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손톱이 자란다 (8)

by 곡도



노인 그런데 너, 왜 그런 눈으로 지훈이를 쳐다보는 거냐?


성민 뭐가요?


노인 너 요새 계속 그런 눈으로 지훈이를 보고 있잖아. 하루 종일 말이다.


성민 제 눈이 어때서요?


노인 꼭 잡아먹을 것 같은 눈이야.


성민 (웃음을 터트리며) 그거 좋은 생각인데요? 안될 거 없죠. 안될 거 없어요.


노인 뭐라고?


성민 뭘 놀라세요? 한 번 생각해보세요. 그러니까, 그래요, 우리가 이 병실에 갇혀있다고 가정해보자구요. 아무런 기약도 희망도 없이요.


노인 아니, 도대체 왜?


성민 아유, 지진이나 홍수나 화산폭발이나 뭐 그딴 이유로요.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그런 일 때문에요. 언제나 그런 일들이 벌어지잖아요.


노인 그거야 그렇지.


성민 자, 그럼 어떻게 될까요? 하루 정도는 괜찮겠죠. 늘 그래왔듯이 이곳은 죽은 듯이 평화로울 거예요. 하지만 곧 배가 고파지겠죠. 참아보려 하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거예요. 그건 참을 수 있는 종류의 고통이 아니니까요. 그럼 우리는 주위를 둘러보겠죠. 방법을 찾아내겠죠. 서로 눈이 마주치고 서로 얼굴을 붉힐 거예요. 우린 모두 똑같은 생각을 할 거예요. 내기를 해도 좋아요. 우린 모두 똑같이 입맛을 다실 거예요.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죠. 생명에게는 반드시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니까. 그럼 누구를 희생해야 할까요? 여기서 가장 나이가 많은 할아버지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죠. 일리가 있어요. 일리가 있어. 하지만, 저라면 이 형을 선택할 거예요. 동의하시죠?


노인 아니, 난 그게…….


성민 점잔 뺄 생각 마세요. 생존은 치열하고 치사하죠. 먼저 달려들어서 움켜쥐는 사람이 이기는 거예요. 사람들이 입맛을 다시며 할아버지와 저 형을 번갈아 바라볼 때, 할아버지는 설사 송장이라고 해도 사람을 물건 취급 하는 게 아니라면서 저 형을 옹호할 건가요?


노인 그거야…….


성민 저 형을 먹어치워도 아무도 우릴 비난하지 못해요. 다른 선택이 없으니까요. 죽을 수는 없으니까요.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어요. 사람들은 그들을 용서해 줬어요. 교황마저도 그들을 용서해 줬어요. 그러니 우리도 용서 받을 거예요. 살아있는 사람들이 살아있는 우리 편을 들어줄 거예요.


노인 하지만…….


성민 (지훈을 노려보며) 왜 생명이 사물 앞에서 비굴해야 하죠?


노인 난, 난 도대체…….


성민 좋아요. 다 좋아요. 우리 이런 시시한 대화는 그만 해요. 지금은 이 형 생일파티를 열어야 되니까요.


노인 생일파티라고?


성민 이 형이 태어난 기쁜 날이잖아요. 모두 함께 축하를 해야죠.


노인 아서라. 아픈 사람 생일에는 잔치를 하는 게 아니야.


성민 우리도 아픈 사람들인데 뭐 어때요?


성민은 노인이 읽다가 놓아둔 신문지를 말아 고깔모자를 만들어 지훈의 머리에 씌워주고, 병실을 뒤져서 찾아낸 여러 가지 잡동사니들로 지훈을 알록달록하게 장식한다. 지훈은 화려하지만 조잡한 크리스마스트리 같은 모습이 된다. 마지막으로 성민은 자신의 턱에 걸쳐있던 마스크를 벗어서 팬으로 반원의 둥그런 선(웃는 입모양)을 그려 넣어 그것을 지훈의 입에 씌워준다.


