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자살수업 (3)

by 곡도




인물 그러니까 강사님 말씀은 저희가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에 자살할 수 없을 거라는 말인가요?


강사 아니요. 여러분은 충분히 자살할 수 있습니다. 당장이라도 말이죠.


인물 아니, 그럼 대체 강사님이 말하는 확신이란 게 뭐죠?


강사 확신을 확신하는 겁니다.


인물들 확신을 확신한다구요?


강사 미안하지만, 세상의 모든 중요한 일들이 동어반복으로밖에는 표현될 수 없다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들어보세요. 난 8살짜리 어린애가 자살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스스로 전철에 몸을 던졌죠. 왜 그랬을까요? 사소한 이유 때문이었어요. 그 애 어머니가 스마트폰을 사주지 않았거든요. 그건 정말이지 소름끼칠 정도로 수준 낮은 자살이었습니다.


인물들 수준 낮은 자살?


강사 말했듯이 난 ‘수준’이란 말이 주는 거북함을 피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자살은 저질이에요. 동정의 여지가 없어요. 물론 전철에 몸을 던질 정도였으니 그 아이도 자살에 대한 확신이 있었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정말 그런가요? 아니요. 그 아이는 죽으려던 게 아니에요. 그저 처음에는 협박이었을 거고, 그 다음에는 자신이 얼마나 화났는지 과시하려 했을 테고, 결국에는 엄마에게 복수하고 싶었을 테죠. 어쩌면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겁니다. 사실 많은 자살들이 이런 식이라니까요. 정신이 온통 딴 데 가있는 거예요. 자살이 고작 수단이 되다니, 난 이 일의 종사자로서 정말 수치심을 느낍니다.


인물 그렇다면 정치적인 자살은 어때요?


강사 정치적인 자살이요?


인물 조국과, 민족과, 독립과, 인권과, 뭐…….


인물 동성 결혼 허용과, 돌고래 보호와, 핵발전소 반대와, 세계 평화 수호 등등…….


인물 자본주의를 고발하고, 민주주의에 경고하고, 정보를 개방하고…….


인물 영웅적인 자살들.


강사 유치해요. 다 유치해. 그런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내놓으라고 징징거리다가 죽은 그 8살짜리 어린애와 뭐가 다릅니까. 영웅이라구요? 자신의 시체로 흥정을 하는 야바위꾼에 불과해요.


인물 종교의 자유를 위한 자살은요?


인물 명예를 지키기 위한 자살은요?


인물 신념을 일깨우기 위한 자살은 어때요?


인물 위대한 자살들.


자명종 시계가 울린다. 강사가 자명종 시계를 끈다.


강사 그만 하세요. 더 듣고 있을 수가 없군요. 그들은 죽음을 원했던 게 아니에요. 힘을 원했던 겁니다. 깃발을 높이 달아매기 위해 자살을 장대로 이용했던 거예요. 하지만 자살은 상징도, 풍자도, 퍼퍼먼스도, 광고도, 협상도, 무기도 아닙니다. 그런 소위 영웅적이고 위대한 자살들이 자살을 수완으로 만들고 죽음을 전략으로 격하시키고 있어요. 지금은 자살이 아니라 대량 생산된 자살쇼들이 판치고 있는 시대란 말입니다. 세상에나, 그런 자살들을 고발하기 위해 나부터 광화문 사거리에서 목을 매야할 판이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더욱 더 확신을 위한 확신이 필요한 겁니다.


인물들 확신을 위한 확신.


강사 자살을 위한 자살이죠.


인물들 자살을 위한 자살.


강사 예술을 위한 예술처럼.


인물 말하자면 작가정신이군요.


인물 장인정신이구요.


인물 진정성 문제에요.


인물 주체성의 문제구요.


인물 주권이라고도 할 수 있죠.


인물 자율성이기도 해요.


인물들 자살을 위한 자살을 위한 확신을 위한 확신.


강사 여러분, 우리는 더 이상 구질구질해져서는 안 됩니다. 흐리멍덩해서도 안돼요. 나약해서도 안되죠.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고 해도 말입니다. 우린 ‘마지막’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자살하려면 그 어느 때보다 상상력이 필요해요.


인물들 우리는 상상해요. 모든 건 끝장이 날겁니다.


강사 저는 완성이라는 말을 더 선호합니다.


자명종 시계가 울린다.


강사 정말이지 성가시네.


