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자살수업 (8)

by 곡도





인물4 (양팔과 양다리를 벌리고 자신을 앞으로 드러내며) 점차 나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어요. 모든 게 느슨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꼭 손에 잡히는 대로 너덜너덜 기워진 천조각처럼 모든 게 순전히 우연에 의해, 아니면 당사자 없는 실수에 의해, 혹은 전혀 대수롭지 않은 필요에 의해, 그냥 임시로 이렇게 모여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물4는 고장난 인물처럼 몸을 부자연스럽게 움직인다.


강사 나는 ‘임시’라는 단어를 좋아합니다. 유연하고 사무적인 느낌을 주지요. 한숨 돌릴 수가 있어요.


인물4 그 와중에도 나는 배가 고팠어요. 정말이지 배가 고파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난 돼지처럼 먹어댔어요. 난 진짜 한 마리 돼지 같았어요. 먹고 먹고 또 먹고, 하루 종일 먹는 생각만 했어요. 그리고는 먹은 걸 다 토해냈어요.


인물1 원래 그런 거예요.


인물2 원래 그래요.


강사 (비꼬며) 원래요?


인물4 도대체 배고픔을 느끼고 있는 게 누구죠? 밥을 먹으라고 시키는 게 누구에요? 내 뇌는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며) 여기에 있는 건가요, 아니면 (배를 가리키며) 여기에 있는 건가요?


인물2 어쨌거나 그건 당신 아이잖아요.


인물4 내 아이라고? 난 이 아이가 누군지 몰라요.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이라구요.


강사 침입자.


인물4 맞아요. 이건 침입자에요. 내 모든 걸 빼앗아 갔어요. 날 이용했어요. 날 등신으로 만들었어요. 내 꼴을 좀 보세요. 보시라구요. 난 이런 모습으로 여기저기를 뒤뚱뒤뚱 걸어 다녀요.


인물4가 우스꽝스럽게 걸어 다닌다. 강사가 인물4를 손가락질하며 낄낄거리고 웃는다.


인물들 쉬잇.


인물4 이 아이를 위해 난 음식을 입안으로 처넣어요. 이 아이를 위해 화장실에 가고, 이 아이를 위해 잠을 자고, 이 아이를 위해 숨을 쉬어요. 배는 계속 부풀어 오르고 아이는 점점 무거워져요. 이 아이가 나를 질질 끌고 다녀요. 육체가 나를 질질 끌고 다녀요. 이렇게 내 머리끄덩이를 잡고서. (머리를 감싸며) 내가 짐승이라도 된 것 같아. 내가 고깃덩어리라도 된 것 같아. 내가 공장의 기계라도 된 것 같아.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더 이상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어.


인물1 당신은 엄마에요.


인물4 (다리를 엉거주춤 벌리며) 오줌 마려워. 자꾸만 오줌이 마려워.


인물2 모성은 위대한 거예요.


인물4 (버럭 고함을 지른다.) 모성. 그건 짐승의 본능이에요. 먹고, 싸고, 발정하는 짐승의 본능. 거기에는 어떤 위대함도 없어요. 생물학적 설계와 고착된 패턴이 있을 뿐이에요. 그저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아이를 낳고…….


강사 (인물4의 뒤뚱거리는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흉내 내며)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야곱이 유다를 낳고, 유다가 베레스를 낳고, 베레스가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이 람을 낳고, 낳고, 낳고, 또 낳고, 구원이 올 때까지 계속 낳고 낳고…….


인물들 (키득거리며) 구원은 없어요.


인물4 난 그 모든 사슬의 고리를 끊어버리고 싶었어요. 당장 죽어버리고 싶었어요. 이 아이를 뱃속에 넣은 채 죽어버리려고 했어요. 그건 내게 공정해 보였어요. 아이에게는 더 공정해 보였어요. 이 모든 일을 겪지 않아도 되니까요. 왜 우리 엄마는 날 가졌을 때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요?


강사 (인물4의 뒤뚱거리는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흉내 내며)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지 않고, 이삭이 야곱을 낳지 않고, 야곱이 유다를 낳지 않고, 유다가 베레스를 낳지 않고, 베레스가 헤스론을 낳지 않고, 헤스론이 람을 낳지 않고, 낳지 않고, 낳지 않고, 또 낳지 않고, 구원이 올 때까지 계속 낳지 않고 낳지 않고…….


인물들 (키득거리며) 구원은 없어요.


인물4 모두를 위해 그게 좋아 보였어요. 모든 아이들을 위해 그게 좋아 보였어요. 그런데 모두들 내게 말하길…….


인물1 살인이에요.


인물4 그건 살인이래요.


인물2 비윤리적이에요.


인물4 그건 비윤리적이래요.


강사 저도 이런 비난에 익숙합니다.


인물4 내가 죽고 싶은 건 다 호르몬이 불안정해서래요. 살고 싶은 것도 죽고 싶은 것도 다 이 몸이 시키는 일이래요. 내 생각도, 내 바램도, 내 의지도, 내 판단도, 다 진짜가 아니라고, 진심이 아니라고, 단지 착각이라면서……. 다들 그렇게 나를 병신취급 했어요. 나를 세뇌시키려 했어요. 내가 파블로프의 개라도 되는 것처럼 날 길들이려 했어요. 나는 내 자신에 대한 내 자신의 끊임없는 의심과 배신에 진절머리가 나요.


