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자살수업 (11)

by 곡도




강사 자아, 이제 우리 둘만 남았네요.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빨리 죽고 싶어서 마음이 급하실 텐데 말이죠.


인물2 아니에요. 급할 거 없습니다. 시간은 많으니까요. 우습게도 자살을 결심하고 나서야 저에게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시간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강사 그건 그래요. 인간의 수명은 너무 길어요. 계속 길어지고 있지요. 그만큼 시험에 드는 시간도 많아지는 겁니다. 80년, 90년을 사는 동안 자살하지 않는다는 건 정말이지 어려운 일이에요.


인물2 오늘 수업에 왔던 사람들은 정말 자살할까요?


강사 글쎄요. 그거야 알 수 없죠. 살고 싶다고 하면서 죽고, 죽고 싶다고 하면서 사는 게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전문가로서의 제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대충 짐작은 가네요. 아마 첫 번째 사람은 오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로또를 살 겁니다. 그리고 로또 당첨번호가 나오기도 전에 목을 맬 거예요. 두 번째 사람은 몇 날 며칠을 거울만 쳐다보며 앉아있을 겁니다. 그러다 어느 날 홀연히 사라져 버리겠죠. 운이 좋다면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세 번째 사람은 아마도 가장 빨리 자살할 거예요. 어쩌면 오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높은 건물을 발견하고는 곧바로 실행에 옮길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 사이에 사랑에 빠진다면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에요. 원래 사랑은 몇 초 만에도 이루어지는 거니까요. 몇 년 뒤에 다시 내 앞에 나타나 새로운 러브스토리를 들려줄지 누가 알겠습니까. 당신은 어때요? 조금이라도 마음이 바뀌었나요?


인물2 전혀요.


강사 (어깨를 으쓱하며) 좋습니다. 그럼 이제 당신 차례에요. 당신의 유언을 들어봅시다.


인물2 없습니다.


강사 네?


인물2 없어요.


강사 없다구요?


인물2 네, 없어요.


강사 유언이 없다는 말입니까?


인물2 네. 없습니다.


강사 남길 말이 없다구요? 마지막 한마디를 하지 않겠다는 거예요?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을 겁니까? 그냥 이대로 조용히 사라져버릴 거예요?


인물2 그렇습니다.


강사 아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뭐, 당신 같은 사람들이 있지요. 입을 꾹 다물어 버리는 사람들. 말이 목구멍에서 단단하게 굳어버린 사람들. 머릿속뿐만 아니라 내장까지 텅 비어버린 사람들. 죽기도 전에 이미 죽어버린 유령들……. 이건 비밀인데, 사실 자살자들 중에는 당신처럼 유서를 남기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아요.


인물2 그런데 그게 왜 비밀이죠?


강사 모욕적이기 때문이죠.


인물2 모욕이라니, 누구에게요?


강사 물론 살아있는 사람들에게죠. 이 세상 누군가가 자신의 생명을 버리면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다니, 사람들에게 그 보다 더 큰 모욕은 없을 겁니다. 아니, 분명 전 우주가 다 수치스러워 할 거예요.


인물2 이해가 안가네요.


강사 벌써 살아있는 사람들의 입장 같은 건 까맣게 잊어버린 모양이군요.


인물2 그럴지도 모르죠.


강사 뭐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모든 모욕과 수치는 산사람들의 몫이니까요. 그들을 더 모욕하세요. 그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비난하세요. 그들은 그러라고 있는 거니까요.


인물2 난 누구도 모욕하거나 비난하고 싶지 않아요.


강사 당신들이 이곳에 등장했을 때부터 (손으로 관객석을 가리키며) 당신들은 모든 사람들을 모욕하고 있습니다.


인물2 별로 놀랍진 않군요. 그건 바로 배우의 소임이기도 하거든요.


인물2가 배우처럼 거창하게 인사한다.


강사 (놀라며) 배우신가요?


인물2 그렇습니다. 연극배우죠.


강사 아이고, 이거 영광입니다. 큰 실례를 했네요. 전문가께서 이렇게 친히 방문해 주셨는데 미처 몰라 뵀습니다.


인물2 전문가는요, 무슨. 무명 배우일 뿐인데요. 늘 단역을 전전했지요. 예를 들면 내 대본에는 이름 대신 인물2라고 쓰여 있는 식이죠.


강사 무슨 말씀입니까. 연극의 진짜 전문가는 단역배우인데요. 솔직히 말해서 주인공 따위가 연극에 대해 뭘 알겠어요. 주인공들은 금세 연극 밖으로 달아나버리거든요. 연극 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더 몰입해버려요. 주인공을 연기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진짜 주인공이라고 착각한다니까요. 그럼 그 때부터 연극은 엉망이 되는 거예요.


