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 ...일, 이, 삼, 222(박수). 일, 이, 삼, 223(박수). 일, 이, 삼, 224(박수). 일, 이, 삼, 225(박수). 자아, 여러분, 마침내 225명이 자살했습니다. 이제 그만 휴식을 끝내야할 시간입니다. 모두들 모이세요. 수업을 다시 시작하죠.
인물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의자에 앉는다.
강사 여러분, 오늘 저는 기분이 매우 좋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학생들을 만나게 돼서 말입니다. 진심이에요. 아, 갑자기 옛 추억이 떠오르네요. 오래 전에 예비 자살자들이 모임을 갖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공식적인 모임이었지요. 그 때는 국가가 자살을 관리해야 한다는 주제넘은 망상 따위는 없었거든요. 그 때였다면 이렇게 몰래 숨어서 수업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겁니다. 뭐, 이것도 나름 운치 있는 일이긴 하지만요. 저는 그 시절 가장 명망 높던 자살 모임의 주최자였습니다. 매주 금요일마다 저희 집에서는 자살 모임이 열렸어요. 해가 지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 중 가장 좋은 옷을 차려입고 하나 둘씩 모여 들었습니다. 모두가 천차만별이었지만 누구나 환영 받았습니다. 우리 사이에서는 계급이니 소외니 차별 따위는 없었거든요. 모두가 동등했지요. 동일한 결말 앞에서 개인차 같은 건 사소할 뿐이니까요. 휴머니즘이란 바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여느 모임과 마찬가지로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다가, 밤 10시가 되면 제비뽑기로 그 날의 자살자를 정했습니다. 뽑힌 사람은 미리 써온 유서를 큰 소리로 낭독하고는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서 주저 없이 자살했습니다. 뭐, 때로는 약간의 도움이 필요할 때도 있었지만요. 그건 정말 대단했어요. 모두들 차분하고 스스럼이 없었죠. 요즘 사람들은 혼자서 자살하는 걸 더 선호하지만, 난 가끔씩 그 시절이 그리워져요. 뭐, 그래도 이 수업이 어느 정도는 그 전통을 이어나가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우리에게는 자살에 대한 연대의식이 있으니 말입니다. (연극배우처럼 과장되게 인사한다) 자아, 여러분, 이제부터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자살을 결심한 순간부터 여러분은 더 이상 무대 위의 배우가 아니라 무대 뒤의 감독이라는 걸 명심하세요. (관객들을 바라보며) 그리고 마침내 그 마지막 순간이 오면 여러분은 객석에 앉아있는 관객이 되는 거예요. 빈 무대 위로 여러분의 박수 소리가 요란할겁니다. 그리고 암전이죠.
인물들이 관객들을 바라본다.
강사 자, 이제 본격적인 수업에 들어가 볼까요? 우선 유서를 작성해 보도록 합시다.
인물들 유서요?
강사 유서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겠죠? 유서는 자살의 시작이자 자살의 끝이라고 할 수 있죠. 여러분이 유서를 쓰면서 자살은 시작되고, 누군가 여러분의 유서를 읽으면서 자살은 끝이 납니다.
인물들 자살의 시작과 자살의 끝.
강사 우선 유서는 여러분이 자발적으로 죽음을 결정했다는 가장 큰 증거가 됩니다. 유서가 발견되면 번거로운 경찰 수사도 생략되고, 온 집안을 함부로 뒤진다던가, 가족들을 심문한다던가, 여러분의 사체를 해부할 필요가 없어지죠. 일처리가 깔끔해진다는 뜻입니다.
인물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가요.
인물 맞아요. 난 거기 있지도 않을 텐데.
인물 죽은 뒤의 일에 난 관심 없어요.
인물 살아있는 인간들이야 고생 좀 해보라지요.
강사 그래요. 옳은 말입니다. 내가 죽은 다음에야 다 남의 얘기일 뿐이죠. 죽는 마당에 사연을 구구절절 늘어놓아 보아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게다가 산 사람 걱정이야 말로 정말이지 쓸데없는 짓이거든요. 죽은 사람의 뒤처리를 하는 게 원래 산사람들이 하는 일 아닌가요. 하지만 꼭 그런 이유 때문에 유서가 필요한 건 아닙니다. 유서를 쓰다보면 자기 검증이 가능합니다. 확신에서 확신의 확신의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거죠. 예를 들면 사직서 같은 거예요. 회사를 때려치우고 싶어서 안달난 사람들의 대부분이 정작 사직서를 쓰다가 찢어 버리고 말거든요. 그 때서야 비로소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과 해야만 하는 것의 차이를 깨닫게 되는 거죠.