강사가 인물4의 뱃속에서 겉옷을 낚아채서 사람 모양으로 펴든다. 인물4는 겉옷을 향해 얘기한다.

인물4 그래서 난 이 아이를 낳았어요. 그게 사람다운 일이라고 해서요. 그게 윤리적인 일이라고 해서요. 그게 엄마라고 해서요. 아이만 낳으면 모든 게 좋아질 거라고 해서요. 그래서 난 아이를 낳았어요. 그 더러운 분비물들, 쏟아지는 핏물, 뼈가 벌어지고, 생살이 찢어지고……. 나는 사람들 앞에서 가랑이를 양쪽으로 활짝 벌리고 짐승처럼 울부짖었어요. 고통 받는 짐승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어요. 도대체 뭐가 사람답고 뭐가 윤리적이라는 거죠?


인물1 아이가 태어났잖아요.


인물4 도대체 뭐가 사람답고 뭐가 윤리적이라는 거죠?


인물4는 강사가 펼쳐들고 있는 겉옷을 사람처럼 품에 꼭 껴안는다.


인물4 아이는 반년 전에 죽었어요. 아이는 머리를 다쳤어요. 침대에서 떨어졌어요. 모두들 사고로 알고 있지만, 실은 내가 아이를 집어 던졌어요. 두 다리를 잡아서 바닥으로 내동댕이쳤어요. 계속 울길래, 듣기 싫어서요. 달래려고 했지만, 아이는 계속 울었어요. 멈추지를 않았어요. 그래서 집어 던졌어요. (웃으며) 그리고 나는 지금도 여전히 먹고, 싸고, 발정해요.


인물4는 겉옷을 바닥에 떨어트린다. 강사가 떨어진 겉옷을 인물4에게 입혀주며 뒤에서 애무한다.

인물4 이제 난 믿어요. 난 죽고 싶어요. 내가 죽고 싶어요. 더 이상 그걸 의심하지 않아요. 그걸 믿지 않는다면 설사 내가 살고 싶어진다고 해도 난 그것조차 믿을 수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날 위해 울지 마세요. 이건 슬픈 일이 아니에요. 나도 전혀 슬프지 않으니까요. (침묵)


강사 와우, 멋져요. 정말 멋집니다. 아주 훌륭해요. 다른 학생들의 귀감이 될 만합니다. 우등생 상장이라도 주고 싶네요. 제 조수로 채용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안타깝게도 전 조수가 필요 없지만요. 자, 그럼 당신에게 어울리는 자살법을 알려드리죠. 당신은 물에 뛰어드는 게 좋겠어요.


인물4 물이요?


강사 익사는 정신이 혼란하고 혼미해진 분들께 잘 어울리는 자살법이죠. 깊고 차가운 물이 의심과 분노의 파편들을 모두 실어갈 겁니다. 모든 걸 처음으로 되돌릴 거예요. 양수가 차오르기 전, 당신이 한 번도 태어난 적이 없었던 시절로요. 그렇게 물은 흘러가고 다시는 거슬러 오지 않을 겁니다.


인물4 네, 좋아요. 마음에 들어요.


강사가 여행 가방을 뒤져 커다란 돌멩이들을 꺼낸다.


강사 이건 내 조카가 물에 뛰어들었을 때 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돌멩이들입니다. 물 위로 떠올라 자살이 실패하는 걸 막아주었죠. 2달 후에 강변 토목공사만 하지 않았다면 조카는 더 오랫동안 발견되지 않았을 겁니다. 조카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묻지 마세요. 휴우, 이런 일에 익숙한 저마저도 간담이 서늘했으니까요.


강사는 인물4가 입고 있는 겉옷 양쪽에 달린 커다란 주머니에 돌멩이들을 가득 채우기 시작한다. 돌멩이가 가득 찬 인물4의 옷이 바닥까지 늘어진다. 인물4는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상체를 구부정하게 구부린다.


인물들 더 넣어요. 더 많이.


인물4 무거워요.


강사 걱정 마세요. 물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모든 무게는 사라질 겁니다.


인물들 더 넣어요. 더 많이.


인물4 무거워요.


강사 당신은 저 밑바닥 끝까지 가라앉을 겁니다. 그곳은 조용할 거예요. 당신 안에 있던 모든 짐승들도 잠이 들 겁니다. 마침내 당신은 홀로 남는 거죠. 그리 긴 시간은 아니겠지만 당신은 만족할 겁니다.


인물4 무거워요.


강사는 인물4의 겉옷 단추를 차근차근 모두 채워준다. 인물4는 무거운 겉옷 때문에 점점 바닥으로 내려가더니 겉옷을 끌며 무대바닥에 몸을 웅크린다. 침묵.


강사 자, 됐습니다. 좋아요. 훌륭해요. 더 이상 가르칠 게 없어요. (창백하게 얼이 빠진 인물4를 일으키며) 이제 집으로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돌멩이가 가득 찬 양쪽 옷자락을 모아 인물4의 두 팔에 안긴다.) 이 돌멩이들은 졸업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사양하실 거 없어요. 꼭 성공하길 바랍니다.


인물4는 겉옷 주머니에 들어있는 돌멩이를 팔에 안고 아무 말 없이 퇴장한다. 모두들 그 모습을 지켜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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