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 휴우, 잠들었어. 열이 있는 것 같아. 그렇게 날뛰었으니 무리도 아니지. 아니면 열이 있어서 그렇게 날뛰었는지도 몰라.
아버지 네에.
노인 시한부 환자들이 죽기 직전에 난리를 치는 걸 여러 번 본적이 있지만, 이런 건 또 처음이야. 저 조그만 머릿속이 어떤 생각으로 꽉 차있는 것 같아. 그게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거지.
아버지 그럴 지두요.
노인 그런데 사실 그까짓 건 별거 아냐. 그저 확 끓어 넘치는 거품이야.
아버지 네.
노인 내가 염려하는 건 열기야. 생각들을 끓어오르게 하는 그 강렬한 삶의 열기. 곧 죽을 사람에겐 너무 과도하지.
아버지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청소를 계속한다. 노인도 청소를 돕는다. 청소를 하는 동안 창밖에 해가 지고 무대가 어두워진다. 아버지는 전등불을 켜고, 노인은 자신의 침대로 돌아가 자리에 눕는다. 아버지는 지훈의 침대 곁에 앉아 귤을 까먹는다. 벽에 인물상 셋이 나타나 낮고 조용히 노래를 부른다. 조금 전 성민이가 불렀던 생일축하 노래지만 느리고 우울한 곡조로 가사는 없다. 잠시 후 노래가 잦아들면서 인물상들이 사라진다. 암전.
창문 영상에 날이 밝아온다. 아버지는 의자에 앉은 채 잠이 들었다. 창밖은 단풍이 다 떨어져 나간 (눈이 내리지 않은) 겨울 풍경이다. 창문 왼쪽 근경에도 나뭇잎이 없는 앙상한 가지가 뻗어있다. 성민이 침대에 앉아 지훈을 바라보고 있다. 성민의 얼굴은 죽은 사람처럼 핏기가 없고 어둡다. 잠자리에서 일어난 노인이 성민을 발견하고는 말을 걸려다가 그만두고 아버지에게 다가간다.
노인 이 봐. 이거 봐. 일어나. 아침이야. 오늘은 웬일로 늦잠을 다 자나? 사방이 너무 조용한 바람에 소스라쳐서 잠에서 깼다니까?
아버지 새벽에 잠깐 일어났다가 그만 깜빡 잠들었나 봐요. (몸을 부르르 떤다.)
노인 이제 겨울이야. 날씨가 아주 선뜩해졌어. 나뭇잎도 다 떨어지고. (두리번거리며) 오늘은 어째 세상이 아주 조용하구만.
아버지 네. 꼭 꿈속처럼 적막하네요.
노인 (혀를 차며) 오늘은 집에 좀 갔다 오지 그래? 병원에만 틀어박혀 있은 지 꽤 됐잖아. 가끔 바람도 쐬고 해야지.
아버지 아니에요. 뭐 하러 나가요. 필요한 건 여기 다 있는데요.
노인 아, 그야 필요한 건 여기 다 있지. 딱 숨이 붙어 있을 만큼 말이야.
아버지 전 여기가 편해요. 2년 동안 세상이 많이 변했어요. 길도 변하고, 동네도 변하고, 사람들도 변하고, 모든 게 변했어요.
노인 댁 아들만 빼고 말이지.
아버지 병원 밖으로 나가면 길을 잃어버릴 것 같아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아요.
노인 아니, 여기 아들이 있는데 돌아오지 못할 리가 있나.
아버지 세상은 모두 지훈이를 잊었어요. 지워버렸어요. 여기서 나가면 저도 지훈이를 잊어버릴 것 같아요. 지훈이가 정말 사라질 것 같아요. 지훈이도 사라지고, 이 병실도 사라지고, 영감님도 사라지고.
노인 에잇, 무슨 재수 없는 소리야? 잠이 덜 깼구만.
노인은 혀를 차며 자신의 침대로 가버리고 아버지는 그대로 앉아 창밖을 바라본다. 그 때 창 밖에서 하얀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조금씩 내리다가 이윽고 함박눈이 쏟아진다. 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관객들에게 등을 돌린 채 넋을 잃고 창밖을 바라본다. 성민도 창밖의 눈을 바라본다. 하지만 성민의 얼굴은 공포에 질려있다. 성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지훈의 침대로 다가간다. 그리고 조용히 지훈을 내려다보다가 지훈의 가슴에 손바닥을 올려놓는다. 뒤를 돌아본 아버지는 순간 할 말을 잃고 우두커니 멈추어 선다.
성민 이거, 나 주세요.
아버지 뭐?
성민 심장이요. 이거 나 줘요.
아버지가 달려가 성민을 홱 밀쳐버린다.
아버지 이 새끼가 뭐라는 거야?
성민은 얼른 다시 아버지에게 달라붙는다.
성민 보세요.
아버지 이게.
성민 눈이 와요.
아버지 이거, 이거 놔.
성민 심장 이식을 받지 못하면 이번 겨울을 넘기지 못한댔어요. 죽을 거래요. 내가 죽는대요. 난 죽기 싫어요. 정말이에요. 그게 뭔지도 모른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아저씨, 저 심장 나 주세요, 네?
성민이가 아버지의 손을 덥석 잡는다. 아버지는 기겁하며 떨쳐내려 하지만 성민은 놓아주지 않는다.
성민 내가 다 알아봤어요. 저 형하고 나하고 혈액형도 똑같다구요. 그러니까 저 주세요, 제발이요. 저대로는 아깝잖아요. 멀쩡한 심장을 저대로 두면 안 되잖아요. 저렇게 내버리면 안 되잖아요.
아버지 이 새끼가…….
성민 그리고 아저씨도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순 없잖아요. 아저씨도 살아야죠. 아저씨도 아저씨 인생을 살아야죠. 다른 개구리들처럼 비 오면 노래하고, 가뭄이 오면 화내고, 그렇게 사는 것처럼 살아야죠. 그러니까 이거 저 주세요, 네? 제가 잘 쓸게요. 진짜 잘 쓸게요.
아버지 저리 꺼지지 못해?
성민 전 고작 16살이에요. 16년 밖에 못 살았어요. 그 16년 동안 나는 매일 죽어가고 있었어요. 꼭 죽기 위해 태어난 것 처럼요. 죽기 위해서라면 도대체 왜 태어난 거죠? 난 죽고 싶지 않아요. 난 죽고 싶지 않아요. 아저씨, 부탁이에요.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아버지는 얼이 빠져서 성민을 바라본다.
성민 (울부짖으며) 이건 불공평해요.
아버지 불공평?
성민 불공평해요.
아버지 불공평.
성민 제발요.
성민은 무릎을 꿇고 아버지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린다. 아버지는 성민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그대로 뺨을 후려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