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가 인물3을 지목한다. 인물3이 쭈뼛거리며 앞으로 나온다. 강사는 인물3과 정식으로 악수를 한 후 인물3이 앉았던 의자에 앉는다. 옷차림을 가다듬은 인물3이 관객들에게 인사하고는 입을 연다.
인물3 엄마.
강사 하이고야, 첫 바람부터 ‘엄마’가 나오는구만.
인물3 엄마. 난 오늘 죽기로 결심했어요. 월요일(공연 당일 요일)은 죽기에 참 좋은 날이에요. 하지만 경솔하게 결심한 건 아니에요.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온 일이거든요. 정말 오랫동안이요. 결심하기 전까지는 괴로웠지만 이제는 거짓말처럼 마음이 편해요. 다만 엄마에게는 진심으로 미안해요.
갑자기 강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분노에 사로잡혀 와락 소리를 지른다.
강사 미안하면 죽지 말아야지, 이 시팔 새끼야-. (시팔 년아.)
인물들 모두 두려움과 공포에 질려 강사를 바라본다. 침묵. 강사는 곧 정신을 차린다.
강사 아아,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해요. 제가 실수를 했네요. 다른 뜻은 없습니다. 아무 뜻도 없어요. 이유 없이 터져 나오는 발작 같은 거예요. 머리가 두 쪽으로 쪼개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가끔 이런 일이 일어나죠. 어쩌다가요. 모두들 그렇잖아요. 다시 한 번 사과드리겠습니다. 신경 쓰지 마시고 계속하세요. 자, 자, 어서요.
인물3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옷차림을 바로 한다.
인물3 엄마. 엄마는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고 생각하죠? 조금만, 조금만 더 노력했다면 달라졌을 거라고 믿는 거죠? 하지만 대체 사람은 얼마나 더 열심히 살아야 하는 걸까요. 난 정말 잘 해보려고 했어요, 엄마. 아시잖아요. 난 정말 잘 해보려고 했어요. 처음부터 이런 건 아니었는데. 나도 참 좋았던 시절이 있었죠. 참 좋았던 시절이 있었어요.
강사 아, 정말이지 이런 신파는 참을 수가 없…….
인물들 쉬잇.
인물3 내 공장에서는 하루에도 몇 천개씩 넥타이를 생산해 냈어요. 기계는 일요일에도 쉬지 않고 돌아갔어요. 크게 히트 쳤었던 그 개구리 무늬 넥타이 기억 하세요? (양손을 비비며 웃는다.) 매일 주문이 쏟아져 들어왔어요. 그 때는 남자라면 반드시 넥타이를 매야 했고, 남자들은 계속 태어났으니까요. 난 여자들도 넥타이를 매는 진정한 남녀평등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농담을 하곤 했어요. 아니, 어쩌면 농담으로 그친 게 잘못이었나 봐요. 분홍색 레이스 넥타이나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망사 넥타이를 만들어야 했어요. 여배우들에게 협찬도 하고, 패션쇼도 열고, TV에 광고도 하고, 뭐든지 다 해봤어야 했어요. 그랬으면…….
강사 저기, 유서에 그런 시시콜콜한 얘기까지 할 필요는 없…….
인물들 쉬잇.
인물3 그 때는 정말 의기양양했어요. 그 때 내가 얼마나 큰 소리로 웃었는지 엄마도 기억하죠? 우렁찬 내 웃음소리가 정말 듣기 좋았었죠?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의 그 주눅 든 모양새가 그렇게 웃길 수가 없었어요.
강사 자아, 그럼 그 때처럼 한 번 크게 웃어보세요. 우렁차게요.
인물3이 큰 소리로 웃자 모두 따라 웃다가 갑자기 인물3이 정색하자 모두들 웃음을 멈춘다.
인물3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모든 일이 잘 되어 가던 그 때에도, 나는 이 모든 게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잘 몰랐어요. 1 더하기 1이 3이나 4가 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만유인력의 법칙도 모르면서 함부로 땅을 딛고서 아장아장 걸음을 떼는 어린애처럼 나는 온 세상을 휘젓고 다녔어요. 엄마, 내가 멍청했나요? 내가 게을렀어요? 난 분명히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대체 언제부터 그게 도박이 되어버린 거죠? 왜 별안간 넥타이가 구시대의 산물이 되어버렸죠? 정치인들부터 앞 다투어 넥타이를 벗어던질지 내가 어떻게 알 수 있었겠어요?
