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니 디드로
이 책이 나의 감탄을 불러일으키고 솔직히 혼을 쏙 빼놓은 것은 단순히 작가인 디드로의 글 솜씨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그가 예민하고 신랄하며 뛰어난 작가라는 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솔직히 얄미울 정도니까. 그래서 나는 그 점에 대해 특별히 언급하지는 않으려 한다. 그보다 결정적으로 나의 탄성을 자아낸 지점은 디드로를 넘어 그가 속한 시대 혹은 그가 속한 세계 자체에 대한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마치 외계인이나 판타지에 나오는 다른 종족의 삶을 엿보는 것처럼 흥분이 되었다. 그건 단순히 작가가 프랑스 사람이고 내가 한국사람이라는 국적이나 인종의 차이 때문은 아니다. 나는 프랑스의 역사를 다른 나라의 역사라고 생각지 않으며 나의 역사 그러니까 우리의 역사로 받아들인다. 또한 그것은 디드로와 나 사이에 몇 백 년의 격차가 있기 때문도 아니다. 나에게는 몇 천년 전의 시대보다 이 몇 백 년 전의 시대가 더 낯설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마치 역사의 틈바구니에서 튕겨져 나온 희귀한 존재들 같으며, 그들과 우리 사이에는 시간이나 공간보다 더 거대한 단절이 존재하는 듯하다.
내가 말하는 그 시대 혹은 그 세계란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유럽으로 대략 특정할 수 있을 듯하다. 나는 유럽 역사나 풍습에 대해서 별로 아는 바가 없지만 내가 읽은 몇몇 책에서 받은 인상으로 말하자면 그 시대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은 그들이 '말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프랑스혁명은 진정성과 윤리적 측면에서 여러 가지 비난을 받고 있지만, 나는 프랑스혁명이 '말하는 사람'들이 대사를 쏟아낼 수 있는 본격적인 무대가 되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 그것은 지위고하 신분계급을 막론하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말을 할 수 있으며, 그 말 자체에 정신적일 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힘이 있고, 무기가 아니라 말로도 전쟁할 수 있고 심지어 승리할 수 있다는 의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시대였다. 그 시대 사람들은 수많은 말과 연설과 글을 남겼는데 거기에는 비천한 자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일기'는 더 이상 명망 있고 학식 있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자들이 전유물이 아니었다. 하인이나 장사꾼이나 조수나 창녀나 비렁뱅이도 글을 안다면 글을 썼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도 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누구든 나에게도 할 말이 있다는, 나에게도 기록할 가치가 있는 나만의 목소리가 있다는, 내가 이 시대의 증인이며 대변자이며 심지어 일면 대표자라는 각성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가히 역사의 정점이라고 할 만하다.
그들 자신도 자신들이 꼭대기에 올라와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곧 모두 우르르 굴러 떨어져내릴지라도 당장은 그 높고 뾰족한 한 점 위에 한 발로 휘청거리며 당당히 올라섰다는 걸 말이다. 그리하여 기세가 등등해진 그들은 마구잡이로 떠들고 소란을 떨기 시작한다. 대단한 난리법석이 일어난다. 난리 통에 가문이니 계급이니 재산이니 학식의 경계가 무너져 내린다. 그들은 그저 모두 말하는 자이며, 연설자이며, 예술가들이며, 무대 위의 배우들이다. 그들 사이의 차이란 단지 역할의 차이에 불과하다. 역할에 따라 서로 다른 삶을 살고 다른 대사를 읊을 뿐이다. 그리하여 무늬만 남은, 그러나 무늬만으로도 여전히 미신적이면서 동시에 현실적인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는 모든 권위가 무차별적인 희화의 대상이 된다. 최고 존엄인 왕의 목이 달아난 것도, 어쩌면 그가 누구보다 가장 희화화될 운명이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말'은 이제 왕권보다 더 강하다. '말'은 심지어 왕의 목도 베어버렸다. '말'은 '칼'이 가지고 있는 여러 용도와 상징을 심화시킨다. 사람들이 그 힘을 인식하면서 말은 솔직하며 열정적이지만 또한 공격적이고 잔인해진다. 그들은 더 이상 신중하게 말하거나 눈치를 살피거나 예의를 차리지 않는다. 상대방이 들을 수 있도록, 아니, 깜짝 놀라도록, 기가 죽도록, 어쩌면 정말로 죽어버리도록, 소리를 지르다 못해 피를 토하며 말한다. 그들은 자신의 온 삶으로 말하고, 목숨을 - 실제로 - 걸고 말한다. 그들에게 '말'이란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이 책 '라모의 조카'에는 그것이 다소 부드럽고 문학적으로, 그러나 숨김없이 드러난다.
