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이 어땠어?”
나는 바싹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기분?”
“떨어질 때 말이야. 그때 기분이 어땠냐고.”
“기분?”
그 아이는 우물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사실은, 좀 이상하기는 했어.”
“어떻게?”
“그게, 민주 너도 그 나무가 얼마나 높은지 알지? 2층보다도, 3층보다도 더, 더 높잖아. 기철이 자식도 못 올라가고 포기했었잖아. 나무 뒤쪽으로 잡기 쉬운 가지가 있는데 그걸 모르고 멍청하게. 그 가지를 잡고 나무 기둥을 차면서 뛰어 올라서 다음 가지를 잡으면 그 다음부터는 일도 아니거든. 내가 얼마나 빨리 올라가는지 너도 봤어야 했는데. 열 개, 아니 스무 개가 넘는 가지를 단숨에 올라갔단 말이야. 그러고 나서 위를 보니까 그 노란색 연이 바로 눈앞에 있는 거야. 저기 저 병이 있는 정도에 말이야.”
친구는 침대 맡에 걸려 있는 링거병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자아, 조금만 더 손을 뻗어야지 하고, 이렇게 발끝을 세워서 몸을 앞으로 기울였거든. 그런데 밟고 있던 나뭇가지가 휘어지면서 몸이 흔들리더니, 내 몸이 공중에 붕 떠 있는 거야. 그게, 영 거짓말같이 느껴지면서, 뭐랄까, 누군가의 장난에 깜빡 속았다는 걸 깨달았을 때 화가 나면서도 웃음이 터질 것 같은 그런 기분이랄까. 그리고는 가차 없이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가슴이 철렁하더니 그다음에는 얼떨떨해지면서, 아, 죽는구나, 이렇게 죽는구나, 이게 죽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친구는 자신의 얘기에 완전히 몰입되어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하지만 본인은 그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옆 환자 침대에 누워서 잡지를 보고 있던 볼이 홀쭉한 중년의 여자가 여러 번 우리를 흘겨본 것도 몰랐을 것이다. 단지 친구는 자신의 경험을 나에게 이해시키는 게 너무나 힘이 드는 일이라는 듯, 한마디 한마디를 끊어가며 분명하게 말하는 데 온 힘을 쏟고 있었다. 그런 열성적인 친구의 눈빛과 말투에 홀려서 나 역시 바짝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래서?”
“그런데, 그러더니 말이야, 그다음이 정말 이상한 부분인데…….”
친구의 목젖이 크게 한 번 솟아올랐다.
“갑자기 내가 이제까지 살아왔던 일생이 좌라라라락 눈앞을, 아니 머릿속을 지나가는 거야.”
“뭐어?”
이게 무슨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인가 싶어서 나는 웃음이 터졌다.
“진짜야. 그러니까 뭐랄까, 시간으로 따지자면 아주 잠깐인데, 그게 잠깐이면서 잠깐이 아닌 것처럼, 순간적으로 말이야, 아기 때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이, 내가 기억하고 있지 못했던 일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차례차례 지나가는 거야. 그러니까, 마치 영화처럼. 그래, 맞아. 꼭 한 편의 영화 같았어. 내가 관객이 되어서 내가 주연으로 등장한 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았어. 내 일생에 대한 영화를 말이야.”
친구는 말을 멈추고 멍한 눈으로 그때의 광경을 더듬었다. 나는 놀라움과 의구심에 휩싸인 채 입을 헤벌리고 있었다.
“그래서, 네 일생을 죽 보니까 어땠어?”
“어땠냐고? 글쎄. 사실 별로였어. 영화로 치자면 장난 아니게 시시하고 지루한 영화였어. 그냥 학교 가고, 친구들이랑 돌아다니고, 시험 보고, 잠자리에 들고, 밥 먹고, 그런 평범한 날들만 수없이 반복되더라. 그걸 보니까 내가 이제까지 참 별 볼 일 없이 살았더라고. 그렇게 죽었으면 진짜 억울했을 거야.”
친구는 나이에 맞지 않게 어른스러운 말투를 꾸며내며 입술을 삐쭉거렸다.
“그래서 앞으로는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어. 신나는 일들도 많이 만들고, 새로운 경험도 하고 말이야. 그래야 나중에 진짜 죽을 때 내 인생을 다시 한 번 더 보게 되면, 아, 참 재밌고 멋지게 살았구나, 할 수 있을 거 아냐?”