인물들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과 해야만 하는 것의 차이.
강사 하지만 제 생각에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요. 유서는 여러분의 마지막 말이자, 사실상 여러분의 유일한 말이라는 사실입니다.
인물들 나의 유일한 말.
강사 네네, 저도 압니다. 저도 알아요. 유서를 쓸 만큼의 생기가 남아있었더라면 그만큼이라도 조금 더 살아봤겠죠. 대부분의 자살자들이 유서를 남기지 않는 건 펜을 들 만큼의 관심도, 미련도, 의지도 더 이상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여러분, 감히 말씀드리지만 죽기 전에 유서를 남길 수 있는 건 특권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죽음 앞에서 그런 특권을 누릴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대부분은 찍소리도 못하고 죽어버리죠. 가장 어중간한 순간에 말입니다.
인물 난 그저께 아침에 트럭에 치여 즉사한 사람을 봤어요. 세금 신고를 하러가던 중이었는지 사방에 세금 관련된 서류뭉치가 흩어져 있었어요.
인물 12년 전 우리 고모는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다가 심장마비로 죽었어요. ‘나에게로의 초대’ 2절 하이라이트 부분을 부르던 중에요. 이틀 뒤가 결혼식이었는데.
인물 얼마 전 내 친구 부인이 청소기 전원을 켜다가 감전되어 죽었어요. 죽은 엄마를 3살짜리 아들이 지켜보고 있었죠. 5시간 동안이나 말이에요.
인물 우리 아버지는 양로 병원에서 돌아가셨어요. 거의 1년 동안 의식이 없었어요. 살아 있는 내내 입만 벌리고 있다가 돌아가신 뒤에야 겨우 닫았죠.
인물 자신이 죽는 지도 모르고 죽어버렸네.
인물 자신이 살아있는 지도 모른 채 살고 있었을 텐데.
인물 얼떨결에 뚝딱 생을 마감하다니.
인물 남기는 말 한마디 없이.
강사 그것과 비교하면 우리는 행운아지요.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때에, 삶과 죽음을 모두 의식하면서, 죽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우린 좀 더 자살에 긍지를 가져야 합니다. 자살은 필요 이상으로 하향평가 되고 있어요. 뭐든지 장점이 있기 마련인데 말입니다.
인물 맞아요. 사람들은 전쟁과 핵무기의 순기능에 대해서 얘기하죠.
인물 독재와 매매춘과 마약에 대해서 찬성하기도 하구요.
인물 그런데 왜 자살에 대해서는 그렇게 진저리를 치는 거죠?
인물 군인과 매춘부가 다 자살해버리면 곤란하니까?
강사 자자, 여러분, 다시 우리 수업으로 돌아오도록 합시다. 한 사람씩 나와서 유언을 말해보도록 하세요. 유서를 작성하는 거라고 생각해보는 겁니다. 유서의 내용을 들어보고 제가 여러분께 어울리는 자살법을 추천해드리겠습니다.
인물들 자살법이요?
강사 이왕이면 자신에게 어울리는 자살이 좋지 않겠어요? 어떤 학자는 83가지로 자살법을 분류해 놓았더군요. 희한한 기구를 사용하거나, 동물을 이용하기도 하고, 가정용 세제를 활용한 기상천외한 방법까지……. 하지만 전 조금 보수적이에요. 전통적인 방법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더 품위가 있지요. 죽음에 더 집중할 수 있구요. 아, 우리나라에서 총기 소유가 불법이라는 건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총기 자살이야말로 이미 자살 분야에서는 고전 중에 고전인데 말이죠. 가장 확실하고 간단한 방법인데다가 가장 대중적이에요. 언제, 어디서나, 누구라도 가능하니까요. 이 손가락 하나만 있으면 말입니다.
강사가 자신의 머리에 총을 쥔 것처럼 손가락을 겨눈다.
강사 모두들 우리나라가 자살 선진국이니 뭐니 떠들어대지만, 천만해요. 총이 없이는 여전히 자살 후진국을 면할 수 없을 겁니다.
인물들 모두 자신의 손가락을 들고 쳐다본다.
강사 자,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자살 연습을 해보도록 합시다. 어디보자, 일단 거기 계신 분부터 시작해 볼까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