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웃음가스 (1)

by 곡도




등장인물


무명

호레이스 박사

여배우

시장

사업가

교수

복지가

평론가

시인

과학자

?

참관인들




* 무명의 성별은 임의적이다.

* 여배우, 시장, 호레이스 박사를 제외한 모든 인물들의 성별은 임의적이다.

* 무명은 마지막 단 한 번을 빼고는 웃지 않는다.




1부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무대.


하얀 셔츠에 검은 색 바지/치마를 입은 간소하고 깔끔한 차림의 인물이 들어와 무대 왼쪽에 선다. 그는 침착하지만 어색한 눈빛으로 관객들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연다.


무명 [이야기가 찾아와서 내 문을 두드렸는데 내가 듣지 못한 거야. 당시에는 사는 것이 너무도 힘들어서 암울한 생각만 했었지. 그 때는 봄조차도 침입자 같았어. 새들의 지저귐을 듣고, 싱싱하고 푸른 나뭇잎들을 보면서 행복해야 하는데도 우리는 화를 냈지. 우리의 마음은 너무 침울해서 우리가 즐겨 불렀던 옛 민요조차도 감당할 수 없었어. 그러니까 이야기가 찾아와서 문을 두드렸다 해도 우리는 듣지 못했을 거야. 아무도 반기지 않았겠지. 이야기는 문을 두드려도 대답이 없자 가버렸는지도 몰라. 나가서 찾아봐야겠어. 시골, 숲 속, 드넓은 해변에 가서 말이야.]

(잠시 침묵) 이건 안데르센 동화에 나오는 한 구절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안데르센의 이야기를 좋아했어요. 대단한 모험이나 거창한 운명 같은 건 없지만, 뭐랄까, 사소한... 소소한... 수수한... 섬세한... 세심한... 그래요. ‘세심한’이 좋겠네요. 세심한 이야기들이죠. 안데르센 같은 사람이 이야기 해주지 않았다면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을, 기억할 가치조차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요. 아, 물론 황새나 완두콩이나 양초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요. 하나같이 흔하고 저렴한 것들... 제가 살아온 인생처럼 말입니다. (잠시 침묵) 하지만 제 인생에도 들려줄 만한 그럴 듯한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멋진 이야기에요. 아, 물론 당신들도 그럴 듯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 겁니다. 그렇고말구요. 단지 아무도 관심이 없을 뿐이죠.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당신 얘기를 들려줄 겁니까?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당신 얘기를 들어주죠? 그럼 그렇게 앉아만 있으면 안 돼요. 그렇게 멍하니 듣고만 있으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을 붙잡고 얘기를 해야죠. 큰 소리로 내 이야기를 외쳐대야죠. 사람들이 진저리를 치며 화를 내다가 마침내 귀를 기울일 때 까지 말입니다. 바로 이렇게요. (큰 소리로) 자, 여러분. 제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시겠습니까? 그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던, 기록될 가치가 없었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안데르센이 성냥 한 개비에 대해 멋진 얘기를 우리에게 들려줬던 것처럼, 제 이야기도 나름의 재미가 있을 겁니다. 뭐, 약속드릴 순 없지만요.

[여기서는 큰 소리로 노래할 수 있지. 아래에서는 감히 속삭이지도 못하는 노래를. 빗장 뒤에 숨겨져 있는 모든 것을 노래할 수 있어. 쥐들이 살아있는 것들을 모두 먹어 치우는 빗장 뒤에 숨겨진 음침한 이야기들을. 그곳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그 곳 얘기를 들은 사람도 없고. 지금도 듣지 못해. 종소리가 크게 울리기 때문이지.]


딩동. 딩동. 종소리가 울린다. 무대 오른쪽에서 하얀색 풍선들이 천천히 무명을 향해 날아온다. 무명은 날아오는 풍선 줄들을 한 개씩 잡는다.


무명 솔직히 저는 안데르센 동화 외에는 거의 책을 읽지 못했습니다. 집안도 넉넉하지 못했고, 특별한 재능도 없었고, 머리도 나쁘고, 공부에도 도통 흥미가 없었어요. 심지어 돈을 많이 벌겠다거나 출세를 해보겠다는 야망도 없었습니다. 그저 되는 대로 살아가고 있었죠. 착실하게, 순진하게, 무난하게, 무능하게... 그래요. 주변 사람들에게도 별 영향력이 없는 시시한 인간에 불과해요. 고작 해야 투표할 때에나 머릿수가 집계될 뿐이죠. 통계나 표본의 좌표에만 존재하는 1차원적인 점 하나. 저 같은 사람보다는 아마도 유령이 더 생기가 넘칠 걸요. 하지만 유령이 될 때까지는 저에게도 아직 얼마간의 시간이 있으니까요. [이야기는 문을 두드려도 대답이 없자 가버렸는지도 몰라. 나가서 찾아봐야 겠어. 시골, 숲 속, 드넓은 해변에 가서 말이야.] (사이) 저도 제 이야기를 찾아보고 싶었습니다.


