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2 강사님이야 워낙 베테랑이시니 더 흠잡을 곳이 없습니다. 자연스럽고, 활기차고, 재치 있고, 단호했지요. 문제는 학생들이에요. (우스꽝스럽게 인물3을 흉내 내며) 하지만 난 더 말하고 싶어요. 내 인생은 후회로 가득해요. (우스꽝스럽게 인물4를 흉내 내며) 모성. 그건 짐승의 본능이에요. 먹고, 싸고, 발정하는 짐승의 본능. (우스꽝스럽게 인물1을 흉내 내며) 나는 당신에게 ‘뭐라구요?’ 라고 말했지. 그게 내가 당신에게 했던 첫마디였어. (정색을 하고) 완전 초짜들이에요. 연기의 기본조차 되어있질 않아요. 좀 더 감정을 밀어붙였어야죠. 그러면서도 침착하게요. 대사에 음절을 나누고, 호흡을 조절하고, 진정성을 끌어냈어야 해요. 그리고 신체의 기능을 더 이용했어야죠. 손짓 하나, 어깨의 각도 하나가 대사 열 마디보다 더 중요할 때가 있거든요. 무엇보다 학생들 모두 시선처리가 엉망이더군요. 시선이 자꾸 허공을 헤매잖아요. 마치 (관객들 쪽을 가리키며) 거대하고 새하얀 백지를 홀로 마주보고 있는 것처럼요.
강사 그들은 실제로 그런 느낌이었을 겁니다.
인물2 무대 위에선 그러면 안 돼요. 빈틈을 보여선 안 됩니다. 작은 빈틈으로 물이 새어나가듯 연극도 삶도 바닥을 들어내니까요. (관객들을 쳐다보며) 자, 이렇게 관객의 눈을 똑바로 쳐다봐야 됩니다. 마치 그 관객이 매우 중요한 사람이라도 되는 듯이요. 마치 그 관객 한사람만을 위해 모든 배우들이 무대 위에 서 있다는 듯이요. 마치 그 관객이 이 연극의 원인이며 결과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야 그들은 내일도 또 티켓을 사들고 극장으로 달려올 테니까요. 그렇게 연극은 계속 되는 겁니다.
강사 그게 바로 주인공들이 하는 일이죠.
인물2 그게 바로 주인공들이 하는 일이에요.
강사 하지만 우리 학생들은 주인공이 아닙니다.
인물2 제가 한 번도 주인공인 적이 없었던 것처럼요.
강사 그들은 서투를 수밖에 없어요. 모두들 자살이 처음이고, 또 마지막이니까요.
인물2 그래서 연극이 좋은 거죠. 매일 무대 위에서 자살할 수 있거든요.
강사 모든 사람들의 꿈이죠.
인물2 예전에 자살하는 사람을 연기한 적이 있습니다. 10분 정도 나오는 단역이었는데, 물이 가득 찬 욕조에서 면도칼로 손목을 긋고 죽는 역할이었어요. 그런데 그 인물에게는 삶이 없었어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이름도, 과거도, 나이도, 대사도 없었어요. 전후가 없었고, 앞뒤가 없었어요. 그냥 욕조 안에서 자살하는 게 다였어요. 그저 자살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인물이었어요. 나는 그 인물이 누구인지, 왜 자살하는지도 모른 채 매일 무대 위에서 자살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최선을 다했어요. 오늘은 칼을 이렇게 그어볼까, 목은 앞으로 구부릴까, 입술을 찡그릴까, 마지막 순간에는 눈을 뜰까 감을까.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더 잘 죽기위해 계속 고민하고 연구했어요. 하지만, 이제 그만하려구요. 매일 무대 위에서 살아났다가 매일 무대 위에서 죽는 일 따위…….
강사 부활을 원치 않는 사람들도 있는 법이죠.
인물2 나에게는 미련도, 원망도, 의심도, 고통도 없습니다. 그런 건 이미 충분히 연기해 봤거든요. 심지어 자살까지도 이제는 진부하게 여겨져요. 그만 무대에서 내려올 때가 된 거죠. 이제 나는 마지막 공연을 하려고 합니다. 제 일생일대의 공연이 될 거예요. 그리고 은퇴하는 거죠. 영원히요.
강사 (박수를 치며) 좋아요. 좋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이에요. 오랜만에 제 가슴이 다 설레는군요. 예전의 좋았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자살이 불의도, 부도덕도, 불법도 아니었던 시절이요. 그래요. 당신에게는 아주 특별한 자살법을 알려드리도록 하죠. 우리 업계에서도 논란이 많아서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방법이지만, 난 오늘 그 위험을 감수하려고 합니다.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요. 관객들도 좋아할 거예요.
인물2 관객들이요? 여긴 우리 둘뿐인데요.
강사 과연 그럴까요? (관객들을 둘러보며) 이 세상은 시선들로 꽉 차있어요.
인물2 하지만 그 시선들은 눈이 멀었어요.
강사 그건 사실입니다만, 그렇다고 눈을 감고 있는 것도 아니죠.
강사가 의자 하나를 무대 전면에 옮겨 놓는다.
강사 자아, 여기 앉으세요.
인물2가 관객들을 향해 의자에 앉는다. 강사는 자신의 빨간 나비넥타이를 풀어서 인물2의 눈을 가린다.
인물2 눈은 왜 가리는 거죠?
강사 뭐, 일종의 ‘극적인 장치’라고 생각하세요.
