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물의 기억 (4)

by 곡도




남자1 우리 딸에게 얘기 많이 들었어요.


남자2 말씀 낮추십시오. 그게 저도 편합니다.


남자1 그래요? 그럼 그럴까? 증권회사에 다니고 있다지?


남자2 네, 자산관리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차를 한 모금 마신다.)


남자1 그래, 성실히 일하면 전망이 나쁘지 않지. 몇 년 다니다가 자기 사업을 할 수도 있는 거고. 어쨌거나 평생 월급쟁이로 썩으려는 건 아니겠지? 젊은 사람이 야망을 가져야지. 그건 그렇고 요새는 어디에 투자하는 게 좋은가?


남자2 1분기에 중국 주식 시장이 하락세로 돌아선 뒤에는 중동 건설 쪽이 괜찮았는데, 지금은 전쟁 문제로 시끄러워서 추이를 좀 지켜보시는 게…….


남자1 당신은 지금 왜 그런 걸 물어봐요? 가뜩이나 긴장하고 있는 사람한테.


영주 맞아요, 아빠. 너무하세요.


남자1 아니, 딸 남자친구 덕 좀 보는 게 어때서 그래? 뭐, 그건 그렇고, 지금 어디에서 살고 있나?


남자2 마포에 살고 있습니다.


남자1 아버님하고 같이?


남자2 네.


남자1 어머님은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지.


남자2 네. (차를 한 모금 마신다.)


남자1 그래도 이렇게 잘 컸으니 아버지가 자랑스러워하시겠어. 아버지는 무슨 일을 하신다고?


남자2 한수기업의 철강공장 주임으로 계십니다.


남자1 그래, 힘든 일을 하시는구만.


남자2 네, 그래도 건강하십니다. (관객을 향해) 입으로는 꼬박꼬박 멀쩡하게 대답하고 있었지만 나는 전혀 대화에 집중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차를 마시는 척하면서 끊임없이 수영장을 흘긋거렸습니다. 한 번 쳐다볼 때마다 물이 조금씩 집안으로 넘쳐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창틀을 적시고, 거실 바닥을 적시고, 카펫을 적시고, 발목을 적시고, 가슴을 적시고, 급기야 바로 코앞에서…….


남자1 결혼은 언제 할 생각이에요?


남자2 네?


남자1 어차피 얘는 이미 마음을 정한 것 같으니, 뭐 우리가 조건을 더 따져봐야 뭘 하겠어요. 젊은 사람이니 앞으로 노력해서 차근차근 쌓아 가면 되는 거고, 우리도 모른 척하진 않을 거고……. 그래서 우린 되도록 빨리 했으면 하는데. 무엇보다 영주 얘가 시집가겠다고 아주 성화에요.


영주 엄마, 제가 언제요.


남자1 되도록 빨리가 뭐야. 나이가 넘치는데 아예 이번 해가 가기 전에 치러버려야지.


영주 아버지, 이 사람 당황하겠어요. 그렇게 밀어붙이시면 어떡해요.


남자1 뭐 어때서 그래. 2년이나 사귀었으면 그만 자리를 잡아야지. 아이도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가져야 할 거 아니냐. 더 이상 미적거리지 말고 해치워버리자.


남자2 별안간 극심한 갈증이 나를 덮쳤습니다. 이제껏 바로 내 어깨 뒤에 숨어있었던 것처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나는 황급히 찻잔을 들어 올렸지만 이미 차는 다 마셔버리고 없었습니다. 등 뒤에서 진땀이 흐르고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차를 더 줄 생각은 않고 자기들끼리 떠들어대고 있었습니다.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아이에 대해서 말입니다.


남자1 그래,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물론 자네도 빨리 결혼하고 싶겠지?


영주가 미소를 지으며 남자2를 바라본다. 남자2도 영주를 바라본다.

남자2 아, 드디어 충실하고 단단한 행복이 바로 눈앞에 있었습니다. 손을 뻗어 쥐기만 하면 그만이었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꼼짝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장이라도 혀를 빼물고 헐떡이기 일보직전이었습니다. 구토가 치밀어 오르고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습니다. 그저 이 열기를, 이 갈증을 해소하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영주 왜 대답이 없어? (장난기 있게) 혹시 나하고 결혼하기 싫은 거야?


남자2 나는 진심으로 영주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고 싶었습니다. 영주를 품에 꼭 껴안고 영주를 제게 주십시오 하고 큰 소리로 외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다 함께 와르르 마음껏 웃어재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꼼짝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방에서 물비린내가 진동했습니다.


영주 왜 그래? (조심스럽게 남자2의 손을 잡는다.)


남자2 어떻게 이걸 영주에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설명한들 이해해 줄까요? 나는 영주의 손을 떨치고 일어나 정원으로 향하는 문으로 걸어갔습니다.


남자2가 1층 무대 앞쪽으로 걸어 나온다.


남자2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모두들 멍하니 보고만 있었습니다. 나는 발코니를 가로질러 수영장 가장자리에 서서 물을 내려다보았습니다.


남자2는 네모난 물 영상 가장자리 끝에 서서 화면을 내려다본다. 파란 물 영상 위에 그의 검은 그림자가 비친다.


남자2 매끈한 물표면 위에 내 모습이 선명하게 비쳐보였습니다. 양복을 빼입고 머리를 가지런히 빗어 넘긴 말끔한 모양새였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어깨에는 뾰족하게 힘이 들어가 있고 눈은 얼이 빠진데다 이마에는 고단한 주름이 가득했습니다. 전혀 만족스럽지 않은 얼굴로, 그래도 안간힘을 쓰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있었습니다.


남자1 많은 사람들이 거울 속에서 익사한다.


남자2 나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물에서 도망치려 했지만 오히려 거울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깊이도, 온도도 없는 평면의 거울에서 말입니다. (고개를 들며) 온 세상이 다 거울이었습니다. (관객들을 한사람 한사람 둘러보며) 모든 사람들이 다 거울이었습니다. 빽빽한 거울들 속에서 수많은 내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숨이 막혔습니다.

물 영상 속 자신의 그림자를 지그시 내려다보며 손을 뻗는다.

남자2 하지만 이제 난 알 것 같습니다. 거울은 물이 자신을 감추는 방법이에요. 거울 속을 헤매고 다니느라 나는 물로 돌아갈 수 없었던 겁니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죽을 수가 없는 것 처럼요. 사람들은 물 위에 비친 그림자에 홀려 자꾸 옆으로 미끄러집니다. 바로 뒤에 깊고 시원한 물이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맙니다. 정신없이 달려가다가 자신이 뭘 찾는지도 모르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거죠. 그러나 물은 언제나 이 자리에 있었어요. 모습을 감춘 적도, 앞을 가로 막은 적도 없습니다. 돌아가고 싶다면, 난 그저 한 발 앞으로 내딛기만 하면 됩니다. 이렇게, 딱 한 발…….

남자2가 물 영상 속으로 뛰어든다. 영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비명을 지른다.


영주 그만-.


무대 전체가 순식간에 어두워지면서 욕조 속에 있는 남자1에게만 조명이 비친다. 남자2와 영주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잠시 침묵.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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