그것은 지금의 우리로서는 받아들일 수도 흉내 낼 수도 없는 세계관이다. 그들이 공식적으로 - 중요한 건 '공식적'이라는 것이다 - 쏟아내는 거침없는 말 앞에서 공과 사의 구분은 사라져 버린다. 그들은 타인을 일방적으로 규정하고, 정의 내리고, 내면적 삶을 부정하고, 인신공격과 욕이 난무하고, 상대를 조각조각 해부해서 각각 1부터 10까지 점수를 매기고, 단순하기 그지없는 캐릭터로 만들어 놓고는 멋대로 희화화하기 일쑤다. 강자 뿐만 아니라 약자도, 가해자 뿐만 아니라 피해자도 비난과 농담거리가 된다. 이성과 정의의 이름을 앞세워서 비이성적인 편견과 불의한 오해가 넘쳐흐르도록 부추긴다. 그런데도 놀랍게도 그들은 그 어느 시대보다 낙천적인 교만함으로 서로서로 그것을 견디면서 자신과 타인의 개성을 구축해 나간다. 그들의 그 자신감과 자유롭고 무책임한 정신이 지금의 우리로서는 놀랍기만 하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얼마나 점잖은 교양인인지. 우리는 더 이상 누군가에게 '천박하다'는 단어를 공식적으로 쓸 수 없는 지경에 혹은 경지에 이르렀다. 우리는 결코 어떤 방식으로든 사람의 '질'을 따질 수 없으며, '가치'에 대한 기준을 영영 잃어버렸으며, 누구나 똑같이 한 표의 투표권을 가짐으로써 고통스러울 정도로 서로 평등하다. 이제 다른 사람을 모욕하는 건 불의할 뿐만 아니라 두려운 일인데, 누구에게도 다른 사람을 모욕할 자격이 없다는 게 이성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법적으로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누군가를 캐릭터화시킨다는 것은 더더군다나 불가능한 일이다. '그 사람에게도 부모가 있고, 형제가 있고, 자식이 있고, 가족이 있다'는, 본질에서 벗어남에도 불구하고 흔하게 강요되는 이 상투적인 논리는 비인격적 캐릭터화에 대해 저항하는 가장 대중적이고 손쉬운 전략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러한 태도와 분위기가 사람들의 개성을 억압하고 심지어 부정하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두 번의 세계 전쟁을 치르면서 형성된 강력한 법치주의와 성찰적인 윤리주의의 성공적인 결합은 그 목적대로 선량한 준법 시민을 낳았다. 아니, 어쩌면 소심하고 나약한 무기력자들과 냉담자들을 낳은 것일까. 과연 진정한 공감 능력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하면 멀미가 일어날 지경이다.
