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손톱이 자란다 (6)

by 곡도




2막



어둠 속에서 신호음과 기계음이 규칙적으로 들려온다. 잠시 후, 흐릿한 조명이 아버지를 비춘다. 아버지는 간이침대 위에서 잠들어 있다. 인물상들이 나타난다.


인물상1 아버지.


인물상2 아버지.


인물상3 아버지.


아버지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에 일어나 앉는다.


아버지 그래.


인물상1,2,3 아버지.


아버지 그래. 지훈이냐.


인물상1 오늘 유치원으로 데리러 올 거예요?


아버지 그래, 있다가 아빠가 데리러 갈게. 약속해.


인물상2 군대 생활 열심히 하고 올게요. 걱정 마세요.


아버지 걱정 안한다. 전화해라.


인물상3 저 책가방 사주 세요. 누르면 불 들어오는 거요. 우리 학교 남자애들은 다 저거 매요.


아버지 지금 쓰고 있는 가방도 산지 얼마 안됐잖아. 내년에 사줄게.


인물상1 감기약 사왔어요. 아직도 기침이 심하세요?


아버지 약 같은 건 소용없어. 며칠 지나면 저절로 나을 걸.


인물상2 엄마는 앞으로 우리하고 같이 안 살아요?


아버지 같이 안살아. 엄마는 나쁜 년이니까.


인물상3 저 사귀는 여자 생겼어요.


아버지 그래, 예쁘냐?


인물상들의 말이 점점 빨라진다. 아버지는 그 속도를 쫓아가지 못한다.


인물상1 학교에서 담배 피다 걸렸어요. 아버지 모시고 오래요.


아버지 뭐야? 넌 왜 하는 일마다 그 모양이…….


인물상2 아빠, 나 무릎에 피나요. 민철이가 밀어서 층계에서 넘어졌어요.


아버지 민철이 그 새끼 어디 있냐. 아빠가 혼쭐을…….


인물상3 엄마 한 번 만나면 안돼요?


아버지 안 돼. 그런 몹쓸 여자는 뭐 하러…….


인물상1 아버지, 저 취직했어요. 다음 주부터 출근하래요.


아버지 그러냐? 그럼 새 양복부터 사…….


인물상2 제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참견 좀 하지 마세요.


아버지 나는 그냥 걱정이…….


인물상3 날도 더운데 같이 목욕하러 가요.


아버지 그럼 나는…….


인물상1 (앞에 말이 끝나기도 전에 뒷말과 맞물리며) 아빠, 내가 그린 그림이에요. 이게 아빠고, 이게 엄마고, 이게 나에요.


인물상2 (앞에 말이 끝나기도 전에 뒷말과 맞물리며) 가만 보면 난 입맛이 아버지를 닮았나 봐요.


인물상3 (앞에 말이 끝나기도 전에 뒷말과 맞물리며) 이번 휴가 때는 같이 제주도라도 갈까요?


아버지 나는…….


인물상1,2,3 (각각의 말들을 동시에 겹쳐서 말한다.) 아버지, 뱃살 좀 빼셔야겠어요. 다이어트 좀 하세요. / 나도 보이스카우트에 들어가면 안돼요, 아빠? / 그건 다 아버지 잘못이에요. 왜 인정을 안 하세요?


빨라진 말들이 뒤엉켜 뒤죽박죽되다가 인물상들이 사라지며 점차 조용해진다. 아버지는 그대로 멍하니 앉아 있는다. 잠시 후, 벽에 나타난 창문 밖으로 새벽 풍경이 보인다. 아버지는 정신을 차리고 지훈의 침대를 바라보다가 깜짝 놀란다. 마스크를 쓴 성민이 지훈의 침대 곁에 앉아 지훈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성민은 전보다 병색이 더 짙어진 얼굴이다.


아버지 너 거기서 뭐 하는 거야?


성민 (침묵)


아버지 거기서 뭘 하는 거냐고.


성민 (마스크를 턱 밑으로 끌어내리며) 아무 것도 안 해요. 그냥 보는 거예요.


아버지 보다니, 뭘?


성민 글쎄요. 모르겠어요, 저도. 내가 뭘 보고 있는지.


아버지 뭐어?


성민 좀 보면 안돼요? 이 형은 별로 기분 나빠 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아버지 저리 가지 못해?


성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침대로 돌아가다가 창문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창밖의 아침 풍경은 가을의 끝자락을 보여준다. 나무들은 앙상해지고, 단풍들도 거의 다 떨어져서 얼마 남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불을 걷어내고 지훈의 몸을 닦아주기 시작한다.


성민 아저씨.


아버지 (침묵)


성민 가을도 이제 끝났나봐요.


아버지 (침묵)


성민 곧 단풍잎도 다 떨어지겠죠.


아버지 길거리가 또 쓰레기 천지가 될 테지.


성민 그래도 내년이면 또 새싹이 나겠죠?


아버지 그렇겠지.


성민 또 꽃이 피구요?


아버지 그래.


성민 난 화가 나요.


아버지 화가 나?


성민 저 앙상해진 나무가 다시 내년이면 새싹이 나고 감쪽같이 꽃을 피울 거라고 생각하니 화가 나요. 세상이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서두르고 있다고 생각하면 참을 수가 없어요. 모든 게 그렇게 뒤에 남겨지고, 사실은 아무 것도 반복되지 않아요. 끝없이 새로운 봄, 끝없이 새로운 겨울. 차라리 다시는 봄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영원히 얼어붙은 겨울이었으면 좋겠어요. 모든 사람들이 원인도 모른 채 고통 받았으면 좋겠어요.


아버지 사람들은 이미 그러고 있어.


성민 충분하지 않아요. 전혀 충분하지 않아요.


아버지 시건방진 소리 그만 해. 세상 사람들이 다 자살이라도 하길 바라는 거냐? 그래서 네가 마지막에 죽는 사람이라도 되고 싶은 거야?


성민 그럴지도 모르죠. 그렇지만 어쨌거나 내가 마지막에 죽는 사람은 아닐 거예요. 아저씨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자살 같은 건 하지 않을 테니까요. 거기 형이 있는 동안은요.


아버지 그래, 그건 맞다. 지훈이를 두고 그런 짓을 하진 않을 거다.


성민 형이 아저씨의 목숨 줄인 거네요?


아버지 그렇지. 그런 거지.


성민 그럼, 형은 아저씨를 위해 여기 있는 거예요?


아버지 뭐?


성민 둘 중에, 누가 환자고, 누가 보호자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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