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2는 2층 욕조로 다가가 의자에 앉는다. 남자1은 머리끝까지 물속으로 들어간다. 남자2가 그런 남자1을 바라본다.
남자2 이렇게 물속에 있을 때면 내 위에는 까마득한 고요가, 내 아래에는 흔들리는 지탱이 있습니다. 평화라는 게 이 세상에 실제로 있다면 아마도 이것일 겁니다.
침묵. 남자1이 물 밖으로 고개를 내민다.
남자2 하지만 얼마 못가 나는 물 위로 고개를 내밀고 맙니다. 사람의 몸은 70%가 물이라는 데 어째서 물속에서 단 1분도 견디기 힘든 걸까요. 70%가 물이라면 나머지 30%는 무엇인지 궁금해집니다. 그 30%만 없으면 나도 물이 될 수 있는 걸까요?
남자1이 물속에서 자위를 한다. 물이 위아래로 출렁이고 고개가 앞뒤로 젖혀진다. 그러나 격렬하거나 선정적이진 않다. 오히려 나른하고 기계적이며 무기력하기까지 하다. 남자2는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본다. 잠시 후, 남자1은 싱겁게 절정을 맞는다.
남자2 보통은 섹스를 불에 비유하곤 하지만 나는 오히려 물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라앉으면 가라앉는 데로 떠오르면 떠오르는 데로 이리저리 휩쓸리다가 결국 어디론가 떠내려가 버리고 마니까요. 하지만 사랑은 물과는 다릅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좀 더 탁하고 농도가 짙지요. 마치 젤리처럼, 깊이 가라앉지도 위로 떠오르지도 못한 채 어중간한 중간에 갇혀 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그 사람과 함께라면 그것도 좋다고 믿게 되는 거죠.
그 때 영주가 쟁반에 차 두 잔을 받쳐 들고 천천히 무대를 가로질러 지나간다. 남자2는 조금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하지만 그녀를 바라볼 뿐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영주는 2층 단 위에 단정하게 걸터앉아 쟁반을 옆에 내려놓는다.
남자2 영주는 내가 사랑했던 여자였습니다. 아마도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자일 겁니다. 그러고 보니 영주를 떠올리는 건 참 오랜만이네요. 그 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거든요. 우린 처음부터 잘 어울리는 한 쌍은 아니었습니다. 거의 공통점이 없었고 어떤 차이점은 첨예하기까지 했습니다. 싸우기도 참 많이 싸웠던 것 같습니다. 사귄지 반년 만에 헤어질 위기도 있었지만... 우리는 헤어지지 않았습니다.
남자1이 욕조 위에 달린 샤워기를 튼다. 샤워기에서 쏟아져 나온 물이 남자1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 남자1은 두 손과 고개를 들어 온 몸으로 물을 맞는다. 물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잔잔한 빗소리 같다.
남자2 우리는 둘 다 비 내리는 날을 좋아했습니다. 그것이 식성에서부터 영화 취향까지 낱낱이 달랐던 우리 두 사람의 유일한 공통점이었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우리는 우산 하나를 같이 쓰고 한강변이나 공원을 산책했습니다. 나는 비가 오는 원리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고 영주는 한가한 삶에 대해 예찬했습니다. 그러다가 둘 다 침묵에 잠길 때면 영주의 노랫소리가 나직하게 들려왔습니다. 그 때의 그 흥얼거림과 우산을 두드리던 빗소리가 아직도 내 귓가에 맴도는 듯합니다.
남자2가 샤워기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영주가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노래를 부른다기 보다는 독백처럼 중얼거리는 느낌이다.
영주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 일부러 그랬는지 잊어버렸는지 가방 안 깊숙이 넣어 두었다가 헤어지려고 할 때 그제서야 내게 주려고 쓴 편질 꺼냈네 집으로 돌아와서 천천히 펴 보니 예쁜 종이 위에 써내려간 글씨 한 줄 한 줄 또 한 줄 새기면서 나의 거짓 없는 마음을 띄웠네
영주가 노래를 멈춘다. 남자1이 샤워기를 끈다.