'라모의 조카'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입이 트인 것에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할 말이 있을 때뿐만 아니라 할 말이 없을 때조차 떠들어 댄다. 말하자면 말하기 위해 말을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말하기 위해 말할 거리를 찾는다. 자신의 실존을 체험하고 증명할 수 있는 것은 '말'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말하기 위해 전쟁을 하고, 말하기 위해 새로운 대륙을 찾아 나서고, 말하기 위해 살인을 하고, 말하기 위해 글을 쓴다. 심지어 자신들이 잘 모르는 주제들로 백과전서까지 만들어내는 초능력을 발휘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인 라모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이름도 '라모'이면서, 유명한 음악가 삼촌인 라모의 조카로 소개될 정도로 사회적 위치와 평판이 미천한 그가 명망 있는 철학자를 붙들고 거하게 풀어놓는 얘기를 들어보라. 그리고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 하는 얘기이기도 하다. 흥미롭게도 그는 배우와 관객을 동시에 연출한다.
라모의 말은 그럴듯한 것도 있고, 논리적인 것도 있으며, 진실되고 비범한 점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부조리하고 엉터리다. 자기변명과 방어를 위해 마키아벨리 사상을 대중적이고 세속적으로 비틀어버린다. 하긴 왕에게 적용되는 것이 왜 협작꾼에게는 적용되지 않겠는가. 다시 말하지만 그들은 지극히 동등한데. 하지만 중요한 것은 말의 내용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말에 - 그게 어떤 말이든 - 온통 심취해 있으며 심지어 그의 삶 자체를 말로 소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주인공 라모는 기식자, 내부의 외부자, 위상도 역할도 없는 자, 질서의 교란자, 잉여의 화신, 법과 윤리에 개성과 활기를 불어넣는 자, 변화를 자극하는 부조리 등으로 평해진다. 그러나 아니다. 그는 기식자도, 외부자도, 교란자도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 그 시대 사람이며, 주류이며, 대표자이다. 그는 말을 하고 싶은 자, 말하는 자, 말할 거리는 찾아 헤매는 자이다. 사기꾼, 비렁뱅이, 협잡꾼, 범죄자인 주제에 주눅 들 것도 거리낌도 없이 공개적으로 당당하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건 기식자나, 외부자, 교란자의 태도가 아니다. 그와 비교하면 오히려 오늘날의 우리들이 기식자, 외부자, 교란자라고 해야 할 판이다. 우리는 입을 다물고, 눈치를 보고, 상대가 누구든 존중하고, 깎듯이 예의를 차리고, 자신의 주제를 알고, 한없이 겸손하고, 몰래 기회를 노리고, 경쟁을 피하는 척하면서 치열하게 경쟁하고, 몰래 상대방의 뒤통수를 치고, 시치미를 떼고, 배우이기보다는 관객이기 때문이다. 좀 다른 얘기이긴 하지만 어쩌면 그것이야 말로 일면 페미니즘이 혐오의 대상이 된 이유인지도 모른다.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저항하기 때문이 아니라 시대가 말에게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라모의 시대는 지금보다 훨씬 단순했다. 그러나 폭발력은 강력했다. 아무도 물러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알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알았고, 상대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상대했고,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했다.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선명했으리라. 라모에 비하면 우리는 순진한 어린애, 혹은 우리에 비하면 라모가 순진한 어린애라고 해야 할까. 나로 말하자면 라모의 시대를 딱히 부러워하는 건 아니지만, 요즘 시대에 대해 딱히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를 돌아볼 때, 윤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자기 검열이 이토록 강력했던 시대가 또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그저 두렵다. 상대방을 상처 입히는 것도. 내가 상처 입는 것도. 두려워서 우리는 실어증에 걸려 버렸다. 그리고 천성적인 침묵 속에서 갈등을 유발하고 평화를 위협하는 '말'을 미워하게 되었다. 침묵의 전체주의. 좋다. 어쩌면 이것이야 말로 진짜 현명함인지 모른다. 세상은 더 평화로워졌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진보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나는 진심으로 그것에 반대하지 않는다. 나에게는 이것을 반대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소한 그 침묵이 예술을 죽이고 천재를 죽이고 있다는 건 확연해 보인다. 우리는 모두 행복한 난쟁이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