그 때 자신만의 생각에 잠겨 비범하게 반짝이던 친구의 눈빛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은 내가 열두 살 되던 해 여름의 일로, 동갑내기 친구는 나뭇가지에 걸린 연을 잡겠다고 나무 위에 올라갔다가 떨어져서 병원에 입원한 참이었다. 자칫했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던 큰 사고였지만 부상은 미미한 편이어서 친구는 며칠 뒤에 퇴원했고, 그 뒤로 대여섯 번쯤 같이 어울리다가 그 친구가 이사를 간 뒤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곧 그 아이의 이름과 얼굴은 까맣게 잊어버렸지만, 나무에서 떨어지던 순간 자신의 인생을 처음부터 다시 보았다는 그 아이의 말은 그 후로도 죽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런 경험을 한 사람들이 제법 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심지어 어떤 학자의 주장에 따르면, 절명의 순간엔 누구나, 최소한 일생에 한 번은 반드시 이와 같은 경험을 한다는 것이었다. 다만 그런 현상이 왜 일어나는지는 분명치 않았다. 죽음을 인정할 수도 해석할 수 없는 뇌가 과부하라도 일으키는 걸까. 아니면 스스로의 삶을 마감하는 심리적인 절차인 걸까. 흥미로운 주제이긴 했지만, 나는 그 원인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아니, 그 원인이 무엇이든지 간에 별로 상관없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중요한 건, 마지막 순간에 나의 삶 전체가 한 편의 영화처럼 눈앞에 펼쳐진다는 사실이었다. 곧바로 흩어져버리는 줄 알았던 일상의 한순간 한순간이 실은 리얼리티 쇼처럼 빠짐없이 기록되고 방영된다니.
그 뒤로 나는 나만의 이야기를, 이야기만의 나를 꿈꾸게 되었다. 나는 어떤 사람이 아니라 어떤 이야기가 되고 싶었다. 어떤 삶이 아니라 어떤 죽음을 쫓았다. 비록 관객은 나 혼자일 뿐이고, 내 이야기란 게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할 만큼 시시할지도 모르지만, 그제야 나는 어느 정도 실재하고 있다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따위는 믿지 않으며, 세상만사가 우연과 허무의 산물일 뿐이라는 걸 자연스럽게 감지하게 되는 요즘의 아이였던 나에게, 그것은 끝없이 넓고 막막한 불모의 사막에서 다른 무엇보다 제일 먼저 피라미드를 쌓아 구심점을 만들고 나서야 문명을 시작할 수 있었던 원형적인 사건과 비견할 만한 일이었다.
물론 이런 내용들을 그 어린 나이 때에 조목조목 꼽아보았던 것은 아니다. 친구의 얘기를 듣는 순간 느꼈던 강렬하지만 막연했던 인상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구체화되어왔던 것이다. 아니, ‘구체화’되었다는 표현은 취소해야겠다. 나는 지금 약간의 흥분 속에서 지껄여지는 대로 말하고 있다. 구체화된 게 있다면 나의 언변과 비겁뿐이다. 나는 이야기가 이야기 되어 가는 대로 나를 끌고 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나는 친구의 침대 맡에 앉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귀를 쫑긋이 기울이고 있었던 어린 시절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때의 두근거림. 그것이 지금도 내가 알고 있는 전부이다. 그러니 위에서 거창하게 늘어놓았던 설명들이 다소 조잡했다는 걸 나도 인정해야겠다. 특히 피라미드를 들먹였던 자아 과잉적인 비유는 낯뜨겁기까지 하다. (나는 저 부분을 여러 번 지웠다가 다시 고쳐넣었다.) 그러나 ‘두근거림’을 진솔하게 글로 풀어낸다는 건 내게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가장 은밀하고 진지한 것일수록, 그리고 그것을 이해받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더 우스꽝스러워 보이기 마련이니까.
아니, 어쩌면 내 생각이 정말 우스꽝스러운 건지도 모르겠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도 내심 비웃었을 게 틀림없다. 성찰의 계기로 삼아야 했을 소소한 일화를 가지고 공상의 재료로 삼았다고 지적하면서, 이왕 인생이 한 편의 영화가 될 거라고 믿었다면 좀 더 야망을 가졌어야 하지 않느냐고 충고할 것이다. (놀랍게도 눈썰미 있는 독자들은 벌써 내가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는 걸 눈치 챘을 테니까). 세계 평화, 전쟁, 정의, 정치, 권력, 돈, 영웅, 대기업, 예술, 희생, 사랑 등등 누구나 흥미를 가질만한 주제로 진취적인 이야기를 꾸미거나, 혹은 최소한 연쇄살인마나 신출귀몰한 범죄자 이야기 정도는 돼야 그럴듯하지 않겠냐고 비꼴지도 모른다. 가장 형편없는 이야기는 부도덕한 이야기가 아니라 지루한 이야기라고, 감동도 비극도 없는 엑스트라의 영화가 무슨 재미가 있겠냐고 반문하면서 말이다. 그들의 말이 옳다. 나 역시 때때로 장대하고 극적인 이야기들에 질투를 느껴왔다. 내 인생처럼 시시한 이야기도 과연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까, 열등감과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그저 소시민일 뿐이다. 위대해지는 것도 타락하는 것도 모두 어렵고 두려운 소시민 말이다. 남들에게 들려주기에는 은밀하고 남부끄러운 이야기, 흔해빠져서 여기저기 발길에 차이는 이야기, 누구도 관심 갖지 않는 그저 미세하고 치사한 이야기들만이 나의 몫이다. 하지만 남들이 버린 쓰레기들을 열심히 모아 집 안에 보물처럼 쌓아놓는 사람들처럼, 나에게도 나름의 성의와 만족은 있다.
