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인물
아버지
지훈
성민
노인
인물상 1, 2, 3
의사
간호사
엄마와 아이
1막
무대는 한 병실이다. 특별한 장식은 필요치 않으며 딱히 병실임을 강조할 필요도 없다. 무대 중앙에는 양 날개가 앞쪽을 향해 둥글게 구부러진 하얀색 벽이 높게 세워져 있다. 벽은 얼핏 탑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하 대본에 나오는 ‘벽’은 모두 이 벽을 가리킨다.)
벽 앞 쪽에 있는 무대 전면에는 병원 침대 3개가 놓여있다. 중앙에는 공간을 비워둔 채 왼쪽에 한 개, 오른쪽에 두 개가 있다. 침대들은 모두 머리맡이 벽 쪽을 향해 있고 침대 상반신이 세워져 있어서 관객들이 침대에 누워있는 배우들을 잘 볼 수 있다. 왼쪽에 있는 침대가 지훈의 것이다. 지훈의 침대 머리맡에는 여러 가지 의료 기계들이 설치되어 있다. 가장 오른쪽에 있는 침대는 노인의 것이고, 그 옆에 있는 침대는 비어있다. 등받이가 없고 높이가 낮은 보호자용 간이침대가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병원 침대들과 좀 떨어진 앞쪽에 가로놓여 있다.
극이 시작된다. 무대는 캄캄한 어둠 속에 잠겨있다. 어디선가 신호음과 기계음이 규칙적으로 들려온다. 잠시 후 아버지가 지훈의 침대 머리맡에 있는 작은 전등을 켠다. 빛이 밝아지며 지훈의 침대가 드러난다. 거기에는 이불을 어깨까지 덮고 있는 지훈이 여러 가지 기계 호스와 전깃줄에 연결된 채 누워있다. 지훈은 연극 내내 그 상태 그대로 어떤 반응도 나타내지 않는다. 가장 오른쪽 침대에는 노인이 돌아누워 자고 있다. 아버지는 지훈에게 연결된 기계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고는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지훈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아버지 지훈아. (침묵)
아버지 (조금 화난 듯) 지훈아. (침묵)
아버지 (멋쩍게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이 너를 미라라고 부르더라. 이미 오래 전에 죽었는데 기계 덕분에 썩지 않고 있다고, 아니, 차라리 미라에게는 품위라도 있다면서 뒤에서 수군거리더라. 하지만 병원에 들어오면 제일 먼저 버려야하는 게 품위야. 그까짓 품위가 다 무슨 소용이냐. 오히려 이건 감사해야만 하는 모욕이야. 원래 삶은 모욕적인 것이고, 니 삶이 조금 더 모욕적인 것뿐이야.
침묵. 아버지는 어두컴컴한 벽을 바라본다.
아버지 날이 밝으려면 아직 멀었나보다. 어째서인지 밤이 점점 더 길어지는 구나. 꿈조차 없이 긴 밤이야. 아니, 꿈이 없기 때문에 밤이 긴 건가. 그러고 보니 꿈을 꿔본지가 너무 오래되었어. 잠이 들면 캄캄한 어둠 속으로 고꾸라졌다가 놀라서 깨어나곤 하지. 사방에서 진동하는 소독약냄새 때문에 꿈조차 병실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모양이다. 지훈아, 너도 꿈을 꿀 수 없니? 계속 어둠 속으로 고꾸라지고 있는 거냐? 차라리 잘 됐지 뭐냐. 꿈이 병실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면 저승사자도 감히 들어오지 못하겠지.
아버지는 지훈의 이마를 쓸어 넘기며 생각에 잠긴다. 그 때 벽에 (영상으로) 인물상 셋이 나타난다. 실제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추상화된 형태에 여성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목소리도 실제 목소리가 아니라 기계를 통해 어느 정도 추상화 되어 있다.
인물상1 그만 포기하세요.
인물상2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어요.
인물상3 오래가지 못할 겁니다.
아버지 2년 전 지훈이가 사고를 당했을 때도 의사들은 똑같이 얘기했지.
인물상1 그만 포기하세요.
인물상2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어요.
인물상3 오래가지 못할 겁니다.
아버지 하지만 지훈이는 2년이나 잘 버텨줬어. 지금도 이렇게 건재하단 말이야. 그런데도 의사들은 아직까지도 똑같은 얘기를 반복해. 그만 포기하세요.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어요. 오래가지 못할 겁니다.
인물상1,2,3 아아아-
인물상1 너무해.
인물상2 안타까워.
인물상3 가슴이 아파요.
인물상1 의사들은 정의롭지 않죠.
인물상2 생명이 정의롭지 않으니까요.
인물상3 하지만 죽음은 정의로울 수 있어요.
아버지 정의?
인물상1 들어보세요.
인물상2 눈을 뜨세요.
인물상3 마음을 여세요.
인물상1 아드님은 불행한 일을 당했지만
인물상2 여러 사람들을 도울 수 있어요.
인물상3 생명을 살릴 수 있어요.
인물상1 그렇게 아드님은
인물상2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인물상3 또 한 번 살아갈 수 있는 거예요.
아버지 그래, 장기기증센터 담당자도 몇 번이나 그렇게 말했지.
인물상1 죽지 않아요.
인물상2 끝나지 않아요.
인물상3 계속.
인물상1 언제까지나.
인물상2 더 멀리.
인물상3 더 오래.
아버지 닥치지 못해? 아직 숨도 쉬고 심장도 뛰는 멀쩡한 애를 생으로 죽이겠다고? 그리고는 갈가리 찢어서 다른 사람들한테 선심 쓰듯 나누어 주겠다고? 우라지게, 웃기고 있네. 내가 남 좋은 일 시키자고 아들 낳아서 이제껏 키운 줄 알아? 정의라니. 흥, 어림없는 소리. 어림없는 소리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