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인물
남자1
남자2
남자의 아버지
남자의 여자친구 – 영주
무대는 1층과 2층으로 나뉜다. 2층 무대는 방으로 꾸며져 있고, 1층 무대는 텅 비어있다. 1층 무대 바닥은 영상이 상영되는 화면으로 이용된다. 무대 바닥이 화면이기 때문에 무대에 서 있는 연기자가 영상 안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효과가 있다. 객석에서 더 잘 볼 수 있도록 1층 무대는 앞쪽으로 낮게 경사져있다. (이하 1층 무대 바닥을 ‘화면’이라고 지칭한다.)
1층과 2층은 비스듬한 경사로로 연결되어 있다. 2층 방 왼편에는 샤워기가 달린 욕조가 놓여 있고, 욕조 위에는 선반이, 욕조 바로 옆에는 나무 의자가 있다. 2층 중앙에는 전신 거울이 있는데 실제 거울은 아니다. 거울 옆 작은 탁자 위에는 거품비누, 면도기, 수건이 놓여있다. 방 오른편으로는 침대 크기 정도의 직육면체 단이 있다. 극 중에서 침대와 소파 등으로 쓰인다. 전체적으로 방의 분위기는 밋밋하고 특징이 없다.
하얀 와이셔츠와 잿빛 양복바지 차림의 남자1이 느릿느릿 방으로 들어온다. 그의 모든 행동이 다 느릿느릿하다. 남자1은 속옷만 남겨놓고 옷을 모두 벗어 의자에 걸쳐 놓는다. 남자1의 속옷 역시 방만큼이나 무미건조하고 특징이 없다. 남자1은 욕조에 물을 틀어놓고 전신 거울로 걸어가 거울에 자신을 비춰본다.
(거울에서는 남자1과 똑같은 속옷 차림의 남자2가 남자1의 그림자를 연기한다. 두 사람은 실제 거울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는 사람과 인영(人影)처럼 동시에 움직인다.)
남자1이 손바닥으로 거울을 닦아낸다. 남자2도 같은 동작을 한다. 마주 닿은 두 사람의 손바닥이 좌우로 움직인다. 남자1과 남자2는 허리를 살짝 굽혀 마치 낯선 사람을 바라보듯 서로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본다. 잠시 후 남자1과 남자2는 테이블에서 면도기를 들고 면도를 시작한다. (전기면도기가 아닌 면도칼 면도기이다.) 하얗게 거품을 내서 얼굴에 칠하고 면도기로 조심스럽게 밀어낸 뒤 수건으로 닦아낸다. 그리고 남자1은 돌아서서 욕조를 향해 걸어가지만 남자2는 그대로 거울 속에 남아 남자1을 관찰한다. 남자1은 면도기에서 면도칼을 꺼내 욕조 바로 위 선반에 가지런히 올려놓은 뒤 속옷을 마저 벗어버리고 알몸으로 욕조 안에 들어간다. 남자1이 움직일 때마다 욕조 안의 물이 넘쳐흐른다.
남자1은 얼굴을 관객들에게 향한 상태로 욕조 안에 앉는다. 남자1이 편안하게 자리를 잡자 남자2가 거울 밖으로 걸어 나와 남자1이 의자에 벗어놓았던 옷을 입는다. 찬찬히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남자2는 관객들을 향해 말을 시작한다.
남자2 나는 물을 좋아합니다. 물을 가득 채운 욕조에서 하루 종일 머무는 게 내 유일한 낙입니다. 지금도 나는 이렇게 아침 일찍부터 욕조에 들어앉아 있습니다.
남자2는 욕조로 걸어가 수도꼭지에서 흘러내리는 물에 손끝을 적신다.
남자2 수도꼭지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은 아무리 들여다보고 있어도 질리지를 않아요. 그것은 흡족함을 넘어 경이로움까지 느끼게 합니다. 거리마다 자동차가 넘쳐나고, 하늘 끝까지 유리 빌딩들이 솟아오르고, 대형 마트에는 먹을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지만, 이 욕조 하나에 가득 찬 물보다 더 풍요로운 걸 나는 본 적이 없습니다. 마치 모든 걸 다 보상받는 기분이에요. 역사를 통틀어 이토록 인간을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했던 기술이 있었던가요? 인간에게 있어 수도 시설이란 영원한 첨단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남자2가 1층 무대 앞으로 나온다.
남자2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는 물을 좋아했습니다. 아니, 좋아한 정도가 아니라 주변에 물이 없으면 극심한 불안감에 견디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늘 갈증에 시달렸고 적어도 하루에 서너 번씩은 물이 가득 찬 욕조에 들어가 있어야 직성이 풀렸습니다.
남자1 넌 물속에서 사는 생물로 태어났어야 했는데 실수로 사람으로 태어난 모양이구나.
