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자살수업 (6)

by 곡도



인물3 엄마, 돈은 아마 도박꾼들이 만들어 냈을 거예요. 이 세상을 도박판으로 만들기 위해서요. 모든 사람들을 도박꾼으로 만들기 위해서요. 맨 처음 나에게 100원짜리 동전을 쥐어주면서 이것이 세상의 문을 여는 열쇠라고 말해준 건 누구였나요? 엄마였나요?


인물4 대체 아빠들은 어디 있는 거죠?


인물1 자기 엄마와 함께 있겠죠. 우리 모두가 그렇듯이요.


인물3 엄마, 날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난 적에게 등을 돌리고 도망친 게 아니에요. 오히려 싸워야 할 상대를 잃고 겸손해진 거예요. (침묵)


강사 좋아요. 좋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자 그럼…….


인물3 (빠른 말투로) 엄마, 내 시신은 화장을 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강이나 바다에 뿌리는 건 싫어요. 납골당도 무섭구요. 그냥 유골함에 넣어서 집 한쪽에 놓아두면 안 될까요? 텔레비전 옆에 화분을 치우고 거기에 놓으면 좋겠어요. 아니면 안방에 있는 선반 위도 좋구요.


강사가 끼어들려 하지만 실패한다.


인물3 (빠른 말투로) 그리고 잊지 말고 유산상속포기 신청을 하도록 하세요. 가족들뿐만 아니라 가까운 친척들도 모두 해야 돼요. 빚은 나 대신 다른 누군가라도 집어삼키려고 뱀처럼 주변을 기어 다닐 거예요. 그리고 제 침대 밑에 검은색 종이상자 안을 보면 현금 1200만 원이 있어요. 예전에 제가 친구한테 꿔줬던 돈인데 얼마 전에 받아냈어요. 그걸로 제 장례를 치르고 남은 돈은 보일러 교체할 때 쓰세요. 벌써 몇 번이나 고장이 나서 한 겨울 내내 애를 먹었잖아요.


강사가 끼어들려 하지만 실패한다.


인물3 (빠른 말투로) 제 소지품은 모두 태워주세요. 주위에 나누어 줄 생각 마시구요. 기분 나빠할 거예요. 대신 가구는 싼값에라도 팔아버리는 게 좋겠어요. 책상은 좋은 거니까 20만 원 이하로는 팔지 마세요. 아, 신문은 이번 달부터 넣지 말라고 했어요. 엄마는 신문을 안보잖아요. 혹시 그런데도 계속 넣으면 본사에 고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으세요. 그리고 엄마가 몇 번이나 부탁했었던 앵두나무, 제가 어제 한 그루 구해서 마당에 심었어요. 앵두나무는 물을 자주 줘야 돼요. 그래야 꽃이 많이 필 거예요. 앵두가 많이 열리게 하려면 퇴비와 모래를 2대 1로 섞어서 물을 붓고…….


더 이상 참지 못한 강사가 발을 쾅쾅 구르며 앞으로 나온다.


강사 (고함을 치며) 그만, 그만, 그만. 제발 그만하세요. 유서 쓰다가 늙어 죽을 참입니까? 살아온 인생보다 유서가 더 길어지겠군요. 유서라고 해서 마음대로 막 떠들어댈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자서전이나 회고록이 아니라구요. 유서에도 미학이 있단 말입니다. 안되겠어요. 더 이상은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딱 한마디만 더 하고 입을 다무세요. 영원히 말입니다.


인물3,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든다.


인물3 엄마, 미안해요. (침묵)


강사 (박수를 치며) 휴우, 좋습니다. 좋아요. 잘하셨습니다. 뭐 좀 청승맞고, 읍소 투성이에, 내용이 잡스럽고, 사족들이 너저분하고, 터무니없이 길긴 했지만, 최악의 유서는 아닙니다. 최악은 아니에요. 자, 그럼 이제 당신에게 어울리는 자살법을 알려드리죠. 목을 매세요.


