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2 이것이 건강했던 엄마에 대한 내 마지막 기억입니다. 그로부터 3년 뒤, 그러니까 내가 초등학교 2학년 여름 방학 때, 엄마는 죽었습니다. 그 당시 나는 크게 충격을 받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엄마는 2년 가까이 앓아 누워있었고, 결국 엄마가 죽으리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으니까요. 엄마가 숨을 거두던 날은 푹푹 찌던 8월의 정오였습니다.
검은 정장 차림의 아버지가 하얀 천에 둘둘 말린 사람을 두 팔에 안고 들어와 2층 무대에 있는 단 위에 올려놓는다. 남자2는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본다. 잠시 침묵. 아버지가 남자2에게 다가와 그의 손을 잡고 2층으로 이끈다. 두 사람은 하얀 천에 둘둘 말린 사람 곁에 서서 그것을 내려다본다.
남자2 엄마가 죽는 순간은 뭐라 말할 수 없이 이상야릇했습니다. 무언가 이상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눈에 띌만한 점이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서늘한 바람이 속눈썹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서른여섯 살의 인생이, 2년간의 투병 생활이, 할딱이던 숨소리가, 찡그리던 코끝이, 그렇게 단 몇 초 사이에 스러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남자1 8월 23일 11시 47분, 운명하셨습니다.
남자2 그 순간 나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그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물을 마시기 위해 달려갔던 것 같습니다.
남자2가 욕조로 달려가 수도꼭지를 틀고 물을 마신다. 아버지는 하얀 천에 둘둘 말린 사람을 안고 무대 밖으로 나간다. 잠시 후 아버지는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작은 나무 상자를 품에 안고 돌아온다. 남자2는 아버지 손에 들린 나무 상자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남자2 이 상자 안에 엄마가 들어있다는 건 알았지만, 정확히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상자가 지나치게 작다는 것이 이상했습니다. (침묵) 유골은 유언대로 엄마 고향에 있는 호수에 뿌리기로 했습니다. 엄마가 어린 시절 즐겨 찾곤 했다는 호수였습니다. 멱을 감고, 수영도 하고, 나무 그늘 밑에서 낮잠을 자곤 했답니다.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깊고 넓은 호수였습니다.
아버지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간다. 남자2는 한 걸음 뒤에서 아버지를 뒤따른다. 두 사람은 1층과 2층 무대를 잇는 경사로 중간에 선다.
남자2 아버지와 나는 작은 나룻배를 타고 호수 한가운데로 나아갔습니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이었습니다. 사방은 조용했고, 호수는 거대한 거울처럼 모든 것을 남김없이 비추고 있었습니다. 세상을 이리저리 뒤집어도 말이 될 정도였어요. 나는 거울 속에 꼼짝없이 갇힌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남자1 많은 사람들이 거울 속에서 익사한다.
남자2 어느 책에서인가 이런 말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상한 말이에요, 그렇죠?
아버지가 나무 상자를 연다. 실제로는 텅 비어있다.
남자2 상자 속에는 하얀색 가루가 가득 들어있었습니다. 너무나 하얀색이었습니다. 엄마가 죽었다는 사실보다 엄마가 이토록 고운 가루가 되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습니다. 별안간 발작과도 같은 갈증이 내 가슴을 내리쳤습니다. 목이 말랐습니다. 눈과 혀가 부풀어 오르고 숨이 막혔습니다. 그러나 배에는 마실 물이라곤 조금도 없었습니다.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표정이 너무 무서워서 입을 열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두 손에 상자를 들고 말없이 호수 너머의 집들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이제 엄마를 보내 줘야겠다.
남자2 어디로?
아버지 저 시원한 물속으로. 불 속은 너무 뜨거웠을 테니까.
아버지는 하얀 장갑을 낀 손끝으로 가상의 가루를 집어서 공중에 뿌린다.
아버지 자, 너도 아빠처럼 해 봐.
하지만 남자2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는다. 그저 갈증을 참기 위해 애쓰며 가상의 가루가 뿌려지는 1층 무대 바닥을 노려보고 있다. 아버지는 계속 가루를 집어 주변에 뿌린다.
남자2 가루는 호수 위에 점점이 내려앉더니 나룻배 주위로 하얀 마블링 무늬를 만들어냈습니다. 그것은 역겨웠고 내 갈증을 더욱 부추겼습니다. 아버지가 뿌리는 그 텁텁한 가루가 내 입 속으로 한 움큼씩 들어오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그대로 엉엉 울고 싶었지만 눈물을 만들어낼 물기조차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나는 완전히 녹초가 되었고, 하얀 가루는 끝도 없이 떨어져 내렸습니다. 정말이지, 사람의 몸에서는 얼마나 많은 가루가 만들어 지던지.
