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물의 기억 (5) - 완결

by 곡도





남자1 어느새 해가 지는 모양입니다. 나는 세상이 어둠 속에 잠기는 것을 바라봅니다. 해가 졌는데도 아직 공기는 후덥지근합니다. 오늘도 열대야라고 하니 밤새도록 이렇게 덥겠지요. 나는 몸을 동그랗게 웅크려 봅니다. 몸이 온통 자글자글한 주름투성이네요. 물속에 너무 오래 있었나 봅니다. 밝은 곳에서 보면 꽤나 흉측할 겁니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람. 나는 물에 불어 흐물흐물 해진 내 몸이 좋습니다.


아버지가 2층 무대로 나온다. 작업복 차림이다.


아버지 하루 종일 물속에 있으면 몸에 좋지 않다는 구나. 잠깐씩 나왔다가 들어가라.


남자1 영주와 헤어지고 얼마 되지 않아 직장도 그만둔 채 하루 종일 욕조 안에 틀어박혀 있는 내게 아버지는 말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참견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직장을 1년만 쉬고 싶다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버지 그래, 그동안 열심히 살았으니 좀 쉬어 봐라.


남자1 하지만 1년이 지나고 2년이 다되도록 여전히 이러고 있는걸 아셨다면 어릴 때 그 호수에서처럼 또 호되게 따귀를 때리셨을 지도 모릅니다. 그럼 나는 또다시 딛고 일어나 다음 20년도 그럭저럭 열심히 살아가게 되었을까요. 하지만 결국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10개월 전에 돌아가셨거든요.


아버지가 1층 무대 앞으로 걸어 나온다.


남자1 그날 밤, 나는 욕조 안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공장에 야근하러 가시고 집에는 나 혼자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루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물과 고요만이 나를 감싸고 있었습니다. 그 때 집 전화가 요란하게 울리며 나를 방해했습니다. (시끄러운 벨소리가 울린다.) 나는 받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내게 걸려온 전화도 아닐 테니까요. (벨소리가 끊기더니 다시 울린다.) 그런데 전화가 끊기자마자 곧바로 또 울려댔습니다. 나는 한 번 더 무시했습니다. (벨소리가 끊겼다가 또 다시 울린다.) 세 번째로 울리기 시작했을 때는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남자1 여보세요?


공장관계자 (아버지가 말함) (다급하게) 김주임님 아들인가?


남자1 네, 그런데요.


공장관계자 (아버지가 말함) 빨리, 빨리 아버지 공장으로 와야겠어.


남자1 무슨 일인데요?


공장관계자 (아버지가 말함) 공장에 불이 났어.


남자1 불이요? 아버지는요?


공장관계자 (아버지가 말함) 아무래도 공장 안에서 못나온 것 같아.


남자1 그 뒤 어떻게 옷을 입고 어떻게 택시를 타고 어떻게 공장까지 갔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공장에 도착했을 때 보았던 그 거대한 화염은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화면에 거대한 화염이 나타나 아버지를 뒤덮는다. 아버지는 우두커니 서서 관객들을 바라본다.


남자1 밤하늘 끝까지 치솟은 검붉은 불길이 공장 지대 전체를 휘감고 있었습니다. 새까만 연기와 재가 사방에서 뿜어져 나오고 불꽃을 튀기는 뜨거운 열기에 머리카락이 오그라들 지경이었습니다. 지구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다는 그 맹렬한 불덩어리가 지상 밖으로 터져 나온 게 분명했습니다. 이대로 온 세상을 태워 버릴 만큼 광포한 기세였습니다. 소방차 수십 대가 달라붙어 호스로 물을 뿌려대고 있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그것은 완벽한 불의 승리였습니다. 나는 그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아버지가 무릎을 꿇는다.


남자1 그 때 구조대원들이 사람들을 들것에 실어 나오는 게 보였습니다. 나는 아버지, 하고 부르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나뒹굴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새까맣고 흉측한 몰골들이었으니까요. 나는 한사람 한사람 자세히 들여다 본 뒤에야 왼쪽 얼굴과 왼쪽 팔이 녹아 문드러진 채, 타다 만 숯 조각처럼 재를 뒤집어쓰고 있는 아버지를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나는 아버지 하고 큰 소리로 불렀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들을 수 없었습니다. 양쪽 귀가 눌어붙었기 때문입니다.


영상이 사라진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버지가 2층으로 올라가 욕조 옆에 있는 의자에 앉는다.


남자1 아버지는 병원에 실려간지 이틀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시던 날, 아버지는 아무리 씻어도 씻어지지 않는 새까만 손으로 내 손을 붙잡고 들릴 듯 말 듯 속삭였습니다.


아버지 무섭구나. (침묵) 미안하다.