남자2 (조금 활기차게) 그것은 생기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때 나는 제법 많이 웃었고 확고한 의욕도 있었습니다. 힘을 내서 ‘무언가’를 극복하면 ‘무언가’를 이룰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희망에 부풀기도 했습니다. 모든 게 좋아 보였습니다. 나쁠 게 없었으니까요. 그렇게 영주와 만난 지 2년이 지났을 때, 나는 영주의 부모님 집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가벼운 저녁식사 자리처럼 가장하고 있었지만 실은 영주의 부모님과 정식으로 선을 보는 자리였습니다. 나는 긴장한 나머지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고지를 바로 눈앞에 둔 기분이었습니다. 저것만 넘어가면 그 뒤로는 내리막길을 굴러 떨어지는 바위처럼 인생은 저절로 나아가겠죠.
남자1이 큰 소리로 코를 푼다. 남자2는 1층 무대 앞으로 나온다.
남자2 마침내 약속한 날이 되자 나는 아침 일찍부터 분주했습니다. 몸을 깨끗이 씻고, 이발소에 가서 이발과 면도를 하고, 새로 산 양복을 차려입었습니다.
남자2가 바지 뒤춤에서 넥타이를 꺼내 목에 맨다.
남자2 택시 안에서도 옷차림을 점검하고 또 점검했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영주의 부모님께 잘 보여서 영주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충분히 영주를 책임질 수 있는 남자라는 걸 모두에게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멋지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기대에 마음이 한껏 부풀었습니다.
남자2는 초조하게 무대를 서성거린다.
남자2 하지만 영주의 부모님 집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영주의 집안이 넉넉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으리으리했습니다.
화면에 미로와도 같은 기하학적인 무늬가 빽빽하게 펼쳐진다. 남자2가 그 화면 속을 천천히 가로지른다.
남자2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내가 본 것은 방파제처럼 집을 둘러싸고 있는 높고 반들반들한 담장이었습니다. 높이가 5m 남짓 될법한 담장 너머로 보이는 건 담 위로 뻗어 나온 나뭇가지들뿐이었습니다. 담 쌓기를 좋아하는 우리나라의 정서를 감안하더라도 이건 지나치게 의기양양했습니다. 나는 경외심에 가득 차서 몇 번이나 벽을 만져보았습니다.
남자2가 관객을 등진 채 가상의 벽을 만져보는 것처럼 한 손을 앞으로 내민다.
남자2 막연히 꿈꿔왔던 나의 미래도 이런 것이었을까요? 나는 막다른 길에 다다른 9살 어린아이처럼 막막했습니다.
영주가 1층 무대로 다가와 남자2가 앞으로 내밀고 있던 손을 잡는다. 영상이 사라진다. 영주는 남자2의 손을 잡고 2층으로 이끈다. 남자2는 주저하면서 끌려간다. 두 사람은 2층 무대에 있는 단 위에 나란히 앉는다.
남자2 영주의 부모님은 친절하고 또 당당했습니다. 나는 그게 동시에 가능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얼떨떨했습니다. 나는 거울처럼 최대한 그들을 똑같이 흉내 내려고 애썼습니다.
영주가 남자2에게 찻잔을 건넨다. 그리고 자신도 찻잔을 들고 한 모금씩 마신다. 영주는 대화가 진행되는 틈틈이 소리 내어 웃는다.
남자2 벽 전체가 통유리로 돼있는 거실에서는 오후 햇살이 내리쬐는 정원이 한 눈에 보였습니다. 나는 소파에 앉아 무심코 창밖을 향해 고개를 돌리다가 그대로 숨을 멈췄습니다. 창문 밖에서 새파란 물이 사방으로 솟구쳐 오르고 있었습니다. 하얀 물보라가 높은 파도를 일으키며 유리창을 향해 달려들었습니다. 집을 통째로 휩쓸어 버릴 듯한 기세에 나는 그만 눈을 감았습니다.
남자2가 눈을 감는다. 화면에 직사각형의 파란색 물 영상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남자2가 눈을 뜬다.
남자2 눈을 떴을 때 나는 그게 수영장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성인 두 세 사람이 물장구치기에 충분한 크기였습니다. 기울어진 오후의 햇빛이 수면에 넘실거리는 푸른 비늘무늬를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눈이 시릴 정도로 선명한 빛깔에 나는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멍청해졌습니다. 내장 안쪽에서부터 무언가 꿈틀거리며 속을 메스껍게 했습니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그대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