남자1이 욕조에서 물을 첨벙거린다.
남자2 나는 그대로 호수에 뛰어들었습니다.
남자2가 경사로에서 1층 무대로 뛰어내린다. 화면이 일렁이며 물 속 영상이 비친다. 남자2는 영상 한가운데 서 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남자2 세상이 온통 새파래지더니 나는 어느새 깊고 차가운 물속에 있었습니다. 그 출렁이는 고요. 세상 바깥으로 멀리 튕겨져 나온 것 같아 나는 안심이 됐습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먹먹하게 들렸지만 그런 건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물속이 이토록 아름답고 또 아름다웠으니까요. 메마르고 거칠고 소란스러운 바깥세상이 참으로 부당하고 한심하게 여겨졌습니다. 이곳은 얼마나 완전한지. 이대로 푸른 물속으로 영원히 가라앉을 수 있다면……. 하지만 문득 아래쪽을 내려다 본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습니다.
화면의 물 속 영상이 어두워진다.
남자2 새까만 어둠이 발밑으로 끝없이 이어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끝도 바닥도 기약도 없는 영원한 어둠이었습니다. 물속이 아니었다면 나는 비명을 지르고 말았을 겁니다. 허둥지둥 고개를 들어 보니 머리 위로 파란 하늘과 반짝이는 햇빛, 갖가지 그림자들이 뒤섞여 어지러운 무늬를 만들어내고 있었습니다. (남자1을 향해) 아, 그리고 그 사이로 누군가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2층 무대에 있는 남자1과 1층 무대에 있는 남자2의 눈이 마주친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본다.
남자2 괴상하게도 그것은 내 얼굴이었습니다. 건너편 세상의 내가 나룻배에 기대앉아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찡그리고, 쩔쩔매고, 아둔하고, 뻔하디 뻔한 얼굴. 어째서 저 사람이 나라는 거지? 왜 내가 저기에 있는 거지? 나는 그 무엇도 원한 적이 없었는데. 그때 무언가 내 발을 움켜잡고 아래로 끌어 내리는 바람에 나는 번쩍 눈을 떴습니다. 엄마일까? 순간 그런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하지만 아래를 내려다 볼 용기는 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소름이 끼쳐서 그것을 떨쳐내려고 발버둥을 치며 머리 위로 힘껏 손을 뻗었습니다.
남자2가 남자1을 향해 손을 뻗는다. 남자1은 그런 남자2를 묵묵히 내려다본다. 그 때 아버지가 뛰어들어 남자2를 화면 밖으로 끌고 나온다. 영상이 사라진다. 아버지가 남자2의 뺨을 힘껏 때린다. 남자2는 바닥에 쓰러진다.
남자2 (어린애처럼 칭얼대며) 아빠, 잘못했어요. 난 그냥 목이 말랐던 것뿐이에요.
아버지는 아무 말도 없이 나무 상자를 들고 천천히 퇴장한다. 혼자 남은 남자2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착하게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다.
남자2 그 뒤, 물에 집착했던 내 버릇은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더 이상 갈증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아예 다른 사람이 됐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습니다.
남자1 학교생활에 충실했습니다.
남자2 친구들과도 잘 지내려고 노력했어요.
남자1 책을 읽으면 두 장으로 요약했습니다.
남자2 노숙자가 다가오면 숨을 참았습니다.
남자1 6개 회사에 입사원서를 냈습니다.
남자2 무례한 사람에게는 무례하게 굴었습니다.
남자1 건강보험을 2개 들었습니다.
남자2 신용카드는 3개를 만들었구요.
남자1 1년 후의 계획에 대해서 떠들고
남자2 실수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 척 했습니다.
남자1 거저 주어지는 건 없더군요.
남자2 시간은 늘 부족해요.
남자1 무슨 일이든 더 잘해야 합니다.
남자2 제대로 산다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습니다. 뻔히 보이는 잘 닦여진 길이 있어서 한발한발 앞으로 걸어가기만 하면 됐으니까요. 좀 고단하기는 해도 어리둥절하거나 헤맬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마음은 편했습니다. 변한 내 모습에 아버지도 무척 기뻐했기 때문에 나는 만족스러웠습니다. 그렇게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군대를 지나 취직할 때까지 내 인생은 별 문제없이 흘러갔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