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1 당신은 내게 당신 자신을 강요하곤 했어.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당신은 외쳤지. 나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하지만 당신은 그걸 입 밖에 낼 필요가 없었어. 그건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고 있는 유일한 한가지였으니까.
강사 그럼 모든 걸 이해한 거나 다름없죠.
인물1 당신은 내가 쓰는 단어를 늘 비스듬히 빗겨가곤 했어. 내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교묘한 방식으로 단어에 잔상을 만들었지. 가령 ‘휴식’이라는 평범한 단어가 왜 우리 사이에서는 그토록 첨예한 논쟁이 되어야 했던 거지?
강사 저도 비슷한 일을 겪곤 합니다. 가령 ‘용기’라는 평범한 단어가 왜 우리 사이에서는 그토록 첨예한 논쟁이 되는 거죠?
인물1 그건 마치 시인들의 대화 같았어. 일상적인 단어조차 양파 껍질이 벗겨지듯이 흩어졌어. 이해와 오해의 구분도 흩어졌지. 단어 하나하나가 뻥뻥 뚫리는 구멍 같았어. 단어 하나하나가 함정처럼 아슬아슬했어. 하물며 ‘사랑’이라는 단어는 도대체 얼마나 의심스러운 걸까. 그럼 우리는 뭐에 놀라기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입을 다물었어. 그리고 어리둥절한 채 섹스를 했어. 쾌락만큼 안전한 건 없으니까.
인물2 사랑은 미학적으로는 아름답지만 기술적으로는 지긋지긋하기만 하죠.
강사 아, 하지만 사람들이 빠져드는 건 바로 그 간극이에요. 원주와 원주율 사이의 영원한 간극처럼 말이죠.
인물2 기하학, 망할 놈의 기하학.
인물1 하지만 사랑하는 당신, 이제야 나는 비로소 깨달았어.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 당신을 속속들이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걸. 당신은 그저 처음 사랑에 빠지는 계기에 불과할 뿐이지. 당신이 죽은 후에도 나는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고 있고, 점점 더 사랑하고 있으니까. 아니, 어쩌면 이제야말로 난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는지도 몰라. 당신이야말로 내 사랑의 제일 큰 방해물이었거든. 그래서 나는 2년 전에 죽지 않고 살아남았나봐. 우리의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서 말이야. 물론 이 사랑도 영원하진 않겠지. 사랑은 결국 모든 걸 관통해 지나가고 나는 뒤에 남겨질 거야. 온전히, 자유롭게, 홀로. 이 병과 함께. 사랑하는 당신. 그렇게 되기 전에 나는 죽으려고 해.
강사 휴우, 마침내 본론이네요. 하마터면 코를 골 뻔 했어요.
인물1 난 당신에게 작별 인사는 하지 않을 거야. 우리의 작별은 이미 2년 전에 끝났으니까. 우리는 다시는 만나지 못할 테지. 그게 아쉽지는 않아. 아니, 오히려 안심이 돼. 이 모든 걸 다시 되풀이 하고 싶지는 않거든. 다시는 만나지 말자. 당신이 말했지. 그건 실은 내가 했던 말이었는지도 몰라.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자. (침묵)
강사 (박수를 치며) 좋아요. 잘 하셨어요. 훌륭합니다. 뭐, 처음에 장담하셨던 것만큼 짧지는 않았지만, 지나치게 길지도 않았어요. 기승전결 정리도 잘된 편이고, 나름 심금을 울리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다소 궤변 투성이에 좀 오글거리긴 하지만 그건 자살 때문이 아니라 사랑 때문이죠. 그걸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인물1 저기 그런데, 제 시체를 의료기관에 기부하겠다고 추신을 써넣어도 될까요?
강사 뭐, 그게 당신 마음을 편하게 한다면 그렇게 하세요.
인물2 의외네요. 죽은 후에는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시체 처리 같은 건 신경 끄라고 하실 줄 알았는데요.
강사 저런, 오해가 있는 것 같군요. 난 그렇게까지 꽉 막힌 사람이 아닙니다. 무정부주의자나 반사회분자는 더더욱 아니구요. 가는 마당에 사회에 도움이 된다면야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죠. 사체 기부가 자살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다만, 의료기관에서 그 기부를 받아 줄지는 의문이군요.