인물3 목을요?


강사 목을 매는 건 당신처럼 유약하고 무기력한 사람에게 잘 어울리는 방법입니다. 특별한 도구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장소의 구애를 받지도 않고, 소란스러울 일도 없어요. 무엇보다 당신에겐 넥타이와의 연관성이 있잖아요? 창고에 가득 쌓여있는 넥타이 재고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한 번도 안 해 본 건 아니겠죠? 장담하건대 어떤 색깔의 넥타이로 목을 맬까 이것저것 걸어보기도 했을 겁니다. '넥타이 파티'라는 옛말도 있잖아요? (어깨 춤을 춘다) 자, 자, 이럴게 아니라 실제로 한 번 연습을 해봅시다.


강사는 여행용 가방을 뒤지더니 긴 로프를 하나 꺼낸다.


강사 여기 있네요. 이건 우리 할머니가 사용했던 빨랫줄입니다. 층계 난간에 목을 매셨죠. 환갑을 며칠 앞두고서요. 80킬로그램에 가까운 거구가 사흘 동안이나 매달려 있었는데도 빨랫줄은 멀쩡했어요. 튼튼한 일제 빨랫줄이죠. 뭐, 죽는 순간까지 애국자가 되고 싶다면 국산을 쓰셔도 됩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자살도 메이드 인 코리아가 아닙니까.


인물 우리의 뇌가


인물 우리의 영혼이


인물 우리의 성기가


인물1,2,4 메이드 인 코리아인 것 처럼요.


강사 다른 건 몰라도 자살만큼은 메이드 인 코리아가 세계 최고잖아요. 독보적이죠. 타의 추종을 불허해요. 미약하나마 저 역시 거기에 일조하고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이 명성을 이어간다면 제가 강연 초청을 받아 해외로 출장을 나가게 될 날도 멀지 않았어요. 어쩌면 외국인들이 제 자살 강연을 듣기 위해 줄지어 입국하게 될지도 모르구요. 이제 자살은 중요한 자원입니다. 하루라도 빨리 해외 시장을 개척해야 해요. 그런데도 아직 제대로 된 자살 상품 하나 없다는 건 참 부끄러운 일입니다. 국가 경쟁력과 국격을 높이기 위해 정치인들이 좀 더 애를 써야 합니다.


인물 그들도 최선을 다 하고 있어요.


인물 자신들을 혹사하면서요.


인물 결코 그들의 공을 잊으면 안 돼요.


강사 잊다니요. 천만해요. 이건 비밀이지만 저는 그들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그들이 자살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으로 여기고 있어요. 묵묵히 뒤에서 국민을 앞세우는 것이 정치인들의 사명이고, 오직 자살에서만 그 사명을 충실히 실천하고 있죠.


인물1,2,4 정말 민주적이야.


강사 자자, 그럼 다시 수업을 계속하도록 할까요. 우선 매듭 만드는 법부터 알려드리겠습니다. 모두들 간과하기 쉽지만 이게 아주 중요하거든요. 많은 사람들이 목을 매는 도중 매듭이 풀려버리는 바람에 자살에 실패하곤 하죠. 정말이지 그런 망신은 다시없을 겁니다. 이래서 실습이 필요한 거예요.


강사는 인물들에게 매듭 매는 시범을 보인다.


강사 자아, 마지막으로 이렇게 당기면 코끼리가 와서 목을 매도 절대로 풀리지 않지요. 어떻습니까?


강사가 끝이 동그란 모양으로 묶인 빨랫줄을 인물들에게 보여준다.


인물들 허공에 매달아요. 허공에 매달아요.


강사 좋아요. 그럽시다.


강사가 빨랫줄을 공중으로 던져서 무대 한가운데 달아맨다.


인물들 더 높이. 높이.


인물들 더 낮게. 낮게.