성민 자, 보세요. 사물의 왕에게 걸맞은 모습이 아닌가요?


노인 이게 무슨 짓이냐. 아이고, 큰일이네. 이러면 안 돼. 지훈이 애비가 오면 불같이 화를 낼 거야.

노인이 말리려 하지만 성민이 가로막는다.


성민 그거 잘됐네요. 그 아저씨는 좀 더 화를 내야 돼요. 우리들도 좀 더 화를 내야 돼요. 사람들 모두 좀 더 화를 내야 돼요. 모두들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살고 당연하다는 듯이 죽고 있어요.


성민은 생일축하 노래를 고래고래 부른다. 그 때 아버지가 손에 봉투를 들고 들어오다가 눈앞에 광경을 보더니 할 말을 잃고 그 자리에 멈추어 선다. 성민은 계속 생일축하 노래를 부르며 주변을 돌아다닌다.


성민 (아버지를 향해) 아, 여기 우리 주인공이 오셨네. 어때요. 마음에 드세요?


아버지 이게 뭐야?


성민 생일파티를 하는 거예요. 형 생일을 축하하고 있어요.


아버지 생일파티?


노인 난 말리려고 했어. 그런데 어린놈이 말을 들어 먹어야 말이지.


성민 왜요? 아들이 태어난 게 기쁘지 않으세요? 축하해야 될 일 아니에요? 좀 웃어보세요. 기쁜 날이잖아요. 기쁜 날에는 파티를 해야죠. 이 형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파티가 필요해요. 내 생일도 오늘이라고 하죠, 뭐. 어때요? 살아있는 매일매일이 생일이잖아요.


아버지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성민 이제부터 난 매일 생일파티를 할거예요. 그럼 나는 하루에 한 살씩 나이를 먹겠죠. 어차피 병원에서는 하루나 일 년이나 마찬가지니까 상관없잖아요? 그럼 난 두 달 만에 늙어 죽을 수 있을 거예요. 아니, 요즘은 100세 시대니까 세 달은 갈지도 몰라요. 한 달 후에는 저 형 나이가 됐다가, 두 달 후에는 아저씨 나이가 됐다가, 세 달 후에는 여기 할아버지 나이가 되는 거예요. 와, 정말 멋진 인생이에요, 그렇죠?


아버지 그만 하지 못해?


성민 하지만, 난 그렇게 두진 않을 거예요.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우리 엄마 아빠가 원하는 대로, 그렇게 두지 않을 거라구요.


노인 제 정신이 아니야.


성민 맞아요. 제 정신이 아니에요. 우리 모두 제 정신이 아니에요. 그래서 유머 감각이 필요한 거예요. 마지막 잎새 같은 유머감각이요. 아세요? 마지막 잎새는 살아있는 잎이 아니에요. 그림이에요. 가짜에요. 사물이에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의미가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소용이 있어요. 모르시겠어요? 이 형이 바로 그 마지막 잎새에요. 모르시겠냐구요. 보세요. 형을 보세요. 이 미소를 보세요. 나를 이해하고 있잖아요. 모든 걸 이해하고 있잖아요. 살아 있는데도 죽어가는 나와, 죽었는데도 살아가는 형 사이에는 얼마나 많은 공통점이 있는지……. 만약 내가 여자였다면 형과 결혼이라도 했을 거예요. 그래요, 우린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됐을 거예요. 우리 사이에서는 아이들도 태어났을 거예요. 의자, 침대, 창문, 병, 수건, 휴지, 신발, 전등, 베개……. 산적도 죽은 적도 없는 물건들.


성민은 다시 생일 축하 노래를 고래고래 부르다가 탈진해서 쓰러진다. 노인이 성민을 부축해서 침대에 눕힌다. 성민은 침대 위에 축 늘어진다. 아버지는 말없이 지훈의 몸에서 마스크와 장식들을 떼어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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