이런 나를 사람들은 낙오자라고 부를까? 다행히도 내가 태어나고 또 한 번도 실제로 떠나본 적이 없는 이 서울에서는 비겁자나 기회주의자, 심지어 낙오자로 산다는 것이 그리 어렵거나 불행한 일은 아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의 큰 권력을 형성할 수 있을 정도로 수가 많고, 도시는 그들의 잡스럽고 비루한 이야기들을 좋아한다. 여전히 도시는 불합리하고, 모순되고, 감상적으로 말하자면 지독한 곳이지만, 그래도 기적처럼 완벽한 균형을 이루며 여전히 견고하다. 나는 그런 평화로운 도시의 세대 중 한 명이다. 바야흐로 일회용 기저귀에 똥을 싸면 누군가 바로바로 깨끗이 닦아주었던 결벽의 세대 말이다.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삶의 의미나 사후 세계는 더 흐지부지하다. 열정을 가진 적도 없다. 가져보았자 아주 짧은 순간뿐이고 어느새 놀라울 정도로 감쪽같이 사라지곤 한다. 선이니, 진리니, 정의니 하는 단어들은 무례하게 겨드랑이를 간지럽힐 뿐이다. 특별히 수긍하는 철학이나 이념도 없고, 특히나 ’이즘’이라는 꼬리표를 단 모든 사상은 ― 휴머니즘을 포함해서 ― 미련해 보인다. 사명감이나 명예심은 단순히 취향의 문제일 뿐이다. 그리 똑똑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멍청하지도 않다. 전쟁을 겪어본 적도 없다. 극심한 가난도 모른다. 무언가에, 혹은 무언가를 위해 진심으로 대항해본 적도 없다. 심지어 터질 듯이 분노한 적도, 끔찍하게 좌절해본 적도 없다. 체념이나 실망은 나 자신보다도 더 오래되었고, 웃고 돌아서면 늘 어딘가 시무룩하다. 오만 때문이 아니라 경험에 의해서 나에게는 모든 것이 시시해 보인다.
아하, 어느새 나는 다시 지껄여지는 대로 말하고 있다. 딱히 내 자신에 대해 설명할 생각은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약간의 변명은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자신을 소개하기도 전에 자신에 대한 변명부터 앞서는 나의 나쁜 버릇 때문이다. 하지만 더 이상 구구절절 늘어놓지는 않겠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내 삶이 한 편의 이야기가 된다고 해서 이 모든 것이 어떤 의미로 가득 찰 리 없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다. 의미는 전혀 다른 문제이고, 너무나 다른 문제이다. 그래서 나는 원인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 것만큼이나 의미에 대해서도 냉담하다. 다만 저절로 살아지는 이 삶 동안 나는 무엇인가를 해야만 했고,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이보다 더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이 말하길, 인생은 짧다고 한다. 그러나 문득 고개를 들어보면 언제나 끝도 없는 인생이, 정말이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인생이 이어져 있다. 그 무엇을 해도 도저히 채워지지 않을 것 같은 길고도 긴 인생이다. 그것은 한없는 무중력의 진공과 같고, 사실 진공 자체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 인생이 한 편의 이야기가 된다면, 시작도 있고 끝도 있고, 위도, 아래도, 옆도 있게 될 것이다. 그러면 나도 진정 살 수도 있고, 또 진정 죽을 수도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순간이 오면, 고된 하루 일과를 끝낸 뒤 집에 돌아와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소파에 파묻혀 졸린 눈으로 텔레비전을 보는 사람처럼, 나는 그렇게 내 이야기를 감상하고 싶다.
[추신]
내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에게 한 가지만은 솔직하게 말해두어야겠다. 나는 맹세코 진실만을 얘기할 것이지만, 독자들은 결코 진실과 진심을 헷갈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진실을 얘기할 의무가 있지만 진심을 얘기할 의무는 없으며, 오히려 내가 원한다면 나의 진심을 감추고, 왜곡하고, 훼손할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가 나에게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이해해주어야 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