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분과로서의 살인

토머스 드 퀸시

by 곡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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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 분과로서의 살인 ] 토머스 드 퀸시





읽기도 전에, 심지어 책을 펼치기도 전에, 재미있을 것 같은 강한 예감을 계시하는 책들이 있다. 그 예감이 맞을 때도 있고 틀릴 때도 있지만 - 사실 그건 아무 연관성이 없다 - 어쨌든 계시가 내려진 이상 당장 펼쳐서 읽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일단 제목 하나로도 독자를 무장해제시켜 버리기에 충분하다. '예술 분과로서의 살인.' 예술로서의 살인도 아니고 예술 '분과'로서의 살인이라니. 정말이지 배운자들의 학식과 교양이 철철 넘치는 제목이 아닌가. 작가는 이 제목 하나로 자신이 말하려는 모든 것을 이미 다 말하였다. 정작 이 소설 전체는 이 제목의 각주에 불과할 뿐이다. 다르게 말하면 이 소설이 자신의 제목보다 더 뛰어나기가 힘들다는 뜻이다. 나의 실망은 제목이 시작부터 기대치를 너무나 올려놓은 탓이기도 하고,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작가의 조루증 탓이기도 하다. 좀 더 힘을 내라고, 응원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었건만, 끝까지 기세를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나 보다. 아마도 그 정도의 발기를 유지하는 데 성공한 사람은 '사드' 뿐일 것이다. 하지만 그 대신 사드에게는 유머감각이 없었지. 이 책은 자신의 조루증과 폭력성의 희석을 유머를 통해 대중적으로 보완한다. 그리고 사실 애초에 이 책의 포부와 목적 자체가 단지 유머였을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유머에서 섬뜩함을 감지하는 것은 오롯이 내 시대의 감성일까.

이 책은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다. 물론 살인 사건을 다루는 소설은 많다. '공포'나 '서스펜스' 등 장르 소설을 포함해서 말이다. 어쩌면 이 책 역시 그런 부류로 분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책들 대부분은 서민적이고 속물적으로 독자들에게 접근하기 일쑤다. 미스터리와 반전의 이야기 구성 속에서, 선과 악의 대립으로 점철되면서, 윤리와 정의감으로 범벅이 되어 있다. 하나의 취향에 집착하여 세상을 편파적으로 제단 하는 장르 소설은 편집증적이라든가 심지어 기형적이라는 비난을 받는 것도 사실인데, 실은 그들은 소설의 내적 본질을 전략적으로 폭로한 것뿐이다. 말하자면 소위 '장르 소설'에서 느껴지는 매력과 거부감은 노출증에 대한 거부감이다.

본래 '소설'은 독자들에게 '알리바이'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진짜 현실에 대한 알리바이 말이다. 현실은 우리가 날로 먹기에는 너무나 독하기 때문이다. 독하다는 건 무엇일까. 무의미, 냉엄함, 우연, 죽음, 죄의식 같은 것. 소설은 그것을 '적당히' 희석해버린다. 심지어 사드의 소설마저도 그렇다. 말하자면 소설은 고기의 피비린내와 누린내를 감춤으로써 부담 없이 먹을 수 있게 만든 고기 요리다. 대부분의 소설이 너무 많이 삶아졌거나 너무 소스를 많이 쳤다는 게 문제겠지만. 아마도 장르 소설이 그러한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노출증과 과도한 열기와 복잡한 소스의 자극적인 조합에 대한 선호다.

그러나 이 소설은 거의 고기를 익히지 않았다. 피비린내가 생생하게 풍기는 고기에 후추만을 뿌려서 고상하고 세련된 접시에 담아 내놓았다. 이 소설이 소설의 형식이 아니라 '에세이'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피비린내의 풍미를 보존하기 위해서다. 그러자면 우선 무엇보다 고기가 신선해야 하겠지. 작가는 그 사실을 당당히 보증할 수 있다. 그 고기는 당대에 실제 일어났던 사건을 그대로 도축한 것이니까. 그리고는 외과 의사가 말끔하게 소독한 수술칼로 솜씨 좋게 집도하듯이 그것을 자신만만하게 도려내었다. 독자가 이 책에 혐오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 역시 또 다른 의미의 노출증이기 때문인데, - 장르 소설은 소설의 본질을 증폭시킴으로써, 그리고 이 소설은 소설의 본질을 억압함으로써 소설을 노출시킨다. 어느 쪽이 더 폭력적인지는 생각해봐야 한다.- 우리는 고기를 좋아하지만 보통 이렇게까지 적나라하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아마 스스로는 우리의 식탁에 이런 음식을 올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누군가에 의해 접시가 식탁에 올려지면 그 혐오감마저도 참으로 입맛을 돋우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피비린내가 난다고 하는 건 이 소설이 살인을 잔인하고 격정적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잔인하고 폭력적인 묘사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런데도 이 소설이 폭력적인 것은 폭력을 철저하게 대상화시킴으로써 폭력'적'이 아니라 스스로가 폭력이 되었으며 스스로 그것을 분명하게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요즘에는 결코 이런 소설이 나올 수 없다. 이런 태도의 소설은 박멸되었다. 현대인의 윤리의식은 더 이상 이런 소설을 소화하지 못한다. 누군가는 그것을 나약해졌다고 하겠지만 누군가는 그것을 건강해졌다고 하겠지. 어쩌면 이 소설은 종교보다도 더 지독한 윤리적 계몽주의의 탄압 대한 최후의 반항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살인자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 있는 건 악랄한 살인자를 죽이는 정의로운 살인자라는 자기복제적이고 자기모순적인 장치를 마련하고 나서야 겨우 가능할까 말까 하다. 그 경우에도 그 살인자의 말로 역시 결코 행복할 수 없다. 그의 지지자들 조차 누구보다 재빨리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는 그 살인자를 단죄하는 데 앞장서기 때문이다.

