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손톱이 자란다 (2)

by 곡도





인물상1 시간이 지나면 결국 장기들이 상할 겁니다.


인물상2 장기가 손상되면 아드님도 생존할 수 없어요.


인물상3 그때 가서는 기증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어요.


인물상1 그럼 그건…….


아버지 낭비. 당신들은 그걸 낭비라고 부르고 싶은 거지? 낭비, 허비, 폐물. 그렇게 내 아들 목숨을 다른 사람들 목숨과 저울질 하고 싶은 거지? 한사람이 죽어서 열사람을 살릴 수 있다면 그게 경제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더 이익이라는 거지.


인물상1 맞아요.


인물상2 그럴 듯해요.


인물상3 산수는 언제나 그럴듯하죠.


아버지 헛소리 지껄이지 마. 열 명 스무 명이 아니라 수백 수천 명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 해도 난 내 아들을 내주지 않을 테니까. 세상 사람들이 다 몰려와서 날 달래고 부추겨 보라지. 나를 공중에 매달아놓고 모욕하고 비난하고 협박해 보라고. 내가 눈 하나 깜짝 할 것 같아? 지훈이는 내 아들이야. 세상에서 하나 밖에 없는 내 아들이라고.


인물상1 그러니까 누구하고도 바꾸지 않을 거야.


인물상2 아무데도 가지 않을 거야.


인물상3 나하고 같이 있을 거야.


아버지는 두 손으로 지훈의 이마를 쓰다듬는다. 영상이 흩어지고 다시 전등불빛만이 아버지를 비춘다. 잠시 후 서서히 아침이 밝아오며 벽에는 (영상으로) 창문과 창밖 풍경이 나타난다. 창문은 벽 꼭대기 쪽에 높이 붙어 있다. (연극 내내 창문의 위치는 같다.) 풍경은 가을이다. 창문 왼쪽 근경에는 빨갛게 단풍이 든 나뭇가지가 보인다.

무대가 완전히 밝아진다.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걷어붙이고 지훈의 이불을 벗겨낸다. 이불 밑에서 상의를 입지 않은 앙상한 지훈의 몸이 드러난다. 몸은 전선과 호스로 기계에 연결되어있다. 아버지는 지훈의 바지를 벗겨서 기저귀 차림으로 만든 다음 젖은 수건으로 아들의 몸을 닦기 시작한다. 아버지는 능숙하고 절도 있게 움직인다. 숙련된 움직임이 경쾌하기까지 하다. 아버지는 지훈의 얼굴이며 손가락, 발가락, 팔, 다리, 사타구니까지 구석구석 꼼꼼히 닦는다. 그러는 동안에도 지훈은 미동조차 없이 그대로 누워있다. 그것은 얼핏 염을 하는 모습과도 비슷하다. 그 때 노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노인 아이고, 부산스러워서 도무지 잠을 못자겠네. 꼭 아침 댓바람부터 이렇게 설쳐야 되겄소.


아버지 (쳐다보지도 않고) 원래 아침잠도 없으시잖아요.


노인 그래도 난 따듯한 이불 속에서 좀 더 누워있고 싶단 말이요. 병원에서 일찍 일어나 뭐하려고? 하루가 이렇게 까마득히 긴데.


아버지 누워있는다고 하루가 짧아지진 않아요.


노인 굳이 재촉할 필요도 없지.


노인은 침대 옆에 숨겨 놓았던 담배를 챙겨들고 투덜거리며 병실을 나간다. 아버지는 지훈의 몸을 마저 닦아내고는 새 바지를 입혀주고 이불을 덮는다. 뒷정리까지 마치고 나자 달리 할 일이 없어진 아버지는 병실을 이리저리 서성이다가 뒷짐을 지고 창밖의 가을 풍경을 바라본다. 잠시 후 간호사가 밀대를 밀며 들어와 노인과 아버지에게 식판을 나눠준다. 노인이 부리나케 제자리로 돌아온다. 손에는 신문이 들려있다.


노인 어디, 오늘 반찬은 뭔가. 에게, 콩나물국에 꽁치조림? 말라비틀어진 오이지하고. 대체 불고기나 빈대떡 같은 건 언제 나오는 거야? 다음 명절에나 주려나? (밥을 크게 한 숟가락 입안에 떠 넣는다.)


아버지 그래도 밥풀 하나 남기는 법 없이 잘 드시잖아요.


노인 아깝게 남기긴 왜 남겨. 이게 다 병원비에 포함돼 있는 건데. 그리고 병원에서 무슨 낙이 있어? 아침밥 먹으면 점심밥 기다리는 재미, 점심밥 먹으면 저녁밥 기다리는 재미, 꼬박꼬박 끼니 챙겨먹는 재미로 버티는 거야.


아버지 병원 밥이 맛있다는 사람은 처음 보겠네요.


노인 참 내, 맛이 문제가 아니야, 맛이. 병원 밥에 무슨 맛이 있겠어. 그래도 그거라도, 오늘은 무슨 반찬이 나올까 하는 기대감마저 없으면 이건 사람 사는 게 아니라 눈 뜬 산송장이지 뭐야.


아버지 제사보다 젯밥에 더 관심이 많다는 거네요.


노인 뭐, 요즘 사람들도 비행기보다 기내식에 더 관심이 많다며? 어차피 비행기에서 뛰어내리지 않을 거면 주는 밥이라도 잘 챙겨 먹어야지.


아버지 비행기는 멀리 날아가기라도 하죠.


노인 병원도 다를 게 뭐야. 이승에서 저승으로 날아가는 비행기 아닌가.


아버지 그렇게 치면 이 지구야 말로 이승에서 저승으로 날아가는 비행기게요.


노인 (웃으며) 뭐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야.


노인은 크게 한 수저 입안으로 떠 넣는다. 아버지는 그런 노인을 마땅치 않게 쳐다본다.


아버지 그나저나 영감님은 대체 몇 년이나 입원해 있는 거예요? 저희보다 더 오랫동안 이 병실에 있었잖아요. 크게 편찮으신데도 없으면서. 당뇨에 관절염이 조금 있을 뿐이잖아요. 그 연세에 그 정도면 건강한 편이구만.


노인 (쩝쩝거리며) 거 참 모르는 소리. 노인네들이 보통 어디서 죽는 줄 아쇼? 바로 앰뷸런스 안이야. 몇 초만 늦어도 목숨이 왔다 갔다 한단 말이야. 이 나이엔 겉으로는 건강해 보여도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이렇게 미리 미리 대비를 하고 있어야지.


아버지 아니, 여기서 지내는 게 산송장 같다면서요.


노인 산송장이 죽은 송장보다야 백 번 낫지.


노인은 신문을 들여다보며 왕성하게 밥을 먹는다.


아버지 (혼잣말로) 뭐가 저리 악착같은지. 80년이나 살았으면 이제 지칠 만도 한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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