강사는 시계를 집어서 힘껏 바닥에 던져버린다. 시계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난다. 모두들 숨을 죽인다. 강사는 시계의 파편 위에서 마구 발을 구른다. 모두들 환호하며 크게 웃는다.


인물 휴우, 이제야 숨통이 트이네.


인물 째깍, 째깍, 그 놈의 초침소리.


인물 삶을 난도질 하는 소리.


인물 더 이상 카운트다운은 없어요.


인물 더 이상 죄의식도 없구요.


인물 우리 인생은 24시간을 위한 오마주였지요.


인물 시계는 기하학의 첩자예요.


인물들 맞아요. 맞아요.


강사 기하학. 망할 놈의 기하학.


인물 여러분, 우리는 기하학을 반대하도록 합시다.


인물 그리고 선언하도록 합시다.


인물 자살은 예술적입니다.


인물들 자살은 예술적입니다.


인물 확신을 위한 확신.


인물들 확신을 위한 확신.


인물 자살을 위한 자살.


인물들 자살을 위한 자살.


강사 모든 건 끝장이 날겁니다.


인물들 아니오. 모든 건 완성될 겁니다.


강사 대단해요. 훌륭합니다. 이렇게 빼어난 학생들은 정말이지 오랜만이에요. 좋습니다. 좋아요. 저에게도 자극이 되네요. 진도를 좀 빨리 나가도록 하죠. 원래 수업 과정대로라면 자살의 정의, 자살의 의의, 자살의 종류, 자살의 역사, 자살 공학, 자살 통계, 자살 심리, 자살 윤리, 자살한 위인들, 자살한 연예인들 등등등의 순서로 강의해야 하지만, 모두 생략하도록 합시다. 여러분의 수준에 비하면 유치하고 형식적인 얘기들이니까요. 사실 이런 얘기들은 죽을 사람들보다는 (관객들을 손가락질 하며) 살 사람들의 구미에 더 맞기 마련이죠. 그런 건 다 집어치우고 우린 곧바로 실습으로 넘어가도록 합시다. 바로 여러분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바로 그 순간이죠. 자, 그럼 본격적으로 자살을 할 때에…….


인물 저, 강사님.


강사 네? 무슨 일이죠?


인물 죄송하지만, 좀 쉬었다 하면 안 될까요? 화장실이 급해서요.


인물 목도 마르구요.


인물 다리에서 쥐가 나려고 해요.


인물 담배도 한 대 피고 싶구요.


강사 아, 그렇군요. 미안합니다. 아직 여러분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제가 깜빡 했네요. 잠시 쉬어가도록 합시다. 화장실에도 다녀오고, 물도 마시고, 담배도 피고, 휴식을 좀 취하도록 하세요. 15분 후에 수업을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인물 저기, 그런데 시간을 어떻게 알 수 있죠? 시계가 부서졌잖아요.


강사 아 참, 그렇군요. 이럴 줄 알았으면 시계를 나중에 부술 걸 그랬어요. 흠, 할 수 없죠. 번거롭긴 하지만, 일, 이, 삼, 사(박수). 이걸로 시간을 재야겠어요. 4초에 한명씩이니까, 1분에 15명, 10분에 150명, 15분이면 225명이죠. 그럼 225명이 자살하는 동안 휴식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모두들 편히 쉬었다 오십시오.


관객석이 밝아지며 중간 휴식 시간이 된다. 일, 이, 삼, 1(박수), 일, 이, 삼, 2(박수), 일, 이, 삼, 3(박수)……. 강사가 4초에 한 번씩 박수치기를 하는 동안 인물들은 무대 위를 오가며 음료수를 가져와 마시거나 서로 대화를 하거나 화장실에 다녀오는 등 편하게 볼일을 본다. 핸드폰 게임, 화장 고치기, 신발 닦기, 귀지 파기, 담배 연기로 장난치기 등의 일상적이고 사소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실제 그 날의 가십이나 뉴스에 대한 의견, 혹은 개인적인 대화를 소리 내어 나누어도 좋다. 4초마다 박수를 치던 강사 역시 인물 중 한사람에게 대신 박수치기를 부탁하고 화장실을 가거나 물을 마신다. 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박수치기를 넘기면서 인물들이 돌아가며 박수를 친다. 마지막에는 다시 강사가 박수치기를 넘겨받는다. 강사가 박수를 치는 동안 중간 휴식 시간이 끝나고 관객석에 불이 꺼진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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