종종 현대인이 타락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인류가 윤리적으로 더 타락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잣대가 더 가혹해졌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한 마디로 '윤리'에 중독되어 있다. 아마도 그것 외에 우리는 더 이상 아무런 세상의 잣대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윤리적인 인간이 되는 것 외에 어떤 인간이 될 수 있는지 우리는 더 이상 알지 못한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여러 번 증명되었듯,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극단까지 밀어붙이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더러운 공기를 마시지 않기 위해 있는 힘껏 숨을 참으며 점점 창백해져 간다. 아니, 나는 비아냥거려서는 안 된다. 어쩌면, 분명, 오늘날의 윤리는 옳다. 살해당한 동시대인의 죽음 앞에서 기술이니 예술을 논하며 희희낙락하는 것은 나에게도 가당치 않게 여겨진다. 그러한 유머 감각이 우리에게서는 도태되었다. (그리하여 그것은 온라인 댓글 차원으로 구류되었으며 그 진흙탕 밖으로는 쉽사리 기어 나오지 못한다.) 그러나 거기에 호기심과 기쁨이 있다는 분명한 사실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우리가 피해자에게 감정을 이입하면서 살인자에게 일갈하는 그 분노와 비난 속에는 동시에 살인자에 대한 감정 이입과 그 살인자에 대한 일종의 감탄과 칭송이 서려있다는 걸 말이다.

이 소설에 나오는 소위 '애호가'들은 자신들만의 모임을 만들고, '예술적인' 살인이 일어나길 오매불망 기다리며, 그러한 살인 사건 소식이 전해지면 대대적으로 만찬을 열어 자축하고, 그것에 대한 열렬한 토론과 연구에 몰두하는 사람들이다. 책에서 그에 대한 구절을 그대로 옮기자면 '우리는 눈물을 거두고 윤리적으로 볼 때 충격을 주며 변명의 여지없는 행위가 취향의 원리를 적용하면 매우 뛰어난 성취로서 재조명됨을 깨닫는 기쁨을 누릴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살인 사건에 대한 가십을 심심풀이로 소모해버리는 그런 무지렁이 시정잡배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계몽된 자들 중의 계몽된 자들이고, 지식들인 중의 지식인들이며, 학자들 중에 학자들이다. 그들은 미술 비평가들이 작품의 의미를 개발하고 미학적인 위치를 확정하 듯 살인 사건의 의미를 개발하고 미학적인 위치를 확정한다. 그들은 살인자들을 예술가로 우대하는 데, 솔직히 그것이 아예 허황된 것은 아니다. 예술이란 세속적인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내적 충만함과 미학적 완성을 위한 것이고 우리에게 인간의 비밀과 영감을 제공하는 것이다. 만약 사람을, 혹은 어떤 사건을 '재료'로 인식할 수만 있다면, 미학을 모든 가치의 최상위에 놓을 수 있다면, 특정 살인자를 '예술가'로 인식하는 것은 매우 논리적인 일이다. 그래서 예술가들로 우글거리는 전쟁이야말로 최고의 예술이 아닌가.

그리고 이것은 사실 우리의 머릿속에서 늘 진행되면서도 곧바로 금지되는 일이기도 하다. 오늘날 이 '금지'의 정당성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부정하는 사람을 우리는 '사이코페스'라고 특정하여 부르는 데,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매우 사이코페스적이다. 그리고 내 안에 있는 사이코페스는 누군가 이렇게 대놓고 시원하게 말해줘서 기쁘기 한량이 없다. 무엇보다 이 작가는 이미 100년도 더 전에 죽은 사람이고 이 소설에 나오는 피해자들 역시 100년도 더 전에 죽었으니 자기 검열이 나의 떳떳한 유쾌함을 해치지도 않는다. 솔직히 말하자. 살인은, 강간은, 방화는, 자연재해는, 전쟁은, 재밌다. "너는 공감 능력이란 게 없니?" "너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해봐." "그 사람에게도 가족이 있다는 걸 잊지 마." 이런, 진정하시라. 나는 소설에 대해 얘기하고 있을 뿐이다.

오늘날 우리는 살인 사건에 대해 농담할 수 없고, '병신'이라는 욕도 쓸 수도 없고, 귀엽다고 아이의 엉덩이를 두드릴 수도 없고, '남자답게'나 '여자답게'라는 말도 쓸 수 없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매우 옳다. 옳으며 반드시 옳아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옳은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옳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 또한 옳으며 반드시 옳아야 한다. 아, 어쩌란 말이냐.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유머가 필요하다. 그것이 100년도 더 된 이 유머에 우리가 웃을 수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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