 한 마디 덧붙이자면 연극에 대한 내 감상은 지극히 내 개인적인 취향과 느낌, 그리고 우연에 의해 좌우됨을 분명히 하고 싶다. 혹시 내 감상을 보고 그 연극에 대해 평가를 내린다면 참으로 부적절한 일이다. 연극은 일단 직접 보는 게 좋다. 설사 보고 나서 아무리 실망스러울지라도, 극장을 나오면서 쌍욕을 쏟아낼지라도, 연극은 보러 갈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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