남자1 그것이 아버지의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무엇이 미안한지 결국 물어 보지 못했습니다. 약한 소리를 해서 미안하다는 걸까? 먼저 떠나서 미안하다는 걸까? 혼자 남겨둬서 미안하다는 걸까? 아니면 애초에 이 세상에 낳아준 것 자체가 미안하다는 걸까? 아버지의 죽음은 어머니 때처럼 평화롭지는 않았습니다. 신음과 몸부림 끝에 극심한 발작이 뒤따랐습니다. 그러나 숨이 끊어진 뒤에는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장례를 마친 뒤, 불에 타 죽은 아버지는 한 번 더 화장터 불구덩이 속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놀랍게도 그것이 아버지의 유언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유골 가루는 멀리 동해 바다에 뿌려졌습니다. 엄마가 뿌려졌던 호수로는 갈 수 없었습니다. 그곳은 몇 년 전 모래와 자갈로 깨끗하게 메워지고 그 위에는 관청과 공원, 극장이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번엔 나도 물속으로 뛰어들지 않았습니다. 이젠 나도 나이가 들었고, 배에는 마실 물이 충분히 있었고, 무엇보다 나를 물에서 끌어올려줄 아버지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의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무대 밖으로 걸어 나간다.


남자1 그렇게 혼자 빈 집으로 돌아 온지 어느새 10개월이 지났습니다. 그 동안 먹을 것을 사러 나갈 때 외에는 거의 집밖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나갈 필요가 없으니까요. 물이 가득한 욕조만 있으면 더 바랄 게 없었습니다. 나는 딱히 외로울 것도 고민도 없이 유유자적하며 살았습니다. 이렇게 욕조 안에 앉아 해가 뜨고 지는 걸 수없이 바라보았습니다. 그 시간동안 나의 삶은 물에 담가 놓은 수채화 그림처럼 퇴색되어갔습니다.


남자1이 고개를 숙여 물에 비친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


남자1 이제 나에게는 멀건 흔적만이 희미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것이 아쉽지는 않습니다. 누구의 삶이나 퇴색되어 가기는 마찬가지니까요. 다만 사람들은 그 위에 덧칠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자신을 거울에 비춰보며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베껴 그리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삶이란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고 했던 누군가의 말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디로도 가지 않아요. 삶은 그저 거울에 비친 내 자신과 마주보면서 네가 누구냐고 반복해서 묻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답은 메아리처럼 질문을 끝없이 반사할 뿐이고, 그렇게 사람들은 거울에 파묻혀 익사해 갑니다.


침묵. 무대가 어두워진다.


남자1 한밤중의 욕실은 꼭 땅 속 깊은 곳에 있는 동굴 속 같습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저 물이 있을 뿐입니다. 그거면 완벽합니다. 왜 그 옛날의 선조 물고기가 이 완벽한 물을 떠나 뜨겁고, 건조하고, 먼지투성이인 궁핍의 땅으로 올라갔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진화를 거듭하는 동안 아주 조금씩, 그러나 결정적으로 오류가 쌓여간 건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결국 구분하고, 창조하고, 선택하고, 궁리하고, 고뇌하고, 번민하는, 자극적이지만 영 쓸모없는 결함들로 뒤덮여버린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진화란 완벽에서 불완벽으로의 이행인걸까요. 그런데 어쩌다 나는 그런 야심찬 추락에서 빠져나와 이렇게 어중간하게 표류하게 되었을까요. 내 자신이 꼭 ‘장님 물고기’ 같습니다. 나는 언젠가 이 물고기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텔레비전에서 본적이 있습니다. 원래 지상에서 서식했던 이 물고기는 아주 오래 전 동굴 속 지하수로 흘러들어와 지금까지 이어졌다고 합니다. 이 물고기의 특이한 점은 진보하는 쪽으로가 아니라 퇴보하는 쪽으로 진화해 왔다는 겁니다. 눈은 함몰되어 사라지고 몸은 색소 결핍으로 투명해 졌습니다. 부레도 퇴화해서 지느러미를 움직이지 않으면 물속으로 가라앉고 맙니다. 물속에서 머물기 위한 최소한의 기능만 남겨두고 모두 놓아버린 겁니다. 어째서 장님 물고기는 이 춥고 어두운 동굴로 내려왔던 걸까요. 왜 기회와 주장이 넘치는 저 땅위로 돌아가지 않았을까요. 나는 이 장님 물고기가 바로 그 옛날의 선조 물고기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흙먼지와 바위틈을 기어 온 땅을 돌아다니다가 갈증과 자책과 실망 속에서 결국 다시 물속으로 뛰어든 겁니다.


남자1이 물속에 완전히 머리를 집어넣는다. 오랫동안 물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 때 거울 속에서 남자2가 나타난다. 처음처럼 다시 속옷차림이다. 남자1의 머리가 물 밖으로 나온다.


남자2 이렇게 하루 종일 물에 들어가 있어도 갈증이 사라지지 않는 건 어째서일까요? 이것이 내 평생의 질문이자 수수께끼였습니다. 그런데 최근에야, 나는 겨우 그 대답을 알 것 같습니다. 내 몸에는 70%의 물 외에 30%의 다른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30%가 나와 물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거예요. 그 30%를 포함하고 있는 한 나는 끝내 불순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30%를 제거할 순 없을까요? 그렇게 나도 완전한 물이 될 수는 없는 걸까요?


