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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곡도 Apr 24. 2020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뮤지컬 : 오페라의 유령

공연장소 : 삼성스퀘어 인터파크홀

공연기간 : 2020년 3월 14일 ~ 2020년 6월 27일

관람시간 : 2020년 4월 23일 오후 8시




     얼마 전 [오페라의 유령] 배우 몇몇이 코로나에 걸렸다는 뉴스를 접했기 때문에 나는 공연도 당연히 취소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코로나 때문에 거의 2개월을 쉬었던 공연 감상평은 5월이나 되어야 가능하겠거니 하면서 5월 공연들을 뒤지며 연극 2편을 예매해 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오페라의 유령] 공연 날짜가 하루하루 다가오는데도 공연 취소 연락이 없기에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공연을 강행한다는 것이었다. 기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아직 코로나가 종식되지 않았기 때문에 찝찝한 마음도 들었다. 어쨌든 이제 와서 예매를 취소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나는 마스크와 손소독제까지 단단히 챙겨 들고 공연장으로 향했다.

     나는 오래전 미국으로 여행 갔을 때 뉴욕에서 이 공연을 본 적이 있었다. 워낙  유명한 뮤지컬이라 꼭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공연장은 소중형 무대 정도 크기였고 다닥다닥 붙은 좌석에 앉은 사람들은 발 디딜 틈도 없이 빼곡했는데 막상 공연은 좀 지루했다. 물론 언어의 장벽 탓도 있겠지만 내 기억에는 비슷한 노래와 장면이 끝없이 반복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유명한 뮤지컬을 보며 지루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주변을 둘러보다가 몇몇 외국인들이,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백인들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걸 발견하고는 내심 안도했다. 일종의 인류애라고 해야 하나, 인종의 넘어선 동질감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그것은 훈훈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럼 한국 극장에 올려지는 [오페라의 유령]은 어떨까.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보통 공연이 재미없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편인데, 그러기에는 이번 공연의 티켓값이 어마 무시했던 것이다. 솔직히 나는 보통 뮤지컬을 좋아하지 않는다. 뮤지컬 공연에 대해서는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감상도 쓰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 오랫동안 공연 관람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투력이 충천하여 이것저것 가릴 것이 없다. 나는 보통 뮤지컬이 내면의 깊이는 무시한 채 외면의 화려함을 쫓아 징검다리처럼 감정의 정점만을 찍으며 뒤뚱뒤뚱 뛰어가는 모양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가끔은 쇼윈도 마네킹에게 입혀놓은 휘황찬란한 드레스라도 보는 기분이다. 뮤지컬 중에서 오직 [노트르담 드 파리]와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그리고 하나 더 보태자면 [헤드윅]만이 (사실 '헤드윅'은 뮤지컬이라고 하기는 애매하지만) 나를 열광시켰다.  공연을 이미 한 번 관람한 대다가 내용도 뻔히 알고 있고 노래도 워낙 유명하기 때문에, 나는 사실 [오페라의 유령]에 대해서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 결론부터 말하자면 - 나는 상당히 재미있게 보았다. 사실 처음 본 것처럼 생소했다. 뉴욕 공연에서 나는 졸았던 것일까? 아니면 관광객을 상대로 엉터리 공연을 했던 것일까? 아니면 언어의 힘인가? 물론 내가 다소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뮤지컬의 내면적 결핍은 여전했지만, 일상에서는 결코 누릴 수 없는 화려함과 드라마에 대한 환상이라는 측면에서 꽤나 만족스러웠다. 특히 극중극의 형식이 계속해서 교차되며 진행되는 데 그 재미가 쏠쏠하다. 한 장면 한 장면이 완성도가 높았고, 캐릭터들은 개성이 분명하고, 음악은 다양하지는 않지만 강렬하고 아름다웠다. 왜 이 뮤지컬이 뮤지컬의 고전이라고 불리는지  알 것 같았다. 

     이것은 인간의 가장 고귀한 부분과 가장 비천한 부분을 모두 짊어진 한 인간의 이야기다. 누군가 예술은 인간의 가장 최상의 상태이고 범죄는 인간의 가장 최악의 상태라고 했는데 '유령'은 고통과 고독 속에서 이 두 가지 상태를 자신에게 통합한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가 하나의 인격에서 구현되는데 그것은 순수함을 매개로 하지 않는 이상 필연적으로 양립하기 힘든 것이다. 그 순수함이 바로 '크리스틴'이다. 그러나 '순수함'이 아니라 '순수할 뿐'인 크리스틴은 이 두 가지 극단을 견딜 수 없기 때문에 분열되어버린 예술과 삶 사이에서 선택해야만 하는 운명에 처한다. 

     나는 예술가는 인류의 관점에서 보면 위대한 인간이지만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비천한 인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예술이란 결국 모순과 부조리에 집착하면서 그것과 대립하는 것인데,  그건 사실 성숙한 인성이나 지혜, 현명함과는 전혀 결이 다른 것이다. (물론 양쪽을 혼동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도덕적 예술을 추구하거나 예술가가 물의를 일으키면 지나치게 실망한다.) 오히려 예술이란 한 인간의 영혼의 갈라진 틈, 결핍, 뒤틀림에서 나오는 것이다. 예술가는 누구보다 깊은 자신의 어둠에서 도망치기 위해 누구보다 높이 날아오른다. 저 별이 빛나는 하늘 위로 높이높이, 그러나 어디로 간단 말인가. 아무리 높이 날아도 별은 멀기만 하고 결국 누구보다 높은 곳에서 다시 자신의 어둠 속으로 추락하고 마는 것이다. 그리하여 천사는 타락 천사가 되고 타락 천사는 악마가 되는 드라마가 연출된다. 루시퍼가 가장 빛나는 음악의 천사라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예술가들은 예술의 성취물이 가져다준 명성을 화려한 가면으로 삼아 자신의 인간적 결함을 가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고통으로 인해 무너져 내린다. 사랑, 고독, 공포에 의해서. (그리고 다시 그것으로 도망치기 위해 더 높이 날아오른다.)  극단을 오가는 그 어지러움. 그것은 크리스틴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유령'에게 사로잡혀 그에게 마음이 끌리지만, 결국은 평범하지만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랑을 찾아 떠난다. 만약 '유령'이 그 극단의 폭을 줄일 수 있었다면 크리스틴의 사랑을 얻을 수 있었을까. 그러나 만약 그 극단의 폭이 적었다면 그는 '유령'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크리스틴의 관심을 얻지도 못했겠지. 사실 거들떠나 봤을까. 이것이 바로 예술이 '악마와의 계약'인 이유이다. 자신의 영혼을 불쏘시개 삼아 태우는 불빛. 불빛에 이끌려 주위로 모여든 사람들은 마지막 한 방울의 영혼까지 불태우라고 그를 부추긴다. 과연 누가 누구를 이용하며, 누가 누구를 조종하며, 누가 누구를 얕보고 있는 것인가.

     전체적으로 만족스러운 공연이었다. (주인공인 '유령'처럼) 마스크로 얼굴을 꽁꽁 싸매고 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좀 더 '유령'과 크리스티나의 애증을 심도 있게 드러냈다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지만 그 간극은 관객의 상상력으로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오랜만에 느끼는 장중한 화려함에 내 초라하고 평범한 일상이 얼얼해지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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