인물2 누군가 넥타이로 목을 조를까봐 겁이 났던 모양이지.
인물1 1에 1을 더하면 10이 된다고 우기는 놈들.
인물4 정작 자살해야하는 건 바로 정치인들인데.
강사 정치인들도 하고 있습니다. 다만 다른 직종에 비해 자살율이 현저히 낮다는 게 문제지요. 저 같은 전문가들이 정치인들의 자살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다방면에서 노력하고 있지만 쉽지가 않아요.
인물3 엄마. 정신을 차려보니 남은 건 빚뿐이었어요. 얼마인지 아세요? 얼마인지 아시냐구요. 무려 10사람이라도 너끈히 자살하게 만들 만큼 많아요. 그만큼이나 많다구요. 그래도 난 3년이나 버텼잖아요. 무려 3년이나. 그런데 그 3년 동안 빚만 857,492,183원 더 늘어났어요.
인물들 기하학. 망할 놈의 기하학.
인물3 엄마,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번 판은 내가 진 것 같아요. 그러니 깨끗이 물러나려구요. 아니요. 고생이 싫어서가 아니에요. 평생 동안 빚을 갚는 것도, 빚을 못 갚아서 감옥에 가는 것도 두렵지 않아요. 어차피 살아있으면 무언가는 해야 하니까요. 문제는 앞으로가 너무나 뻔하다는 거예요. 평생동안 하게 될 그 뻔한 후회들, 앞으로 평생 동안 쓸 그 뻔한 일기들을 지금 여기서 미리 다 써 볼 수도 있어요. 매일 똑같은 내용으로 채워지거나, 매일 같은 페이지를 다시 읽게 되겠죠. 그렇게 10년, 20년, 30년……. (침묵) (갑자기 흥분하며) 아, 그래요. 여름에 내놓았던 신제품, 그게 문제였던 것 같아요. 맞아요. 틀림없어요. 파란색은 이미 유행이 지나고 있었는데 바보처럼 파란색 넥타이를 수만 개씩 찍어내다니. 파란 물결무늬, 파란 호피무늬, 파란 직소무늬, 파란 하트무늬, 파란 땡땡이 무늬, 파란 체크무늬, 파란 낙엽무늬, 파란 왕관무늬, 파란 덩쿨무늬, 파란 딸기무늬…….
인물들 잠깐, 파란 딸기무늬요?
인물3 그 때는 그게 재치 있어 보였거든요. 아, 그 때 여름 신제품을 노란색으로 했더라면. 그랬다면 이런 꼴이 안됐을 텐데. 노란 물결무늬, 노란 호피무늬, 노란 직소무늬, 노란 하트무늬, 노란 땡땡이 무늬, 노란 체크무늬, 노란 낙엽무늬, 노란 왕관무늬, 노란 덩쿨무늬, 노란 딸기무늬…….
강사 잠깐, 잠깐만요. 제발 그만. 신세타령은 거기까지만 하세요. 난 유서가 구질구질해 지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인물3 하지만 난 더 말하고 싶어요. 내 인생은 후회로 가득해요. (눈물을 쏟는다)
강사 아이쿠, 세상에, 눈물이라니.
강사는 눈물이 전염병이라도 된다는 듯 몸을 피한다.
강사 거 참, 현실과 연극을 구분하지 못하는 3류 배우처럼 굴지 말아요. 결말이 바로 눈앞에 있지 않습니까. 당신의 과거는 이미 당신에게서 영원히 멀어졌습니다. 이제 그건 그 누구의 과거도 아니에요. 그런데 뭣 때문에 후회를 하고 뭣 때문에 눈물을 보인단 말입니까.
인물1이 손수건을 꺼내 인물3에게 준다. 인물3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다.
인물3 미안합니다. 미안해요.
강사 여러분. 난 유서에서 눈물을 금지하겠습니다. 중요한 순간이 연민과 의심으로 얼룩지다니, 부끄러운 일이니까요. 유서로 눈물자국을 찍어내느니 차라리 유서에 침을 뱉어 버리세요.
강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침을 뱉는다. 인물들 모두가 바닥에 침을 뱉는다. 인물3도 눈물을 닦아내며 그들을 따라 침을 뱉는다.
강사 자아, 이제 마무리 하시죠.
인물3이 다시 관객들을 바라보며 옷매무새를 가다듬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