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할 말을 잃는다. 그 때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노인 (짜증을 내며) 에이, 도대체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구만. 이제는 꼭두새벽부터 쌍으로 떠들어대는 거야?
아버지 꼭두새벽은 아니에요. 해가 중천에 떴어요. 일어날 때가 됐어요.
노인 난 좀 평화롭게 잠에서 깨고 싶단 말요. 귀를 틀어막으면서 불쾌한 기분으로 일어나는 게 아니라.
성민 이것보다 더 평화롭게요? 그럼 여긴 진짜 무덤 속 같을 걸요.
노인 (혀를 차며) 무덤 속이 평화로운 건 땅 속이기 때문이 아니라 독방을 쓰기 때문일 거야. 나도 1인실로 옮기던가 해야지, 원.
아버지 마음대로 하세요. 말리는 사람 없으니까. 어차피 가봤자 하루도 못 견디고 돌아올 걸요. 입이 근질근질 해서 말이에요. 말을 해야 살아있는 줄 아시잖아요.
노인 (웃으며) 뭐, 그거야 그렇지.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펴다가 창문을 바라본다.
노인 오늘도 날씨가 기가 막히게 좋구만. 하늘은 높고, 햇살은 따듯하고. 이렇게 보고 있자니 꼭 벽에 걸어놓은 그림 액자 같아. 하지만 밖에 나가면 벌써 쌀쌀한 초겨울 바람이 불고 있겠지. (성민을 쳐다보며) 아 참, 그런데 오늘 너희 부모님 오시는 날 아니냐?
성민 오늘은 못 오신대요. 일이 바쁘셔서.
노인 아, 그래? 뭐, 많이 바쁘신 모양이지?
성민 (침묵)
아버지 바쁜 게 아니라 질려서 안 오시는 거겠지.
성민 (침묵)
아버지 넌 부모님만 오시면 화를 내잖냐. 아침에 화가 난 채로 잠에서 깨어나서 부모님이 병실로 들어오셨을 때는 이미 머리끝까지 화가 나있잖아. 저번 달에 오셨을 때도 한바탕 난리가 났었지. 내 병원비가 그렇게 아깝냐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날뛰는 바람에 어머니는 눈물까지 보이시더라. 네 멱살을 잡은 아버지를 간호사들이 뜯어 말리고, 옆 병실 환자들이 구경을 오고, 참 대단했지.
성민 맞아요. 우리 가족은 엉망진창이에요.
노인 가족이란 원래 엉망진창이야. 케케묵은 이야기지. 어쨌거나 네 부모님이 올 때 마다 백숙이나 갈비 같은 걸 싸오셔서 얻어먹곤 했는데, 안 오신다니 거 아쉽네. 에이, 24일만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말이야.
아버지 (놀라며) 24일? 아니 그럼, 오늘이 24일 이에요? 11월 24일?
노인 그렇지. 11월 24일이지. 왜 그래?
아버지 오늘이, 지훈이 생일이에요.
노인 그래? 그런데 왜 표정이 어두워?
아버지 까맣게 잊고 있었어요. 이제껏 한 번도 지훈이 생일을 잊은 적이 없는데.
노인 난 또 뭐라고. 원래 병원에 오래 있으면 정신이 흐려지는 법이야.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고, 내일은 또 어제 같지. 제자리에서 낮과 밤만 계속 뒤집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
아버지 그래도 잊어버릴 게 따로 있지.
노인 오늘 안에 기억해 냈으면 된 거지 뭘 그래. 그럼 이제 지훈이 나이가 몇 인가?
성민 스물 하나에요. 스물 하나.
아버지 스물 넷이에요. 스물 넷.
성민과 아버지가 잠시 서로를 쳐다본다.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노인 어디가?
아버지 밑에 매점에 가서 뭐라도 좀 사와야 겠어요. 그렇지, 귤, 귤을 사야겠어요. 지훈이가 귤을 좋아했거든요.
노인 유난스럽기는. 당사자는 먹지도 못할 텐데 뭐 하러?
아버지 그래도 생일은 생일이잖아요.
아버지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병실을 나간다.
노인 (혀를 차며) 생일상이 아니라 제사상을 차리러 가는 사람 같네.
성민 사실 제사상이랑 다를 것도 없잖아요?
노인 (웃으며) 뭐,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
성민 제사상의 사진은 웃기라도 하죠.
노인 웃음은 고사하고 눈이라도 한 번 뜬다면 쟤 아버지는 소원이 없을 거다.
성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노인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성민 형은 여기 없어요. 아무도 형이 어디 있는지 몰라요. 실종 신고라도 해야 될 판이에요.
노인 벌써 오래 전에 훨훨 삼도천을 건너 저승에 도착했어야 하는 건데, 중간에 길을 잃은 게지.
성민 형은 속이 텅 비었어요.
노인 삼도천 위를 둥둥 떠다니고 있나.
성민 아니, 한 치의 틈도 없이 꽉 차버렸어요.
노인 삼도천 밑으로 가라앉았나.
성민 죽지 않아요. 살아있지 않으니까요.
노인 물살에 휩쓸려 가버렸는지도 몰라.
성민 이 형은 이제 고장 난 물건이나 다름없어요.
노인 거 참, 아무리 그래도 말조심해라. 설사 송장이라고 해도 사람을 물건 취급 하는 게 아니야.
성민 송장보다 더 나빠요. 썩어버리지도 않잖아요.
노인 그래도 그렇지…….
성민 이곳에 있어요. 이곳에 없어요. 텅 비었어요. 꽉 차있어요. 죽지 않아요. 살아있지 않아요. 뻔뻔해요. 이게 사물의 본성이에요. 이 형도 마찬가지예요. 이곳에 있어요. 이곳에 없어요. 텅 비었어요. 꽉 차있어요. 죽지 않아요. 살아있지 않아요. 뻔뻔해요. 이 형이야말로 사물 중의 사물이에요. 사물들의 왕국에서 왕 노릇이라도 할 수 있을 걸요.
노인 대체 그게 다 무슨 소리냐?
성민 글쎄요. 누가 알겠어요?
성민이 말없이 지훈의 얼굴을 노려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