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 대단한 학생이었습니다, 그렇죠? 제 정신이 아닌데다가 살인자이긴 하지만, 뭐랄까, 논란을 피하기 위해 최대한 중립적인 단어를 사용하자면, 인상적이었어요. 그렇지만 역시나 말이 너무 많아요. 다들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지, 뭔. (관객들을 쳐다보며) 마치 이곳에 자신들을 관심 있게 바라보고 있는 관객들이라도 있다는 듯이 말입니다. 그럴 리가요. 아무도 여러분의 죽음에 관심이 없습니다. 관객들은 뭐든지 무대 위로 올려놓아야 관심을 갖죠. 자기 옆 좌석에 앉은 사람이 당장 숨이 넘어가도 그들은 무대를 향해서만 박수를 칩니다. 세상 이치가 그런 거예요. (관객들을 험상궂게 쳐다보다가 순간 다시 밝은 표정이 되며) 자아, 어디 보자. 그럼 이제 두 분이 남았네요. 누가 먼저 하시겠습니까?
인물1과 2가 서로 눈치를 보다가 인물1이 앞으로 나온다.
인물1 제가 먼저 하죠. 짧게 하겠습니다. 딱히 할 말이 없거든요.
강사 앞의 두 사람도 그렇게 말했죠. 하지만 막상 저 자리에 서면 그럴 수가 없나 봅니다. 한 마디라도 더 하려고 안간힘을 쓰니까요.
인물2 일단 한 마디가 입 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소시지처럼 줄줄이 딸려 나오는 모양이에요. 가장 깊숙이 또아리고 있던 쓸개까지 모두 말입니다.
강사 말을 하도록 부추기는 게 과연 생명인지 죽음인지 저도 잘 모르겠군요. 아 참, 그런데, (인물1에게) 아까 에이즈에 걸렸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인물1 그렇습니다. 전 에이즈 환자입니다.
강사 그렇다면 자살 전문가로서 확인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네요. 혹시 하려는 자살이, 그러니까, 안락사 인가요? 안락사에 대해서는 아직 저희 업계에서도 자살이냐 아니냐 의견이 분분하거든요. 일단 저는 안락사는 자살이 아니라는 입장입니다만…….
인물1 안심하세요. 안락사는 아닙니다.
강사 휴우, 다행이네요. 일이 복잡해질 뻔 했어요. 자아, 그럼 시작해 볼까요?
인물1이 앞으로 나온다. 강사는 인물1과 정식으로 악수를 한 후 인물1의 의자에 앉는다. 인물1은 관객들에게 인사하고는 관객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입을 연다.
인물1 사랑하는 당신.
강사 그렇죠. 자살에 사랑이 빠지면 섭섭하죠. 참 통속적이기도 하지.
인물2 난 사랑 얘기가 좋아요. 반드시 슬프게 끝나거든요.
인물1 사랑하는 당신.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
강사 아니 설마, 러브스토리를 처음부터 읊을 생각은 아니겠죠?
인물2 쉬잇.
인물1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 그 날은 비가 금방이라도 올 것처럼 잔뜩 흐린 날이었어. 나는 하늘을 쳐다보느라 당신이 내게 했던 첫마디를 제대로 듣지 못했어. 나는 당신에게 ‘뭐라구요?’ 라고 말했지. 그게 내가 당신에게 했던 첫마디였어.
강사 처음이 뭐가 중요해요? 뭐든지 끝이 중요하지.
인물2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늘 처음으로 되돌아가죠.
강사 그리고는 내려앉을 곳이 없어서 다시 끝으로 되돌아오구요.
인물1 왜 나는 당신을 첫눈에 알아보지 못했을까? 왜 당신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집중하지 않았을까? 왜 모든 게 그렇게 평범하고 사소했을까?
강사 난 슬슬 속이 느글거리려고 하는데.
인물2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으니까 구구단이라도 외우고 계세요.
인물1 난 당신이 내게 했던 첫마디를 영원히 잃어버렸어. 자석에 이끌리 듯, 나는 곧 비가 올 것 같은 그 흐린 날로 돌아가고 또 돌아가지만, 당신이 내게 했던 첫마디는 도무지 들리지 않아. 뭐라구요? 나는 바보처럼 물었지. 아무런 감정도 없이, 아무런 예감도 없이.
인물2가 강사에게 뭐라고 나직이 속삭인다.
강사 (못 듣고는) 뭐라구요?
