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조리스 카를 위스망스

by 곡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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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꾸로 ] 조리스 카를 위스망스




보통 우리는 독서를 할 때 작가는 고수이고 독자는 하수라고 어림한다. 마치 작가는 저 하늘 위에서 비를 뿌리는 거대하고 자비로운 구름과 같고 독자는 그 비를 향해 두 손을 공손히 뻗는 목마른 식물과 같다고 말이다. 그리하여 독자들은 책을 펴 들면서 내심 사뭇 겸손해지고, 눈치를 보고, 존경심을 품기 마련이다. 설사 그 책을 다 읽자마자 멀리 내던지며 욕을 바가지로 할지라도 책을 손에 들고 있는 동안만큼은 우리는 작가를 말 그대로 두 손으로 '받든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이 세상의 단 하나뿐인 책의 단 한 명뿐인 작가이며, 우리는 이름도 없는 독자 나부랭이들이 아닌가. 그러니 독자에게 무슨 권리가 있을 것이며, 목소리가 있을 것이며, 힘이 있을 것인가. 나 하나가 이 책을 읽거나 읽지 않는다고 해서 작가 선생님께서 신경이나 쓸 것이며 세상에는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라고 해도 온전한 사실은 아니다. 사실 정반대에 가까운데, 대부분의 경우 독자가 고수이고 작가가 하수이기 때문이다. 독자는 저 하늘 위에서 비를 뿌리는 거대하고 자비로운 구름과 같고 작가는 그 비를 행해 두 손을 공손히 뻗는 목마른 식물과 같다. 그리하여 작가들은 글을 쓸 때에 내심 사뭇 겸손해지고, 눈치를 보고, 존경심을 품기도 하는 것이다. 설사 그들이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거나 부정할 때에도, 심지어 대단한 천재라고 여겨지는 작가들이 소위 대작이라는 글을 쓸 때조차 그렇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독자와 상의하고, 타협하고, 심지어 그들에게 아부하면서 글을 쓴다.

만약 독서를 작가와 독자의 대결이라고 한다면, 거의 언제나 독자가 승리한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사실이다. 그것도 매우 압도적으로 말이다. 독자는 기별도 없이 불시에 책 표지를 열어재끼며 쳐들어와서는, 흙이 잔뜩 묻은 구둣발로 페이지들을 짓밟고, 문장들을 헤집어 놓고, 의미를 더럽히거나 세탁하고, 행간을 개인적인 잡동사니로 채워놓는다. 그리고는 작가가 이 책을 쓰기 위해 얼마나 오랫동안 공을 들였는지 혹은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따위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좋으니 나쁘니 평범하니 쓰레기니 간단하게 점수를 매긴다. 심지어 재활용 폐지로 내놓거나 단 돈 몇 푼에 중고책으로 팔아치우거나 찌개 냄비 받침으로 써버리는 것이다. 독자들이 그런 무도하게 행태를 벌일 때 과연 작가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는 이미 책에게도 독자에게도 외부인이다. 독서라는 독자의 세계에서 독자는 주인이고 전능하며, 작가는 그저 유령처럼 자신의 이름이 박혀 있는 표지 위를 무력하게 떠돌 뿐이다. 그리고는 머리를 조아리면서 자신을 조금만 부드럽게 대해 달라고, 조금만 자신을 이해해 달라고 부탁할 것인데, 작가는 예언자처럼 그것을 글을 쓸 때 이미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어느 정도 사실이라고 해도 온전한 사실은 아니다. 개중에는 그러지 않는 작가도 있기 때문이다. 무도하고 고집불통에 불한당인 그는 독자 나부랭이 따위에게는 상의도, 아부도, 타협도, 부탁도 할 생각이 없다. 그는 독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자기 자신이라는 단 한 명의 독자만을 가지고 있으며, 그 독자만을 위해 글을 쓴다. 그러니 그의 책은 그의 사유지라고 할 수 있다. 오직 그의 소유이고 그의 영역이다. 그는 아무도 원하지 않고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도 초대하지 않는다. 그의 책은 안에서부터 자물쇠로 잠겨있어서 독자가 함부로 쳐들어갈 수도 없다. 그러니 그의 책을 읽고 싶다면 어쩔 수 없이 독자 쪽에서 비굴해져야 한다. 무장해제를 하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공손히 그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 그곳에서 작가는 결코 유령이 아니라 실질적인 주인이다. 이제 독자들이야 말로 유령이 되어야 한다.