인물2 하지만 난 평생 주인공이 되기 위해 애써왔는데요.


강사 세상에, 대체 주인공이라는 게 뭔데요? 누구를 주인공이라고 부르죠? 바로 대사가 제일 많은 사람이에요. 사람들은 대사가 많을수록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말도 안 되죠. 실은 주인공이란 별 의미도 실체도 없는, 나부랭이에 불과한 대사들을 몽땅 쓸어다가 처리하는 사람입니다. 주인공이랍시고 관객들 앞에 던져놓고는 그냥 계속 나불거리게 하는 거죠. 말하자면 미끼 같은 거예요. 관객들의 시선이 진짜 주인공에게 향하지 않도록 던져놓은 화려한 미끼. 하지만 진짜 주인공은 바로 당신 같은 단역배우죠.


인물2 (실소하며) 그럼 대사도 없는 그 ‘진짜’ 주인공은 대체 무대 위에서 뭘 하는 거죠?


강사 침묵하는 거죠. 그리고 지켜보는 거예요. 무대 위에서 무대를 지켜보는 거죠. 그게 진짜 주인공이 하는 일입니다.


인물2 (비꼬며) 아하, 그렇다면 난 이 세상에서 제일 위대한 주인공일 겁니다. 난 언제나 침묵하고 언제나 모든 걸 지켜보았으니까요.


강사 제 말이 바로 그겁니다. 당신 같은 분이야 말로 주인공 중의 주인공이고 전문가 중의 전문가죠.


인물2 뭐어, 강사님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강사 저, 그래서 말인데,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만, 여쭤보지 않을 수 없네요. 오늘 제 수업을 지켜본 소감이 어떠셨나요?


인물2 소감이요?


강사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꽤 좋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인물2 그럼요. 좋았습니다. 재밌었어요. 인상적이고, 기발하기도 했구요.


강사 에이, 그런 겉치레는 안하셔도 됩니다. 전문가들끼리 툭 터놓고 얘기해봅시다. 말하자면 좀 더 세부적으로요. 결국 모든 건 세부적인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인물2 글쎄요. 그게, 조금 아쉬운 점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만…….


강사 그래요. 괜찮습니다. 솔직하게 말해 주세요.


인물2 그러니까, 처음에 그 박수 말입니다. 일, 이, 삼, 사(박수). 이거요.


강사 별로였나요? 저런, 사실 전 조금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인물2 아닙니다. 나쁘지 않았어요. 좋았습니다. 수업 전체에 리듬감을 줬죠. 주제 의식도 살리구요. 강사님의 캐릭터를 돋보이게 하는 데도 효과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조금 길었어요. 1시간 내내 박수만 치고 있었으니까요. 만약 여기 관객들이 있었다면 공연이 끝난 뒤에도 그 박수 밖에는 기억나지 않을 겁니다. 박수치는 도중에 일어나서 나가버리지 않았다면 말이죠.


강사 그렇군요. 일리가 있습니다. 원래 그렇게 길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제가 조금 과욕을 부린 모양이에요. 분위기에 휩쓸려 버린 거죠. 수업 중에는 냉정해야 하는 데 말입니다.


인물2 무대 위에서 겁에 질리지 않는 것보다 흥분하지 않는 게 더 어려운 일이죠.


강사 맞습니다. 정말 그래요. 정확하게 알고 계시네요. 저 그럼, 아까 그 오케스트라 지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인물2 침묵의 자살 오케스트라요? 그건 멋졌습니다. 훌륭했어요.


강사 그래요?


인물2 우리 모두를 춤추게 만들었죠.


강사 (겸손하게) 말하자면 일종의 배경 음악입니다.


인물2 연극에선 배경음악이 정말 중요해요. 연극의 농도를 결정해 주거든요.


강사 (겸손하게) 전 세계의 배경음악이기도 하구요.


인물2 물론이죠. 만약 관객들이 있었다면 모두들 침묵 속에서 자신만의 자살 교향곡을 들었을 겁니다. 졸고 있지 않았다면요. 아니, 그 꿈속에서도 귓가를 맴돌았을 거예요.


강사 감사합니다. 이제야 마음이 놓이네요. 너무 쇼맨십만 앞세운 게 아닌가 싶어서 걱정했거든요.


인물2 쇼맨십을 빼면 인생에 뭐가 남겠어요?


강사 그건 사실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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