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아버지는 각자 자신의 소일거리를 한다. 서로 관심도 대화도 없는 무심한 장면이 잠시 이어진다. 그동안 풍경이 점차 어두워지면서 창밖에 노을이 진다. 아버지는 고개를 들어 한동안 노을을 바라본다. 해가 지고 영상이 사라지자 아버지가 침대 머리맡의 전등불을 켠다. 그 때 하얀색 마스크를 쓴 소년이 손에 커다란 가방과 환자복을 들고 병실로 들어온다. 그리고 지훈과 노인 사이에 있는 침대에 짐을 풀어 놓는다. 노인은 하던 일을 멈추고 소년 주변을 기웃거린다. 마스크 너머로 보이는 소년의 얼굴은 병색으로 핼쑥하다. 소년은 환자복으로 갈아입은 뒤 자신의 침대로 올라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다.
노인 얘야, 새로 왔으면 어른들한테 인사부터 해야지. 앞으로 한 방에서 지낼 텐데 서로 인사는 해야 될 거 아니냐.
노인이 계속 말을 붙여보려 하지만 소년은 이불 속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 노인은 포기하고 잠자리에 들기 위해 침대에 눕는다. 아버지가 전등불을 끈다. 암전. 신호음과 기계음이 규칙적으로 들려온다.
잠시 후 아버지가 전등불을 켜고 지훈의 상태를 살피다가 무심코 건너편 소년의 침대를 바라보고는 깜짝 놀란다. 마스크를 쓴 소년이 침대에 걸터앉아 지훈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
아버지 뭘 그렇게 보는 거냐?
소년 (마스크를 턱 밑으로 끌어내리며) 거기 누워있는 형이 아저씨 아들이에요?
아버지 어, 그래.
소년 어디가 아픈 거예요?
아버지 그래. 그냥, 좀.
소년 저도 알아요. 뇌사 라죠?
아버지 (잠시 소년을 빤히 바라보다가) 그러는 넌 어디가 아파서 온 거냐.
소년 심장이요.
아버지 어린애가 어쩌다가…….
소년 뭐어, 괜찮아요. 새 심장을 이식받으면 금방 건강해진대요.
아버지 그래?
소년 그리고 그렇게 어리지도 않구요.
아버지 몇 살인데?
소년 16살이요.
아버지 고작해야 12살 정도로 보이는 데…….
소년 (지훈을 가리키며) 거기 형은 몇 살인데요?
아버지 스물 하나. 아니, 아니지, 스물 셋이지.
소년 아들 나이도 모르세요?
아버지 (당황한다.) 아니, 그게 아니라…….
소년 스물 하나에요, 스물 셋이에요?
아버지 스물 셋, 스물 셋이야. 스물한 살 때 사고를 당하고 2년이 지났으니까.
소년 그럼 지금도 스물 하나죠.
아버지 (침묵) 그런데 네 부모님은 어디계시냐? 왜 혼자야?
소년 집에 계세요. 아니, 그러니까 전주에 계시다구요. 한 달에 한 번씩 올라오실 거예요. 편의점을 하느라 바쁘거든요.
아버지 그래?
소년 상관없어요. 전 어린애가 아니니까.
아버지 그래.
아버지는 수건으로 지훈의 얼굴을 정성스럽게 닦아준다. 소년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소년 아저씨.
아버지 어?
소년 제 이름 알려드릴까요?
아버지 뭐, 그래라.
소년 강성민이에요.
그 때 날이 환하게 밝아지면서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성민은 마스크를 고쳐 쓴 뒤 병실을 나간다. 노인이 기지개를 펴며 아버지에게 다가온다.
노인 둘이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해?
아버지 재미는요, 무슨.
노인 뭘, 한참이나 수근대더구만. 쟤는 나한테는 아는 척도 안 해. 뭘 물어봐도 대꾸를 해야 말이지. 난 아직 쟤 이름도 모른다니까.
아버지 강성민이래요.
노인 강성민? 하긴, 내가 쟤 이름은 알아서 뭐하겠어?
노인이 웃자 아버지도 따라 웃는다.
노인 (성민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그런데 쟤 얘기 들었어?
아버지 무슨 얘기요?
노인 애가 아주 파란만장하더라고. 병원에 사연 없는 사람 없다지만 어린 게 좀 안됐어. 태어날 때부터 백혈병에 걸려서 일평생을 병원에서 살았대요.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긴 모양이야.
아버지 그래요? 심장병이라고 하던데?
노인 아, 얘기를 끝까지 들어보라니까. 어찌어찌 고생고생해서 몇 년 전에 백혈병은 겨우 나았는데, 운이 지지리도 없는 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팔자가 그렇게 생겨먹은 건지, 백혈병에 썼던 독한 약 때문에 그만 심장이 고장나버렸대. 못쓰게 돼 버린 거지. (혀를 찬다.)
아버지 혹 떼러 갔다가 혹 붙인 격이네.
노인 그러게 말이야. 그게 다 의사 놈들이 하는 짓거리지. 백혈병 환자는 심장병 환자로 만들어놓고, 심장병 환자는 백혈병 환자로 만들어 놓고. 이 병이 나으면 다른 병, 그게 나으면 더 지독한 병. 결국 병원에서 꼼짝없이 죽을 때까지 말이요.
아버지 할 수 없죠. 그래도 그들은 의사고, 그래도 우리는 환자니까.
노인 의사 놈들도 결국 환자가 돼.
아버지 그 때는 그들도 똑같이 말하겠죠. 그래도 그들은 의사고, 그래도 우리는 환자라고.
노인 그래, 그 말이 맞아. 어쩌겠나. 환자인 우리가 뭘 어쩌겠어. 우리를 살리는 것도 그 손이고, 우리를 죽이는 것도 그 손인데. 어쨌거나 그 손 곁에 딱 붙어 있어야 안심이 되거든. 그거 아쇼? 사실 난 그 손을 존경해. 암, 그렇고말고. 소독약을 향수처럼 뿌린 그 하얗고 부드러운 손.
아버지 그리고 포동포동하죠.
노인 어쨌거나 성민이인가 하는 얘도 그동안 심장병을 고치려고 안 써본 방법이 없는 모양이야. 좋다는 병원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고, 수술도 몇 번이나 하고, 새로 나왔다는 약도 복용해 보고, 그런데 아무 소용이 없었던 거지. 이제는 심장 이식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하데. 근데 그게 어디 쉽겠어? 심장이 나무에서 주렁주렁 열리는 것도 아니고. (혀를 찬다.)
노인이 고개를 흔들면서 자신의 침대로 돌아간다.
아버지 (냉담하게) 안됐네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