이 책은 바로 작가 자신이다. 그런데 이것은 작가의 진정성이나 글 내용의 진실성 따위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세계를 지극히 개인적인 방식으로 구축하는 것의 문제이다. 심리분석에서는 '침대'가 아니라 '어떤' 침대인가가 중요하다고 하는데, 그것과 상통하는 얘기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완벽하게 개인적인 세계를 완벽하게 개인적인 방식으로 구축하는 전능한 글쓰기는 엄밀히 말해 글쓰기가 아니며 문학으로 평가받는 것도 불가능하다. 게다가 그것의 정도가 꼭 문학적 질이나 가치를 좌우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런 태도에는 독자로써 받게 되는 어떤 충격이 있다. 굴욕과 굴종의 충격인데, 우리는 사실상 어떤 작가에게도 그런 취급을 당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날 이렇게 막 대한 남자는 네가 처음이야, 뭐 이런 느낌이랄까. 유의할 점은 이런 대사는 호감이나 사랑뿐만 아니라 증오나 혐오를 느낄 때에도 튀어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어느 쪽이든 정확하게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으며, 때로는 자신이 어느 쪽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는데, 이것은 이성과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기분과 직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소통이 부재할 때 오직 취향만이 중요하며 오직 취향만이 나 자신의 영혼과 실존을 증명한다. 그리고 그것은 불통의 평화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가령 누군가 흑인 여자보다 백인 여자가 더 아름답다고 주장한다면 엄청난 비난을 감수해야 할 것이며 그것을 객관적으로 설명해야 할 책임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나는 금발 머리 여자가 취향이라고 한다면 대체 그걸 누가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는 당당히 말할 수 있다. 나는 얼굴이 하얗고 머리는 노랗고 눈은 파랗고 가슴은 빵빵한 여자가 좋다고 말이다. 어떤 사람은 전자와 후자 모두 같은 뜻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취향에 대해 얘기하는 방식에 대한 취향 역시, 아니, 훨씬 더, 중요하지 않은가.

바로 이 '거꾸로'라는 책이야 말로 취향에 대한, 취향에 의한, 취향을 위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 책의 내용을 설명하는 건 퍽이나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나에게 그런 권리가 있는지 의심스러우며, 그런 능력이 있는지는 더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대체 무엇을 묘사해야 한단 말인가. 등딱지를 금과 은, 값비싼 보석과 인조 보석들을 아로새긴 거북이에 대해? 특정한 감각과 몽상을 자극하도록 치밀하게 연출된 무대와 같은 각각의 방에 대해? 이 세계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에 반영하기 위해 선별된 그림들에 대해? 책의 영혼에 걸맞도록 표지의 재료부터 활자 모양까지 선별해서 일일이 수작업으로 만든 서적들에 대해? 꼭 필요한 순간에 정확하게 작용하도록 제조되어 꼭 걸맞은 용기에 담긴 수십 가지의 술과 향수에 대해? 내가 감히 어떻게 그렇게 하겠는가? 이미 작가가 그의 글 안에서 단어 하나하나, 쉼표 마침표 하나하나까지 세심하게 골라가며 더 더하거나 뺄 것도 없이 세공해 놓았는데 말이다.

그래서 나는 소설 속 주인공 데 제쎙트의 취향을 설명하기 위해 잔뜩 메모를 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이 책에 나오는 모든 그림들을 다 찾아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내 글로 옮기는 건 부질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출신과, 성장 배경과, 외모와, 감각적 기질과, 건강 상태와, 학력과, 경험, 취미, 성향 등등이 독특하게 융합되고 변질되고 고양된 그의 취향 자체가 매우 흥미롭고, 또한 미학적으로, 심리학적으로, 사회적으로, 병리적으로, 사상적으로 분석해 보는 것도 유익한 일이 되겠지만 엄두를 내지 않겠다. 그저 데 제쎙트가 귀스타프 모로를 묘사한 말로 그것을 대신 가늠할까 하는데, 그는 이 책에서 꽤나 많은 장을 구구절절 할애하며 이 화가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과시했다. 그는 "호사스럽고도 기발한 혼합을 대단히 현대적인 신경과민증에서 기인한 불안하면서도 활발한 정신 활동으로 강렬하게 표현된 엄숙하고도 불길한 알레고리를 정당화하였다."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이 세상 어느 곳이든, 이 세상의 누구든, 이 세상의 무엇이든, 중성적이거나 무성적이거나 무감각하거나 무신경하거나 무심하거나 죽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결코 그렇게 바라볼 수도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감각과 뉘앙스와 환상이 우리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고, 그것들이 대립하고 화합하고 재생산되고 농축되고 증류되면서 세계는 끊임없이 신경증적으로 진동하고 있으며,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세계는 더 섬세하고 치밀하며 완전하는 걸 느낀다. 그것을 한 마디로 바꾸자면 이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 나 자신은, 하나부터 열까지 지극히 절대적으로 인공적이라는 것이다. 그 인공성이야 말로 이 우주의 중심이고 또 이 우주 자체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으며 그 바깥도 그 안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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