무명의 한 손에는 어느새 풍선이 풍성하게 들려있다.


무명 고향을 떠나 도시로 올라온 저는 특별한 직장도 없이 이곳저곳을 전전 했습니다. 주로 식당 종업원이나 가게 점원, 청소부, 기술자 보조, 일용직, 하인 등으로 일했습니다. 다른 듯 하지만 모두 비슷비슷한 일들이에요. 제 눈에 여러분이 모두 비슷비슷해 보이는 것처럼요. 실망스럽게도 이 거대한 도시에는 저를 기다리고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 같은 건 없었습니다. 주인공은 이미 다 다른 사람들 차지고, 저는 그저 엑스트라나 소품에 불과했죠. 여러분은 짐작할 수 있으시겠어요? 연극 무대 위에서 종업원3이나 구경꾼5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요. 행인2나 병사7은 대체 누구인거죠?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을까요? 과연 그들이 그 이야기 안에 있기는 한 걸까요?


어디선가 복지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복지가 목소리 49번 지원자.


무명 아, 네, 네에.


복지가 목소리 오른쪽으로 돌아봐. 왼쪽으로 돌아보고. 높이 점프해봐. 뭐, 나이도 적당하고, 외모도 그럭저럭, 최소한 절름발이나 곰보는 아니니까 말이야. 웨이터/웨이트리스를 해 본 경험이 있나?


무명 네에, 있습니다.


복지가 목소리 어디서?


무명 그게, ‘이데아’란 카페하고, ‘핫도그천국’이라는 레스토랑 하고…….


복지가 목소리 그건 곤란한데. 모두 변두리 3류 업소들이잖아. 말단 공무원들이나 술주정뱅이들만 득실거리는. 하지만 이번 파티는 아주 중요한 행사란 말이야. 수준 높은 저명인사들이 많이 오지. 그래서 웨이터/웨이트리스도 아무나 뽑을 수가 없어. 몸가짐이 예의바르고 존경심을 갖추어야 해. 친근감을 표현한답시고 주책없이 수다를 떨거나 손님들 앞에서 히죽거려서도 안 돼.


무명 저, 그런 염려는 안하셔도 됩니다. 저는 웃지를 못하니까요.


복지가 목소리 뭐라고?


무명 저는 웃지를 못해요. 이제까지 한 번도 웃어본 적이 없습니다. 딱히 웃을 일도 없었고, 그 어떤 것도 별로 웃기지가 않아요. 마치 누군가 저의 대본에만 ‘웃지 않는다’라는 지문을 적어 놓은 것처럼 말이죠. 쓰지 않아서 굳어버린 근육처럼 제 얼굴도 웃는 기능을 상실해 버린 모양입니다.


복지가 목소리 참 희한한 일도 다 있군. 웃지 못하는 사람이라니. 울지 못하는 사람은 많이 봤지만 말이야. 어쨌거나 웃지 않는다는 건 웨이터/웨이트리스로서는 큰 장점이지. 품위 있는 손님들은 고용인들이 웃는 걸 좋아하지 않거든. 흠, 좋아. 자네를 고용하도록 하지. 파티 때 내 옆에서 나를 도와주도록 해. 보수는 넉넉하게 줄 테니까.


무명 (관객들을 향해) 여러분. 제 이야기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별안간 무대가 밝아지며 요란한 음악 소리가 울려 퍼지고 화려한 파티복을 입은 사람들이 퍼레이드처럼 줄지어 들어온다. 무명은 여전히 손에 풍선 다발을 든 채 손님들을 파티장으로 안내한다. 인물들은 하나같이 고상하고 예의바르며 과장된 몸짓을 하고 있다. 그들은 탁자 위에 놓여있는 길쭉한 샴페인 잔을 하나씩 손에 들고 우아한 포즈를 취한다. 사치스럽고 흥겨운 분위기가 가득하다.


평론가 (여배우에게) 이런 이런, 여기서 만나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오늘도 역시 아름다우시군요. 오늘의 컨셉은, 어디보자, 카르멘인가요?


여배우 (탱고 포즈를 취하며) 네, 맞아요. 제가 3년 전에 맡았던 배역이죠. 오랜만에 입어봤는데 여전히 옷이 잘 맞아서 기분이 아주 좋답니다.