인물들의 지시에 따라 강사는 액자라도 거는 것처럼 끈 높이를 조절한다. 둥글게 매듭지어진 빨랫줄이 허공에 늘어진다. 강사는 빨랫줄 한쪽 끝을 여행 가방에 묶고는 둥그런 매듭 밑에 의자를 가져다 놓는다. 그리고 의자 주위를 돌며 빨랫줄을 감상한다.


강사 자, 어떻습니까. 보세요. 꼭 예술작품 같군요. 자살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던 사람도 달려가 목을 매고 싶을 겁니다.


인물들도 의자 주위를 돌며 빨랫줄을 바라본다.


강사 똑바로 보세요. 피하지 마시구요. 우린 이게 아름답다는 걸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게 아무리 막막하더라도 말입니다. 이거야 말로 예술의 본질이 아닐까요? 예술의 본질이란 결국 종말이니까요. (인물3에게) 자, 이제 한 번 올라가 보세요.


인물3이 의자 위에 올라간다. 둥그런 매듭이 인물3의 얼굴 바로 앞에 와있다. 인물3은 그 둥그런 매듭을 통해서 관객들을 바라본다.


강사 한 번 목에 걸어보세요. 머리를 밀어 넣어 보시라구요. 넥타이 매듯이 말입니다. 목에 뭘 매는 건 당신이 전문가가 아닙니까.


인물3이 빨랫줄을 목에 건다.


강사 기분이 어때요?


인물3 모르겠어요.


강사 (버럭 화를 내며) 기분이 어때요?


인물3 모르겠어요.


강사 좋습니다. 좋아요. 모든 게 제대로 됐습니다. 완벽해요. 이제부터는 서두를 필요가 없습니다. 천천히 그리고 충분히 이 순간을 누리세요. 당신에게 더 이상 ‘더 이상’이란 건 없으니까요. 이 시간은 오직 당신만의 것입니다.


인물3 모르겠어요.


강사 정확히 말하면 아직 목에 줄이 걸린 건 아닙니다. 걸쳐있을 뿐이죠. 여전히 발밑에 의자가 있으니까요. 이제 실전에서는 그 의자를 툭 밀어주기만 하면…….


인물3이 의자를 발끝으로 쳐낸다. 의자가 옆으로 쓰러지며 인물3이 허공에 매달린다. 인물들 입에서 ‘와’ 하는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강사는 기겁을 한다.


강사 이런, 씨발. 누가 지금 하래. 에이 씨, 이봐요. 다들 보고만 있지 말고 이 사람 좀 잡아 올려요. 여기서 죽으면 골치 아프니까.


인물들이 달려들어 인물3의 다리를 잡아 올린다. 그 사이에 강사는 가방에 묶어 놓았던 끈을 풀어낸다. 인물3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는 그대로 쓰러진 채 일어나지 못한다.


강사 이봐요, 여기서 이러면 어떡합니까. 우리에게 송장이라도 치우게 할 생각이었어요? 그리고 요새는 자살 방조죄라는 게 있어서 잘못 걸리면 된통 일이 커진다구요. 정말 민폐가 따로 없군요. 일어나세요. 어서요. (인물3을 일으켜 세운다.) 자살은 집에 가서 하시란 말입니다. 아니면 뒷산에라도 올라가시던 지요. 왜 산 골짜기마다 나무가 빽빽하게 심어져있겠어요. 그중 마음에 드는 나무를 하나 골라잡으세요.


인물3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고 온통 얼이 빠져있다. 목에는 빨랫줄이 여전히 걸려있다. 강사는 인물3의 옷매무새를 만져준다.


강사 자, 됐습니다. 좋아요. 훌륭해요. 더 이상 가르칠 게 없군요. 이제 집으로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빨랫줄 끝을 인물3의 손에 쥐어주며) 이 빨랫줄은 졸업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사양하실 거 없어요. 저희 할머니도 기뻐하실 겁니다. 꼭 성공하길 바랍니다.


인물3은 자신의 목에 매여 있는 줄 끝을 두 손으로 잡은 채 아무 말 없이 퇴장한다. 모두들 그 모습을 지켜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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