강사는 인물2 뒤로 멀찍이 물러난다.
인물2 그런데 궁금한 게 있습니다. 왜 당신은 자살하지 않죠?
강사 저요?
인물2 자칭 자살 전문가라는 사람이 정작 본인은 자살하지 않는 게 이상하지 않나요?
강사 자칭 자살 전문가라는 사람이 정작 본인부터 자살해 버리는 게 더 이상하지 않습니까? 자살 전문가가 자살해 버리면 누가 자살에 대한 강의를 하겠습니까? 누가 여러분을 도와주겠어요? 누가 자살의 수준을 높여주죠?
인물2 그것도 그렇네요.
강사 뭐, 그건 공식적인 답변이구요, 좀 더 솔직히 말해볼까요? 제가 자살하지 않는 건, 그것이 추악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린 그걸 잊어선 안 돼요. (분노와 경멸이 뒤섞인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당신은 지금 추악한 일을 저지르려고 하는 겁니다.
인물2 (침묵)
강사 (웃으며) 물론 저도 언젠가는 자살할겁니다. 피할 수 없을 거예요. 버틸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난 여러분들처럼 성급하지 않아요. 난 이 지구상에서 마지막으로 자살하는 사람이 될 테니까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자살하고 나면, 더 이상 자살할 사람이 한 사람도 남지 않았을 때, 나는 그 시체 더미 위에서 기꺼이 내 목숨을 끊을 거예요.
인물2 하지만 난 그 때까지 기다릴 수 없어요.
강사 그 누구도 강요할 순 없죠.
인물2 무대 위는 너무나 쓸쓸해요.
강사 대사들만 낙엽처럼 굴러다니죠.
인물2 그나저나 강사님께는 뭐라고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지…….
강사 별 말씀을요. 제 소임을 다했을 뿐인데요. 게다가 난 당신이 마음에 듭니다. 우린 서로 통하는 데가 있어요. 만약 당신이 자살하지 않는다면 우린 좋은 친구가 되거나 혹은 더 깊은 관계가 될지도 몰라요.
인물2 정말 그럴까요?
강사 물론 당신이 자살하지 않는다면 내게는 더 이상 매력이 없을 테지만요. (관객들을 향해 어깨를 으쓱한다.) 자, 준비됐나요?
인물2 준비 됐습니다.
강사 확신하세요?
인물2 확신합니다.
강사는 품속에서 권총을 꺼내 앞에 앉아있는 인물2를 향해 겨눈다. 그리고 소리 없이 만족스럽게 웃음을 터트린다. 인물1, 인물3, 인물4도 조용히 무대로 나와 인물2를 향해 총을 겨눈다.
인물2 무슨 일이죠?
강사 아무 것도 아닙니다. 당신은 지금 이 순간에만 집중하세요. 어쩌면 당신이 평생을 꿈꿔왔을지도 모르는 이 순간을 말입니다. 자, 여기가 무대라고 상상해 보세요. 그리고 당신이 연극의 주인공이라고 상상해 보십시오. 뜨거운 조명이 무대를 비추고 수많은 관객들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수백 개의 눈들이 당신만을 지켜보고 있어요. 이제 마지막 장면입니다. 주인공이 자살하는 아주 중요한 순간이에요. 결국 와야할 곳에 도달한 것이죠. 주인공이 죽으면 마침내 막이 내리고, 모두들 큰 소리로 박수를 칠겁니다. 어때요. 관객들의 시선이 느껴지나요?
인물2 네, 느껴져요. 내 앞에 관객들이 꽉 차있어요. 모두들 나를 바라보고 있어요. 나만을 바라보고 있어요. 내가 자살하길 기다리고 있어요. 내가 자살하길 기대하고 있어요. 그게 이 연극의 결말이거든요. 결국 연극은 끝나야 하거든요. 난 내 역할을 완벽하게 해내고 싶어요.
인물2, 인물3 하지만 난 더 말하고 싶어요. 내 인생은 후회로 가득해요.
인물2, 인물4 모성. 그건 짐승의 본능이에요. 먹고, 싸고, 발정하는 짐승의 본능.
인물2, 인물1 나는 당신에게 ‘뭐라구요?’ 라고 말했지. 그게 내가 당신에게 했던 첫마디였어.
강사 당신은 지금 추악한 일을 저지르려고 하는 겁니다.
인물2 (미소를 지으며) 네, 이건 정말로 추악한 일이에요.
강사가 웃는다. 무대가 점점 어두워진다. 암전. 쿵, 하고 어두운 무대 위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침묵.
커튼콜.
모든 등장인물들이 인사를 마치고 나면 마지막으로 강사가 앞으로 나온다.
강사 여러분, 여러분께 한 가지 고백할 게 있습니다. 저희 연극에는 아주 약간의 과장이 있었습니다. 실은 4초에 한명씩 자살한다는 건 사실이 아닙니다. 40초 마다 한명씩 자살하고 있어요. 속이려던 건 아니지만 연극의 재미를 위해선 어쩔 수 없었습니다. 40초마다 한 번씩 박수를 쳤다가는 여러분 모두 도중에 나가버렸을 테니까요. 어떻습니까. 생각보다 적게 자살한다니, 안도하셨나요? 아니면 실망하셨나요? 자, 그럼 안녕히,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다음 수업 때 또 뵙도록 하죠.
등장인물들이 다함께 배우처럼 거창하게 인사한다. 퇴장.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