시인 언제나 이렇게 무대 의상을 입고 다니시나요?


여배우 그럼요. 여러분과 마찬가지죠. (무대 아래 관객들을 바라보며) 어머나, 여기는 전망이 참 좋네요. 거리가 한 눈에 보여요.


무명을 제외한 인물들 모두 무대 앞으로 다가와 관객들을 바라본다.


교수 그렇군요. 수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고 있네요. 기차역을 향해 허겁지겁 뛰어가는 신사, 신문을 파는 행상인, 커다란 개를 끌고 가는 여자, 운전수들과 마차꾼들, 감자 바구니를 들고 가는 아이들…….


과학자 (손을 눈 위로 들어 올리며) 세상에, 눈이 참 좋으시군요. 난 다 거기서 거기로 보이는데요. 비슷한 얼굴에 비슷한 복장, 비슷한 표정들.


평론가 자신들의 생각에 골몰하느라 모두 땅바닥만 보고 있어요. 이 위를 올려다 볼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말입니다.


시장 위를 올려다 본 들 우리가 보이지는 않을 겁니다. 단단한 시멘트와 유리에 가로막혀서 말이죠.


사업가 세상에, 마치 새까만 개미들 같아요.


시인 진부한 표현이지만 그럴 듯 하네요. 하지만 실제 개미들이 저들을 본다면 지극히 타락했다고 할 걸요.


그 때 복지가가 크고 화려한 자선 모금함을 밀며 무대에 등장한다.


복지가 반갑습니다, 여러분. 반가워요. 자선 모금 파티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모두들 서로 과장되게 인사한다. 관객들을 향해서도 인사한다.


복지가 참 좋은 밤입니다. 인정이 넘치는 따듯한 밤이에요. 어려운 우리 이웃들을 돕기 위해 이렇게 친히 발걸음을 해주신 여러분께 뭐라 말할 수 없이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허리를 굽혀 인사한다.) 혹자는 19세기가 인류 역사상 가장 이기적이고, 치열하며, 가혹하다고 불평들을 해대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전혀 사실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여러분 같이 진실한 친구들이 있으니까요. 세상은 여전히 살만한 곳이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모두들 살만한 곳이고 말구요. 그건 사실이에요.


복지가 자, 보세요. 오늘은 어제보다 더 좋아졌습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좋아질 테구요. 모레는 내일보다 더 좋아지겠죠. 그럴 수밖에요. 기술은 발전하고, 지성은 확대되고, 사람들은 가까워지고, 세계는 또렷해졌으니까요. 이제 인간이 이루지 못하는 일이란 없습니다. 알아내지 못할 것이 없고 가지 못할 곳도 없지요.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에요. 결국 해내고야 마니까요. 우리는 나폴레옹의 사전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사전에서 불가능이란 단어를 지워야 할 겁니다. 뭐든지 가능해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겁니다. 상상으로만 가능했던 엄청난 일들이요. 누가 아나요? 언젠가는 사람이 저 달나라까지 날아가게 될 지두요.


모두 웃는다.


모두들 뭐든지 가능해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겁니다. 상상으로만 가능했던 엄청난 일들이요.


시장 그럼 다 함께 19세기를 위해 건배하는 게 어떨까요?


모두들 그거 좋은 생각이에요. 그렇게 합시다.


복지가 그럴까요? 저는 여러분의 우정과 건강을 위해 건배할 생각이었지만, 뭐든지 대의가 앞서는 법이죠.


복지가가 샴페인 잔을 높이 든다. 모두들 샴페인 잔을 높이 들어 올린다.


복지가 살맛나는 세상.


사업가 기회의 다이너마이트.


시장 힘의 자기장.


시인 자유의 폭풍우.


여배우 (치마를 들어 올려 넓게 흔들며) 영광의 비누거품.


평론가 위대하고 일상적인 게임들.


과학자 난쟁이 어깨 위의 거인.


교수 수백만의 피뢰침.


? (침묵한 채 샴페인 잔을 높이 든다.)


모두들 19세기를 위하여-


모두들 샴페인을 마시며 즐거워한다.


여배우 아, 정말 유쾌하네요.


시인 멋진 밤입니다.


사업가 샴페인도 달콤하구요.


복지가 사양 말고 마음껏 드십시오. 술, 요리, 과일, 음악, 뭐든지 여러분에게 걸맞은 최고급으로 준비했으니까요.


모두들 최고급. 멋진 취향이에요. 훌륭합니다.


모두들 왁자하게 웃고 떠들어댄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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