인물1 (혼잣말로) 뭐라구요?
인물2가 다시 강사에게 속삭인다.
강사 (다시 못 듣고는) 뭐라구요?
인물1 (혼잣말로) 뭐라구요?
인물2 저 사람의 연인이 처음 했던 말이 뭐였겠냐구요.
강사 무슨 상관입니까. 보나마나 별거 아니겠죠. 길을 막지 말고 비켜달라거나, 담뱃불 좀 빌려 달라거나, 무심코 혼잣말을 했거나, 아니면 누군가와 핸드폰으로 전화 통화 중이었는지도 모르죠. 그런데 듣지 못했던 바람에 그게 그만 세상에서 제일 낭만적인 순간이 되어버린 거예요.
인물1 (혼잣말로) 뭐라구요?
강사 자아, 안되겠군요. 더 이상의 ‘뭐라구요’는 금지하겠습니다. ‘뭐라구요’라는 문장만 수 십 장씩 쓰여 있는 유서를 상상해보세요. 난 그런 유서를 두고는 차마 부끄러워서 자살하지 못할 겁니다.
인물1 (침묵. 의기소침해진다.)
강사 (한숨) 좋아요, 좋아.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하도록 하세요.
인물1 뭐라구요? (사이) 그러자 당신은 웃었어. 조금 난처한 듯, 조금 쑥스러운 듯. 헤어지던 마지막 날에도 당신은 그렇게 웃었지. 조금 난처한 듯, 조금 쑥스러운 듯. 당신이 처음 했던 말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당신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은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다시는 만나지 말자. 당신은 말했지.
인물2 어휴, 꽤나 냉정하네.
인물1 그리고 당신은 웃었어. 조금 난처한 듯, 조금 쑥스러운 듯.
강사 어색할 땐 웃는 게 최고죠.
인물1 그리고 우리는 수면제를 나눠 먹었지.
강사, 인물2 뭐라구요?
강사 잠깐, 잠깐만요. 그게 무슨 소리에요? 수면제를 나눠 먹다뇨?
인물1 우린 2년 전에 동반 자살을 시도했어요.
인물2 왜요?
인물1 둘 다 에이즈에 걸렸거든요.
강사 그렇다고 굳이 동반 자살할 필요가 있나요? 요즘 에이즈 치료약도 나날이 좋아지고 있는데.
인물1 우린 이런 끔찍한 병을 앓으면서 살아가고 싶지 않았어요. 상대방에게 흉한 꼴을 보이는 것도, 둘 중 누군가 먼저 죽는 것도 두려웠어요. 그런데 무엇보다, 자신에게 에이즈를 옮겼을지도 모르는 상대방을 용서할 수가 없었어요. 차라리 서로를 가장 사랑하는 순간에 함께 죽고 싶었어요.
강사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계속 하시죠.
인물1 사랑하는 당신, 병원에서 깨어나 나는 살고 당신만 죽었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차라리 웃었어. 우리는 늘 의견이 달랐지. 특히 당신은 물러서는 법이 없었어. 난 당신에게 고집이 너무 세다고 투덜대곤 했는데, 이번에도 당신은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던 거야.
인물2 (강사에게 속삭이며) 일부러 수면제를 덜 먹은 게 아닐까요?
강사 (인물2에게 속삭이며) 척 보기에도 고집이 그렇게 세 보이진 않네요.
인물1 혼자 남겨지자 난 갑자기 당신이 미워졌어. 당신의 찡그린 이마와 단점들과 실수들이 떠올랐어. 내가 모른 척 했던 당신의 위선이 선명하게 보였어.
인물2 (강사에게 속삭이며) 참 내, 죽다 살아나더니 사랑이 식은 모양이에요.
강사 (인물2에게 속삭이며) 아뇨. 단지 다시 살고 싶어진 거죠.
인물1 당신은 우리가 더 많은 대화를 나눠야 한다고 늘 주장했지. 모든 생각과 감정을 털어놓고, 모든 지적과 비판을 허용해야 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말을 좀 덜 해야 했는지도 몰라. 사랑하는 만큼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게 아니었어. 외로움은 에이즈보다 더 지독한 불치병이라는 걸 진작에 인정해야 했어.
강사 (혀를 차며) 외로움은 병이 아니에요.
인물2 그럼 뭐죠?
강사 생명 그 자체죠. 여러분이 생명을 버리려고 할 때 정확히 무엇을 버리려고 하는 건지 잘 생각해 보세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