남자2 처음에는 싱겁게 농담을 하던 부모님도 내가 어항에 담긴 물을 남김없이 마셔버리자 사색이 되어서 나를 병원으로 데려갔습니다. 하지만 온갖 검사를 다 해보아도 별다른 이상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남자1 물을 좋아한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니까요.
남자2 의사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습니다.
남자1 어린 시절에 특정한 물체에 애착을 보이는 건 흔한 일입니다. 이 아이에게는 그 상대가 손수건이나 인형이 아니라 물인 모양이네요.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지만 철이 들면서 점차 사라질 겁니다. 걱정 마세요.
남자2 하지만 지금까지 그 증상은 조금도 나아지지를 않았습니다. 아직 나는 철이 들지 못한 걸까요?
남자2가 더운 듯 옷깃을 벌린다.
남자2 이 안도 점점 더워지고 있네요. 바깥 온도는 이미 30도를 훌쩍 넘었을 겁니다. 뜨겁고 건조한 열기가 열어놓은 창문을 타고 안으로 밀려들어 옵니다.
남자1이 수도꼭지에서 물을 받아 마시다가 사레가 들려 구역질을 한다. 남자2가 고개를 돌려 그 모습을 지켜본다. 수돗물을 잠근 남자1은 뜨거운 열기를 피하려는 듯 물속 깊숙이 몸을 담근다.
남자2 도대체 이 열기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저 멀리 있는 태양만으로는 가능할 리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좀 더 가까운 곳, 근처 어딘가, 그래요, 이건 분명 바로 여기, 지구 속에 꽉 차있다는 용암 때문일 겁니다. 얇은 땅 껍질 바로 밑에서 거대한 불덩어리가 끝없이 타오르고 있으니 당해낼 재간이 없는 거죠. 그런데도 사람들은 (관객들을 향해 손가락을 흔들어대며)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멀쩡하게 살아가고 있으니 참 이상한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갈증을 느끼는 자가 오직 나 하나뿐인 것처럼 말입니다. 아니, 아뇨. 그럴 리가 없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갈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단지 그들은 모른 척하고 있을 뿐이에요. 악착같이 견디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고통과 인내에 그들은 놀랍도록 무심합니다. 그저 견뎌야 하기 때문에, 견딜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견디는 데 이골이 났기 때문에 견뎌내고 있는 거예요. 아주 오래전, 아가미를 버리고 땅 위로 올라왔던 최초의 위대한 물고기가 그랬던 것처럼요. 이 오기와 고집은 그때부터 유전되어 내려온 습성입니다. 그 최초의 선조 물고기는 자손들에게 엄청난 저주를 내린 셈이죠.
화면에 다 들어오지 않을 만큼 거대한 물고기가 나타나 남자2 옆을 스치고 지나간다. 침묵. 영상이 사라진다.
남자1 또 물에 들어가 있니. 정말 못 말리겠구나.
남자2 엄마는 욕조에 들어가 있는 나를 자주 타박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실은 엄마도 어렸을 때부터 물을 좋아했다는 걸 나중에 외할머니를 통해 알게 됐습니다. 심지어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 내내 수영 선수로 활동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엄마의 어릴 적 사진에는 유난히 수영복을 입은 모습이 많습니다. 그중 레이스가 달린 파란색 수영복 차림에 흰색 수영모자를 손에 들고 있는 소녀의 사진을 나는 가장 좋아합니다. 이마와 볼에 달라붙은 젖은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치렁치렁 늘어뜨린 소녀는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인 채 물속 어딘가를 무심코 바라보고 있습니다. (침묵. 잠시 상념에 잠긴다.) 내가 6살 때, 엄마는 내게 수영을 가르쳐 주려고 한 여름 내내 애쓴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끝내 수영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려고 애쓰기보다는 그냥 물속에 조용히 잠겨 있는 편이 더 좋았기 때문입니다. 헤엄쳐서 저만치 앞으로 나아가면 뭘 하나요. 저곳도 이곳도 물이기는 마찬가지인데요.
남자1 유별나게 물을 좋아하길래 수영을 잘할 줄 알았더니 그렇지도 않구나.
남자2 나는 엄마를 실망시킨 것 같아 눈물이 찔끔 나왔습니다.
남자1 괜찮아. 지금부터 배우면 되니까. 자, 엄마가 하는 걸 보고 따라해 봐.
화면에는 물속에서 환하게 웃으며 남자2를 향해 손을 흔드는 여자의 모습이 보인다. 손을 흔들던 여자는 남자2로부터 멀리 헤엄쳐 화면 밖으로 사라진다. 남자2는 그 모습을 바라본다.
남자2 엄마는 갈색으로 빛나는 긴 두 다리를 멋지게 뻗으며 헤엄쳐 나아갔습니다. 엄마를 따라 하얀 물거품이 꼬리처럼 길게 이어졌습니다.
남자1 너도 이리로 와. 어렵지 않아.
침묵. 영상이 사라진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