남자1이 두 손으로 물을 들어 올려 움켜 쥐려한다. 하지만 물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고 만다. 남자2가 그 모습을 지켜본다.


남자1 가벼운 것들은

물 위에 뜬다

물이 떠받든다

속을 비운 것도

물 위에 뜬다

물이 떠받든다.


남자2 문득 어렸을 때 읽었던 시 한편이 생각납니다. 시 속에 나오는 ‘가벼운 것’이 바로 그 30%를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30% 때문에 나는 다시 물 위로, 태양이 작열하는 메마른 대지 위로 떠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시를 조금 바꾸어 봅니다.


남자1 무거운 것들은

물속에 가라앉는다

물이 감싸 안는다

속이 꽉 찬 것도

물속에 가라앉는다

물이 감싸 안는다


남자1, 남자2 (두 사람이 동시에) 그렇게 나도 물이 될 수 있는 걸까요?


남자1은 아까 면도기를 놓았던 자리를 더듬어 면도칼을 집어 든다.


남자1 꼭 오늘이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이 아니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어제 했어도, 오늘 해도, 내일이라도 상관없는 일입니다.


남자1은 면도칼로 왼쪽 손목을 베어낸다. 남자2가 그 모습을 무표정하게 바라본다.


남자1 (왼손을 조금 더 높이, 두 손목을 모아 앞으로 내밀며) 어둠 속에서 휘두른 탓에 생각보다 더 깊이 베었습니다. 차라리 잘 되었습니다. 피가 솟구쳐 오릅니다. 뜨거운 피가 어둠을 타고 몸 밖으로 빠져나갑니다. 내 몸의 이물질도 함께 빠져나갑니다. (눈을 감으며 양팔을 앞쪽으로 벌린다.) 90%....... 80%....... 75%....... 72%....... 70%....... 아, 어둠이 꼭대기에서부터 무너져 내립니다. 숨소리가 까마득히 멀어집니다. 발바닥이 거꾸러집니다. 그만 정신을 잃을 것 같습니다. 이게 끝인 걸까요?


남자1이 몸에 경련을 일으킨다. 버둥거리려 하지만 몸이 점점 뻣뻣하게 굳어버린다. 남자1은 사방에 물을 튀기며 허우적거리다가 물속으로 축 늘어진다. 더 이상 움직임이 없다. 차갑고 긴 침묵. 남자2가 거울 밖으로 나와 1층 무대 앞으로 걸어 나온다. 남자2의 목소리는 차분하지만 자신의 죽음을 위로하는 듯 부드럽다.


남자2 피가 모두 빠져 나간 손목에서부터 다시 서늘한 물이 차오르기 시작합니다. 물은 핏줄기를 타고 온 몸으로 퍼져나갑니다. 심장에서 폐로, 폐에서 간으로, 간에서 뇌로, 뇌에서 피부로, 피부에서 머리카락으로, 머리카락에서 손톱으로……. 구석구석 물이 스며듭니다. 다시 머리가 맑아집니다. 평생 이토록 머리가 맑았던 적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보이고 모든 것이 다 들립니다. 더 이상 갈증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눈을 감으며 양팔을 앞쪽으로 벌린다.) 75%....... 80%....... 90%....... 95%....... 99%........ 마침내 나는 물로 가득 찹니다. 아니, 나는 물이 됩니다.


화면은 물의 영상으로 가득 찬다. 화면이 확장되어 관객석까지 영상이 비춰도 좋다. 무대는 어둠 속에 잠기고, 화면과 남자2만 남는다. 남자2는 눈을 들어 허공 위를 바라본다. 말투는 여전히 느리고 차분하다.


남자2 나는 지금 깊은 물속으로 빠져듭니다. 가늠할 수 없이 차갑고 어두운 물속입니다. 하지만 나는 놀라지 않습니다. 더 이상 두렵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내 자신처럼 편안하기만 합니다. 내 입에는 미소가 떠오릅니다. 물속이 아니었다면 나는 내 웃음소리를 들었을 겁니다. 아, 지구 속이 타오르는 불길로 가득하다고 했던 사람들의 말은 거짓이었습니다. 지구 속은 이렇게 끝없이 넓고 영원히 깊은 물로 가득 차있으니까요. 나는 지금 지구 한가운데로 천천히 가라앉습니다.


남자2가 얘기하는 동안 무대는 점점 어두워진다. 암전. 막.




(완결)






* [많은 사람들이 거울 속에서 익사했다.] - 라몽 고메즈 드 라 세르나의 책 <우스꽝스러운 사람 귀스타브>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이 글에서는 ‘익사했다’라는 과거형을‘익사한다.’라는 현재형으로 바꾸었습니다.


* 희곡 안에 나온 ‘무거운 것들은...’로 시작하는 시는 박방희 시인의 [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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