인물1 왜죠?
강사 자살자의 시신은 잘 받지 않아요. 특히 훼손된 시신은 말입니다.
인물1 훼손이요?
강사 제가 권해드릴 자살이 바로 추락사거든요. 그럼 아무래도 시신이 좀 훼손되지 않겠어요? 하지만 추락사는 한 번 자살에 실패했던 분들에게 아주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높이만 충분하다면 실패할 확률이 거의 없으니까요. 그리고 아주 손 쉬워요. 따로 수면제나 빨랫줄 같은 걸 준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적당한 장소를 찾아내서 딱 한 발자국만 앞으로 내디디면 그만이에요. 물론 그 한발자국이 말처럼 쉬운 건 아니지만요. 이 세상 전체가 발등 위에 올려져있는 것처럼 무거울 거예요. 한 발자국을 내딛기 위해, 말 그대로 젖 먹던 힘까지 다 써야할 겁니다. 뭐 어차피 더 이상 쓸 곳도 없는 힘이긴 하지만요. 자아, 그럼 이제 실습을 해보도록 합시다. 의자를 높게 쌓으세요. 최대한 높게요.
그들은 의자를 가져다가 무대 중앙에 겹겹이 탑을 쌓아올린다. 쌓아올린 의자 위로 올라간 인물1은 꼭대기 위에 서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는다.
강사 자, 기분이 어떻습니까?
인물1 (비틀거리며) 높아요. 어지러워요. 모든 게 잘 보여요.
강사 좋아요. 좋습니다. 제 큰형(큰오빠)이 이 방법으로 자살했습니다. 새벽 3시에 아파트 38층 옥상에서 뛰어내렸어요. 쿵 하는 소리에 아파트 단지 사람들 모두가 잠에서 깨어났죠. 엄청난 소리였어요. 하지만 사방이 조용했기 때문에 모두들 다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딱히 꿈자리가 뒤숭숭했던 사람도 없었구요. 형(오빠)이 발견된 건 다음날 아침이었어요. 하수구 구멍으로 피가 냇물처럼 흐르고 있더군요. 우리 식구들은 모두 형(오빠)이 너무 높은 곳에서 뛰어내렸다고 불평을 늘어놓았어요. 시체 상태가 과히 좋지 않았거든요. 뒤통수가 반이나 날아가고, 뇌는 곤죽이 되고, 몸에 있는 뼈란 뼈는 남김없이 부러졌죠. 10층에서만 떨어져도 문제없이 죽을 수 있는데 뭐 하러 38층까지 올라갔는지……. (혀를 찬다.) 떨어질 장소를 물색할 때는 꼭 높이를 참고하세요.
인물1 하늘이 정말 넓군요. 이렇게 넓은 줄 미처 몰랐어요. (양팔을 넓게 벌리며) 이제 난 하늘을 날게 되나요?
강사 글쎄요. 초를 치고 싶지는 않지만 추락과 비상에는 큰 차이가 있죠.
인물1 생각만큼 그렇게 큰 차이는 아닌지도 몰라요.
강사 생각만큼 그렇게 큰 차이는 아닌지도 모르죠.
인물2 뛰어내려요. 어서요.
강사 한 발자국이면 됩니다.
인물2 뛰어내려요.
강사 간단하죠.
인물2 뛰어내려요. 뛰어내려요.
강사 (관객들에게) 어째서 이토록 간단한 거죠?
인물2 뛰어요. 어서 뛰어 내려요.
인물1이 의자 위에서 신발을 벗는다. 그리고 잠시 고개를 숙이고 발밑을 바라보다가 의자 밑으로 뛰어 내린다. 밑에서 강사와 인물2가 손으로 받아낸다. 강사가 일으켜 세웠을 때 인물1은 완전히 얼이 빠져있다.
강사 (창백해진 인물1의 옷을 매만져 주며) 자, 됐습니다. 좋아요. 훌륭해요. 더 이상 가르칠 게 없어요. 이제 집으로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의자 꼭대기 위에 놓인 신발을 인물1에게 건네주며) 자, 가져가세요. 이 신발이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니까요. 꼭 성공하길 바랍니다.
인물1은 양 손바닥 위에 자신의 신발을 받쳐 들고 아무 말 없이 퇴장한다. 모두들 그 모습을 지켜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